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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유진오. 법학자·문필가·정치인 한국의 대표 지성 대한민국 헌법 제정의 주역

굴어당 2011. 4. 8. 22:45
경성제대 수석 입학·졸업 조선학생들의 자존심 살려,
고려대 총장 맡아 사학의 기틀 마련하기도

문학·철학에도 조예
‘창랑정기’ ‘김강사와 T교수’ 등
노동·시정소설 발표 문필가로도 이름 날려

독일어·영어·한학 통달
10년간 한·일회담 이끌며 대일배상요구조서 작성 등
한·일국교 정상화 초석 다져

photo 유종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는 법학자와 교육자, 문필가와 정치인으로 한국 현대사에 두루 발자취를 남겼다. 일제 때 개교한 경성제대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그는 일본 학생들을 압도한 한국의 대표 수재로 꼽히고 있다. 한국문단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해 왔으며, 광복 후에는 헌법 제정의 주역을 맡았고, 오늘의 고려대학교를 일류 사학으로 일궈내기도 했다.
   
   현민은 1906년 5월 13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7번지에서 유치형(兪致衡)과 밀양 박씨 사이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민은 유길준과 같은 기계(杞溪) 유(兪)씨의 일찍이 개화된 집안 출신이다. 부친인 유치형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한 후 귀국, 법률기초위원을 역임하고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제 본적도 화동 137번지이지요. 할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사셨고 아버지께서 자라신 곳이지요. 화동이란 지명은 현재 행정구역에서는 없어졌는데, 안국동에서 조금 더 들어간 한국일보사 부근으로, 지금은 수송동이라고 하지요.”(차남 완씨)
   
   
   대학 예과 모의시험서 일본인 제치고 수석
   


   현민은 1918년 재동보통학교를 졸업하며, 이듬해 4월에 경성고보(현 경기고의 전신)에 입학하고, 10월에 성진순(成辰順)과 결혼한다. 1924년 봄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자리에서 실력을 겨룬 ‘제1회 대학 예과 고등학교 입학모의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이어서 곧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A에 입학하여 1926년에 법문학부 법학과를 다녔다.
   
    “경성제대 입시를 눈앞에 두고 제1회 대학 예과 모의시험이 있었다. 경성고보·경성중·용산중 등 세 학교 학생, 또는 조선과 일본 학생의 실력경쟁 시험장이었다. 시험 결과는 뜻밖에도 내가 수석이라, 나 자신도 크게 의외였다. 이 모의시험으로 나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동급생들도 일본인 중학생에 대한 그때까지의 열등감을 씻게 되었다.”(‘경성제국대학’ 현민의 회고, 이충우 지음)
   
   현민은 대학 생활에서 공부뿐만 아니라 자유와 낭만을 마음껏 구가했다. 그는 법학보다도 문학과 철학에 더 흥미를 느꼈으며, 한때 철학과로 전과(轉科)원까지 냈다. 이 무렵 그는 낙산문학회를 조직하여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김계숙(서울대 대학원장 역임), 전승범 등과 조선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는 일기에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히 적곤 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조선경제연구회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진땀을 빼는 화근이 되어 다시는 일기를 쓰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중학 5년 시절에는 이재학군, 후에 화가가 된 김주경군 등을 포함한 급우들끼리 모여 ‘십자가’라는 시집을 간행하였는데 ‘십자가’는 우리가 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에도 몇 호 간행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예과 입학시험에 내가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하여 신문기자가 찾아왔는데, 인사를 하고 보니 나도향이었다. 도향은 그때 신문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고 있어서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인데, 알고 보니 나보다 2~3세 연상밖에 안되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때 우리나라 신문학은 그만큼 젊었던 것이다.”(‘나의 문단교우록’ 유진오, ‘사상계’ 특별증간호 1962년 2월)
   
   
   춘원 이광수와의 만남
   
   현민은 대학 1학년 때 영문과 청강생으로 입학하였던 춘원 이광수를 교정에서 만나 상당한 쇼크를 받았다. 춘원은 그때 이미 문예지 조선문단의 주재자로, ‘무정’ 등의 장편소설 작가로, 3·1독립운동 관여자로, 동아일보사 간부의 일원으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확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민이 춘원에게 칭찬받은 얘기.
   
    “1938년 내가 ‘창랑정기(滄浪亭記)’를 신문에 발표한 지 얼마 뒤의 일이다. 우연히 종로에 있던 다방 삼영에 들렀더니 춘원이 앉아 있다가 나의 손을 붙들면서 ‘참 좋더군요. 걸작입니다. 읽으면서 자꾸 무릎을 쳤습니다’ 하였다. 무슨 영문인 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까 ‘창랑정기 말입니다. 좋다 좋다 하면서 자꾸 무릎을 쳤더니 옆에 있던 아들놈이 무에 그리 좋으냐고 하기에 너는 아직 모른다. 이담에나 안다 했지요’ 하고 설명을 붙였다. 그것이 나의 소설에 대해 춘원이 칭찬해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앞의 책)
   
   현민의 소설은 1927년에서 1935년까지 발표된 노동소설과 그 이후 1944년까지 발표된 시정(市井)소설로 나뉜다. ‘김강사와 T교수’ ‘5월의 구직자’ 등은 노동소설, ‘행로’ ‘산울림’ 등은 시정소설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항상 실국(失國)시대의 실직자와 빈한층의 궁핍문제에 대해 고심하여, 많은 지식인 팬들이 있었다.
   
   현민은 첫부인과 사별했고, 1928년에 박복례와 재혼한다. 김계숙·이종수·김선진 등과 조선사회사상연구소를 설립하고, 이후 이 연구소에서 이강국·박문규·최용달 등과 분담집필하여 ‘조선사회운동사’를 편찬하였다. 1929년 경성제대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1931년에는 법철학연구소의 조수로 있으면서 법학통론을 강의하였다. 특별임용으로 판사를 시켜 줄 터이니 재판소로 오라는 일본인 경성지방법원장의 파격적인 특혜권고도 마다하고 현민은 1932년 보성전문으로 와 달라는 인촌의 간곡한 권유를 수락한다.
   
   현민은 1932년 4월 인촌이 보성전문의 경영을 맡게 되면서 보전의 전임강사로 취임하였고, 헌법·행정법 강의를 담당하였다. 주권을 상실하여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당시로서는 공법, 특히 헌법을 전공하여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때문에 그의 타고난 재능은 더욱 빛을 발하여 헌법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부각되었다.
   
   현민은 1939년에 보성전문 법학과장이 되었으며, 1944년 총독부에 의해 그 학교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개편된 이후, 동교 교수직을 사임한다. 광복 후 보성전문을 복원하여 교수 겸 법학과장이 된 현민은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도 겸직하면서, 법학계의 새 출발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 재건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명망에 따라 현민은 헌법 제정에 즈음하여 좌파와 우파, 임정계열과 미 군정을 망라한 여러 정치적 세력들에 헌법 초안의 작성을 의뢰받는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결국 그는 과도정부 사법부 안에 설치된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하부조직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 헌법초안을 작성하게 된다.
   
   “현민에 의해 작성된 헌법초안은 양원제의회, 내각책임제, 농지개혁·주요기업의 국영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바이마르헌법을 많이 참조했지요. 일본제국주의헌법을 배우고 강의했던 분이 우리 헌법 제정에 있어 일제헌법에서 탈피한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국가의 목적을 루소의 사회계약설 등에 따라 자유와 평등과 복지가 넘쳐 흐르는 국민주권적인 민주국가로 규정한 것은 선견지명의 탁견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까지 주장하여 경제조항까지 둔 것을 보면 진보적인 학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김철수 전 탐라대 총장)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 포항시향 상임지휘자인 현민의 3남 종씨.

1948년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안’을 거의 원안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력구조에 있어 내각책임제는 당시 이미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승만 국회의장의 반대에 부딪혀 마지막에 돌연 대통령중심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헌법기초안은 6월 30일 국회에 넘겨져 7월 12일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인 헌법을 기초한 사실에 대해 고려대 심재우 교수는 현민을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평하고 있다.
   
    “유진오는 자신이 제2의 건국인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 것을 본인으로서는 큰 영광과 행운으로 여겼고, 또한 독립된 조국의 국헌을 손수 만든다는 데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 그리고 사명감 등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또한 그 헌법초안이 완성되었을 때,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승만 박사는 ‘흘륭하오. 우리 한국사람 중에 헌법을 기초할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소’라고 하며 경탄에 찬 칭송을 해 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여기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진오를 꼽는 까닭은 그가 새롭게 건국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과제인 헌법적 기초를 마련한 역사적 인물인 때문이요, 그러한 뜻에서 그를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한국사 시민강좌 제43집)
   
    고려대박물관에는 현민의 유족이 기증한 대한민국헌법 초고가 별도의 플라스틱함에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 측은 2006년 현민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했다. 국가기록물 제1호로 지정된 국보급 문화재인 때문이다. 현민의 둘째 아들 완씨도 “어렸을 때부터 낯익은 부친의 필적이다”면서 감개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현민은 총장시절 그의 폭넓은 교분으로 수많은 값진 컬렉션을 기부받아 오늘의 고려대박물관이 풍부한 소장품을 갖추게 한 주인공”이라고 민경현 관장이 고마워 했다. 구당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이곳에 소장돼 있다. 구당의 아들인 유억겸 교수가 광복 후 연희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현민이 기계 유씨 문중 어른들을 설득해서 기어이 고려대 쪽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김상덕 기록자료실과장)
   
   현민은 헌법기초위원 때부터 초대 법제처장을 거쳐 만 1년여 동안 헌법과 법률 제정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고려대학교로 돌아와서 대학총장으로서 대한민국의 대학다운 대학을 새로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법과와 상과로 구성되어 있던 보성전문을 인문계, 사회계, 자연계, 이공계, 사범계, 의학계 등으로 확장시켜서 명실공히 종합대학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하여 종래의 고려대 학풍인 ‘행동하는 고대’를 ‘사색하는 고대’로, ‘야성적 고대’를 ‘지성적 고대’로 전환시켰다. 보성 ‘전문학교’를 세운 사람은 김성수였지만, 그것을 고려 ‘대학교’로 만든 사람은 유진오였다.”(심재우 고려대 명예교수)
   
   현민은 역사적 사실에서 고려대학교의 창학정신이 ‘교육구국’임을 찾아내 ‘민족의 대학’으로 승화시킨다.
   
   “현민 선생은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고려대학교의 창설자 이용익 선생이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기운 것을 알고 조선을 떠나 노령의 해삼위에서 객사할 때(1907년) 임금에게 ‘청광개학교 교육인재 이복국권(請廣開學校 敎育人材 以復國權)’이라는 상소를 남겨놓은 사실을 발견하고서….”(‘교육자로서의 현민 유진오’ 박영식 전 연세대 총장)
   
   현민은 1955년 5월 고려대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이용익이 신교육 제도를 채택하여 시정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자문하고, 그 회답을 고려대 초대 총장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 구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숭상하던 유학의 말폐(末弊)로서 다음 다섯을 들고 있다. 첫째는 인재를 문벌에 의하여 등용한 부패한 봉건주의 타파, 둘째는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알고 국가와 민족을 망각한 이기주의의 배제, 셋째는 학문 연구와 국정 논의에서 정당한 비판과 공평한 의견을 가로막는 종파주의의 타파, 넷째는 병역과 국방을 가벼이 하는 문약의 일소, 다섯째는 상공업에 힘쓰지 않고 빈궁을 합리화하는 염세·은둔 사상의 타도인데, 이것은 지금도 고려대학교의 교육목표가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민중당 대선후보로 정계 입문
   

▲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현민 육필의 제헌헌법 초고.

현민은 한·일국교 정상화의 초석을 까는 데에도 힘썼다. 일어는 물론 영어와 독일어, 한학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현민은 5척 단구에 학생 때 철봉으로 단련한 건강과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1951년 한·일회담의 대표역을 맡았다. 법제처장 당시 현민은 이순탁 기획처장과 함께 ‘36년 동안 일제로부터 받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미 ‘대일배상요구조서’를 작성하였다.
   
   현민은 1951년 10월 한·일 예비회담에서부터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하여 재산청구권 문제와 어업 문제로, 또 1953년 4월의 2차회담은 평화선 문제와 재일동포의 강제퇴치 문제로, 같은 해 10월의 3차회담에서는 ‘구보다 망언’ 문제로, 1958년 4월의 4차회담은 재일동포 북송 문제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1960년 10월의 5차회담은 5·16군사정변 발발로 회담이 중단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을 대표와 수석대표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노심초사하였다.
   
   둘째 부인과 사별한 현민은 1956년 5월 내과의사인 이용재 여사(이명래 고약집 딸)와 결혼한다.
   
    “어머님은 부친과 15살이나 차이가 나서 남편이자 아버지처럼 섬기셨지요. 사회저명인사로서, 대스승으로 모셨지요. 한번은 프랑스 대사가 관저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고서는 모친에게 ‘지금도 개업을 하고 있냐’고 물었대요. 그러자 부친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하셨는데, 모친께서는 ‘한 사람을 위해 개업 중’이라고 하셨대요. 그처럼 부친의 건강을 지극히 돌보셨다는 것이지요.”(셋째아들 종씨)
   
   1960년 4·19혁명을 겪으며 현민은 당시 혁명의 주역이던 고려대를 책임지는 총장으로서 슬기로운 용단을 보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잠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직을 맡기도 한다.
   
   현민은 고려대 총장 은퇴 후 1966년 민중당의 대통령 후보로 정계에 나선다. 이듬해 신한당과 통합야당을 이룬 신민당에서 윤보선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는 대승적 태도로, 한국정치에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기도 했다.
   
   현민은 1987년 8월 30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경기도 하남시 중부면 상산곡동 선영에 안장된다. 현민은 별세 후, 친일 시비로 고려대 내 빈소 설치문제로 곤욕스러운 상황을 맞기도 했다. 2006년에 열린, 그의 탄신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마침 이 문제가 다뤄져 그 대강을 옮겨 본다.
   
   “1948년 9월 김구의 한독당 계열인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친일파 군상’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1)자진해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와 2)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들 중에서 현민은 후자 쪽으로 분류하고 있다.”(‘정치지도자로서의 현민 유진오’ 김중위)
   
   주제발표자 김중위(전 국회의원)씨에 의하면 현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는 아픔을 참으면서 앞으로 독립할 조국을 위해 스스로 내일을 준비해온 엘리트 지식인들’로 분류된다.
   
   현민은 7남매를 두었다. 장남 광씨(작고)는 프린스턴대 핵물리학 박사로 미 정부의 보안관리를 받아와서, 현민이 ‘미국에 빼앗긴 아들’이라고 애석해 했다고 한다. 차남 완씨(70·미 펜실베이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는 연세대 명예교수로, 최양자씨(70·미 위스콘신대 졸업·회계학)와 결혼했다. 삼남 종씨(55·미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작곡)는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이다. 현민의 맏딸 효숙씨(82·서울대 사대 영문과 졸업)의 남편은 일조각 사장 한만년씨(작고), 차녀 충숙씨(78·이화여대 미대 졸업)는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89·일주오대 졸업)과 결혼했다. 현민의 삼녀 인숙씨(76·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는 성모병원장을 역임한 안용팔씨(작고)와 결혼했으며, 사녀 경숙씨(72·미 조지타운대 불문과 졸업)는 삼성조선 사장을 지낸 서영하씨(작고)와 결혼했다.
   
   
   바로잡음
   
   지난주 한국의 명가 ⑪. 백낙준 기사 중 ‘한혜숙’은 ‘현혜옥’으로, ‘성익씨(작고)’는 ‘성익씨(77)로 바로잡습니다.
   

내가 본 현민 유진오
   
   홍일식 한국인문사회연구원장·전 고려대 총장
   
   현민 선생님 집안과는 세교(世交)하고 지내는 사이어서 나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뵙곤 했다. 그후 대학에 들어와서는 죽 스승으로 모셨고, 총장님을 새카만 후배교수로서, 그리고 그후 한참 지나서는 그분의 뒤를 이어 내가 총장 일을 하게 되었으니 대단한 인연이라 할 것이다. 우선 현민이란 아호는 노장사상에서 나온 아득하고도 깊은, 현묘하고도 오묘한 무궁무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분은 일제하 핍박받는 우리 민중의 구원책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삶을 산 것이다. 흔히 현민 선생을 일러 하늘이 낸 영재라 하여 수재니 천재니 칭송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분은 배움을 시작한 유소년기 이래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단 일각의 촌음도 허튼 일로 소비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 하루도 새벽 한두 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일 없이 절차탁마의 노력을 다하신 분이셨다. 매사에 그 진지하심과 다함없는 정성만으로도 선생은 한 인간으로서 존경과 흠모를 받아 마땅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