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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거대한 새장 같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중국만세’저자 장리자의 중국비판

굴어당 2011. 4. 8. 22:40
“돈 맛 알게 된 인민들 정치 이슈에 무뎌져
확대된 새장 속에서 여전히 길러지고 있어
제2의 톈안먼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난징 미사일 공장의 노동자 출신 톈안먼 시위에도 주도적 참여
영국인과 결혼 저널리즘 공부 미·영 언론서 ‘중국통’ 활약

▲ 격정적인 중국의 1980년대를 보낸 영국 국적의 중국인 저널리스트 장리자. photo Ben McMillan
“중국은 아주 큰 새장이죠. 맘껏 날아오르다가도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게 되는 통제사회니까요. 하지만 새장의 공간이 아주 커서 인민들이 답답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 이것이 내가 느끼는 중국입니다.”
   
   한 영국 국적 중국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 2008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됐다. ‘중국의 변모와 변치 않는 중국을 동시에 보여주는 최고의 논픽션’이라고 뉴욕타임스는 극찬했다. 1980년대 중국의 모습을 기록한 이 책은 본국에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금서(禁書)로 지정됐다. 저자는 장리자(47·張麗佳). 책 이름은 ‘중국만세!(Socialism is Great)’다.
   
   대혼란을 겪은 중국의 지난 반세기를 날카롭게 해석하는 저널리스트. 이른바 중국 ‘새장론’을 주장하는 장씨의 책 ‘중국만세’가 지난 3월 25일 한국에서도 번역·출간됐다. 이미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프랑스 등 세계 8개국에서 번역·출간됐다. 전형적 중국인 인상의 한 소녀가 양 두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책 표지는 해외 출간본과 똑같다.
   
   ‘중국만세’는 소설이 아닌 회고록이다. 글은 저자인 장씨가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사일 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1980년부터 전개된다. 1964년 장쑤성 난징(南京)에서 태어난 그는 ‘학살의 도시’ 난징에서 덩샤오핑의 경제개방 정책과 제2차 톈안먼사건을 체험했다. 536쪽 분량의 책엔 그의 나이 열여섯부터 스물여섯까지 10년간 벌어진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중국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21세기 패권국가의 이면이 드러난다. 책 제목 ‘중국만세’는 중국식 사회주의 찬양이 아니라 비판이 담긴 ‘역설(逆說)’의 의미다.
   
   한국에서 책이 발간된 지 4일째, 영국인 남편과 이혼하고 현재 두 딸과 함께 베이징에 살고 있는 장리자씨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1990년대 영국 유학길에 올라 저널리즘과 문학을 전공한 그는 영국 BBC와 가디언, 미국 NPR, 뉴스위크 등에 글을 기고해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체험한 사회주의의 중국 역사를 영문으로 실감나게 담아낼 수 있는 중국인이 드문 까닭이다.
   
   그는 지난 3월 29일 첫 통화에서 “책은 내가 1980년대 난징에 있는 미사일 공장에서 일했던 내용을 회고한 것이며 모든 내용엔 거짓이 없다”고 운을 뗐다.
   
   
   중국 사회주의 혼란의 역사 영문으로 펴내
   
   1964년 난징에서 태어났지만 장씨는 지금은 영어가 중국어보다 더 편하다고 말했다. 장씨는 전화통화 후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도 기자가 중국어로 보낸 질문에 영어로 답했다.
   
   “정치적인 이유겠죠. 책은 2008년 3월 뉴욕의 한 출판사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암울했던 중국의 1980년대를 버티고 영국 유학길에 오르기까지의 10년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였고요. 원래 내가 지은 책 이름은 ‘우물 안 개구리(frog in a well)’였는데 출판사 측에서 ‘중국만세(Socialism is Great)’가 더 좋겠다고 했습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의 리뷰가 나왔는데 나와 출판사 모두 깜짝 놀랐어요. 작가들에겐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책이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기 때문이죠.”
   
   그의 말처럼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책은 드물다. 중국이 비극적 과거를 청산하고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대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글엔 중국 정부가 ‘언급하지 않았으면’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때로는 작가가 의도치 않더라도 말이다. ‘중국만세’에도 1989년 저자가 톈안먼 사건 당시 난징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얘기가 기술돼 있다. 장씨가 말하는 ‘정치적’ 이유는 이를 뜻하는 듯했다. 장씨는 “뉴욕타임스에 내 책에 대한 리뷰가 실렸을 때부터 중국 검열 당국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중국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내 책 관련 기사가 삭제돼 실리지 않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씨가 민감한 중국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에도, 나에게도 1980년대는 특별하고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0년대는 내가 세상 밖에 나온 시기였고,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민들이 음지에서 서서히 밖으로 나왔고 여성들은 마오쩌둥 로고가 박힌 재킷을 벗을 수 있게 됐어요. 덩샤오핑은 중국을 경제 개발로 이끌었고 이는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됐습니다. 나는 그것에 초점을 맞췄을 뿐입니다.”
   
   
   ‘검은 모자’의 꿈
   

▲ 중국의 1980년대 모습을 담은 ‘중국만세!’.

책의 도입부는 중학교 3학년 이야기로 시작된다. 1980년은 문화대혁명(1976년)이 갓 막을 내리고 중국사회가 대혼란에 빠졌을 때다. 중국 정부는 당시 치솟던 실직자 수를 줄이기 위해 ‘딩즈(頂職·부모의 일자리 물려받기)’ 정책을 실시했다. 그 역시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16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일터인 리밍공장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일했던 공장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대륙간탄도미사일(사정거리가 5000㎞ 이상인 탄도미사일)의 부품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장씨는 공장에서 일했던 10년을 회상하며 “돌이켜보면 정부가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해본 것 같다”고 말했다. “책에도 쓰여있지만 1980년대 중국에서 강력히 금지된 세 가지가 있었다. 공장 내 연애, 혼전 임신, 영어 공부 등인데 나는 이를 모두 어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당시 중국의 관영공장에는 ‘생리경찰’이 존재했다고 한다. 처녀의 임신 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해 매달 여성 노동자들의 생리여부를 담당자가 검사하는 것이었다. 생리가 온 것을 확인하면 생리대 1봉지가 무료로 제공됐다. 영어 교육이 엄격히 금지됐던 것은 ‘서방 제국주의 언어’를 공부함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공장에 다니던 중 3명의 남성과 사귀었고, ‘아름다운 나라’ 미국으로의 유학을 꿈꾸며 틈틈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공장에서 벌어들이는 월급으로는 평생을 모아도 비행기 항공료조차 댈 수 없었을 때였다.
   
   장씨는 이를 두고 “검은 모자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보통 두 가지였다”며 “외국 대학의 졸업장을 따는 ‘검은 모자의 길’과, 정부를 위해 일하며 막강한 권력자로 나아가는 ‘붉은 모자의 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불륜에 대한 고백도 있다. 그는 유부남이었던 중국 남성 량과 헤어지고 나서 이름 모를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고, 이후 임신과 낙태를 경험한다. 산아정책이 엄격한 당국의 감시에 걸리지 않고 낙태를 한 것에 대해 장씨는 “중국에는 많은 규정이 있는 만큼 그 규정들을 피하는 방법도 참 많았다”고 답했다. 중국에서 낙태를 이르는 말인 ‘다타이(打胎)’는 말 그대로 ‘태아를 때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1인 1자녀의 산아정책 때문에 낙태는 중국에서 흔한 일”이라며 “중국 여자들은 낙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옥스퍼드 대학생과 노동자 딸의 만남
   
   1989년 4월 14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사망하자 중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수도인 베이징에선 학생과 노동자 등이 톈안먼(天安門)광장에 모여 단식 연좌시위를 계속했다. 집회는 곧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로 커졌고 급기야 정부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세계는 할 말을 잃었고 중국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1989년 6월 4일 벌어진 이른바 ‘피의 일요일’, 톈안먼사건이다.
   
   장리자도 당시 현장에 있었다. 그는 톈안먼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시위대를 조직, ‘난징의 톈안먼’인 구루(鼓褸)광장에 공장 인부들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군중을 대표해 연단에 올라 연설도 했다. 기자가 당시의 분위기를 물었다. 그의 말이다.
   
   “당시 난징을 대표하는 구루광장에 시민들이 모여들었어요. 야영 준비를 하고 방송 도구 등을 챙겨 나와 광장을 점령했죠. 나는 내가 근무하던 공장의 인부들을 선동해 광장으로 갔어요. 거기서 톈안먼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1989년이 없었다면 우리의 ‘새장’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진 못했을 겁니다.”
   
   톈안먼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후 장씨는 시위에 가담한 죄로 정부의 ‘특별조사팀’에 의해 취조를 받았다. 다행히 조서를 꾸리고 지장을 찍은 다음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1988년 어느 여름, 그는 톈안먼광장이 위치한 베이징 자금성 앞에서 영국남자 캘럼 매클라우드를 만나게 된다.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이 예정돼 있었던 캘럼은 입학 전 배낭여행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스코틀랜드 농부의 아들인 캘럼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광장 안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첫눈에 호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장씨에게 자금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고 유창한 영어로 대답하는 그에게 장씨는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이 시작됐다. 베이징 징산(京山)공원에서의 아침, 만리장성에서의 저녁. 여행은 장씨의 고향인 난징에서 타이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스코틀랜드 농부의 아들이자 푸른 눈동자의 옥스퍼드 대학생과 무산계급 노동자의 딸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으로의 유학을 꿈꿔왔던 그는 그해 연말, 캘럼을 따라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캘럼의 나이가 22살 미만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그곳에서 두 딸을 낳았고 소원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런던 골드스미스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대혼란을 겪은 중국의 어제 오늘을 날카롭게 꼬집어내는 장씨의 글을 서방 언론들이 신뢰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삶의 역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장씨가 서양 언론에 기고한 글들은 중국의 ‘힘 없는 대중’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은 굉장한 나라”
   

photo Folha

최근 서양 언론들의 관심이 집중된 ‘모리화(茉莉花·재스민)혁명’은 과거 톈안먼 사태와 닮은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모리화혁명을 대하는 장씨의 관점은 달랐다.
   
   “이번 모리화혁명은 실행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과거 사람들이 톈안먼으로 몰려든 건 왜였을까요? 그들은 시위가 하고 싶었거나 인권 회복을 요구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의 삶 자체가 불행하다고 느꼈어요. 1989년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올해 모리화혁명이 예정된 날 거리를 지켰던 건 무장경찰과 외신기자들뿐이었어요. 가까운 미래에도 톈안먼사건 같은 시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인터넷 같은 매체를 통해서만 대중들이 불만을 내뿜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체제가 안정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는 “중국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앞서 말한 ‘새장론’을 재차 언급했다.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정책을 시작으로 중국 당국이 의도적으로 인민들이 돈을 버는 데 집중하게 했다는 것이다. ‘돈 맛’을 알게 된 인민들은 중국 당국이 처리하는 갖가지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무뎌졌다. 그는 “한손으로는 권력을 쥐고 잠재적 협박이나 반체제적 인사들을 가두는 척했지만 또 다른 손으로는 사람들에게 경제활동의 자유를 안겨줬다”며 “새장은 점점 커졌고 사람들이 한계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이 속박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점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중국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부와 자유를 충분히 즐기고 있고, 중국엔 아직도 선택과 기회가 널려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정책에 큰 오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경제성장과 동시에 정치적인 완화정책 역시 함께 이뤄졌어야 했다”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던 것이 인민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당국의 영원한 숙제인 언론통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기자가 “중국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을 때 학교에서 가르쳐준 건 이론뿐이었다”고 하자 장씨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는 “중국 당국의 검열이 엄격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제약 속에서 미디어들이 각각의 역할을 하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주의 경제로 접근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미디어들도 결국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미디어는 특종이 없으면 파워를 잃고 돈을 벌 수 없지 않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중국일지라도 훌륭하고, 진지하고, 직설적인 기사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게 중국에서 훌륭한 저널리스트와 좋은 기사거리들을 간간이 볼 수 있는 이유예요.”
   
   그에게 “한국에 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웃으며 “2001년 한국에 처음 방문하기 전까진 한국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꼬마였을 때 ‘두 한국 소녀의 운명’이라는 북한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두 쌍둥이 자매가 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으로 헤어졌죠. 그런데 한국에서 살게 된 아이는 온갖 고문과 고통을 겪으며 끔찍한 삶을 살고 있는 걸로 나오더라고요. 그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한국은 굉장한 나라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