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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단 표지에 고급 초주지(草注紙) 반차도(班次圖)엔 눈매·수염까지 선명.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에 담긴 것

굴어당 2011. 4. 15. 12:58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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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규장각 도서 중 ‘장렬왕후 국장도감의궤’상권. photo 조선일보 DB
정조, 외규장각을 설치하다
   
   1782년(정조 6년) 2월 당시 국왕의 비상한 관심 아래 추진되었던 ‘강화도 외규장각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의 기공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주요한 서적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되었으며, 이후 100여년간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관계 자료들이 별고(別庫)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이 자료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위치하면서 조선 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곳을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외규장각이 완성되자 정조는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어람용(御覽用) 의궤(儀軌)들을 외규장각으로 옮겼고, 이러한 전통은 후대 왕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용어로 조선시대 왕실 의식의 주요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어람용 의궤는 사고(史庫)나 관련 부서에 보관한 분상용 의궤와는 달리 왕이 친히 열람하기 위해 제작한 의궤였다. 따라서 표지와 장정이 분상용 의궤보다 화려하였고, 종이의 재료도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여 분상용 의궤에 비해 질이 좋았다.
   
   표지 역시 초록 비단을 사용하여, 붉은 삼베 표지인 분상용 의궤와 차이가 있었다. 장정(裝幀)도 어람용 의궤는 국화 모양의 장식 5개를 썼기 때문에 박을정(朴乙丁) 3개를 써서 장정을 한 분상용 의궤보다 튼튼했다.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글씨와 그림 또한 우수했다. 같은 의식을 기록한 의궤를 비교해보면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 그림이 훨씬 정밀하다. 글씨 역시 서사관(書寫官)들이 정성을 기울여 쓴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1857년과 1858년에 작성된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에 따르면 당시 외규장각에는 어람용 의궤류를 비롯하여 총 6000여책의 서책이 탁자에 보관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근대의 격동기 강화도 외규장각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1866년 병인양요, 의궤를 약탈당하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강화도에 쳐들어오면서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국토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던 최고의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집중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대는 외규장각을 방화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에도 화려하고 품격이 있는 의궤의 장정과 비단표지, 반차도 등에 매료되었다. 이때 약탈당한 189종 340여책 중에서 297책의 의궤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구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의궤는 최근까지 모두 어람용 의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02년 외교부의 후원하에 추진되었던 두 차례의 외규장각 의궤 실물 조사 결과 어람용 의궤 이외에도 분상용 의궤 5종 5책과 등록(謄錄·전례를 적은 기록) 1책, 외규장각형지안 2종 2책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대부분 의궤의 비단 표지가 개장(改裝)된 것도 확인되었다. 원래 비단 표지를 한 의궤는 7종 12책에 불과하였으며, 나머지는 표지를 개장하였다. 아마도 강화도에서 운송하는 과정에서 물에 젖었거나 일부 의궤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어서, 화재의 여파로 표지를 개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외규장각 소장 어람용 의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보다 큰 의궤도 확인되었다. 국내에 분상용 의궤가 없는 소위 ‘유일본 의궤’이다. 유일본 의궤는 등록을 포함하여 30종이 확인되었다. 유일본 의궤 중 ‘별삼방의궤(別三房儀軌)’ 등은 왕실의 열람을 위해 부수를 한정하여 제작했기 때문에 국내의 사고 등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외규장각 의궤의 실물 조사에 참여하고, 이후에도 세 차례 파리국립도서관을 방문하여 의궤를 접할 기회를 가졌다. 행렬 의식을 그린 반차도(班次圖)의 경우 참여 인물의 눈매와 수염까지 선명하게 표현되었으며, 원래 비단 표지를 하고 있는 의궤의 경우 표지와 장정이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조선왕실 문화 연구 새 전기
   
   오래도록 잊혀졌던 외규장각 의궤가 다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는 의궤 중에서 ‘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그러나 2010년까지 17년 이상 지리한 반환 협상이 지속되었다. 2001년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와 맞먹는 등가등량(等價等量)의 문화재를 맞교환하는 방식의 환수 방식이 제기되었으나, 국내의 부정적 여론에 밀려 성사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우리 측에서는 ‘영구대여’라는 방식으로 의궤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쉽게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2005년에는 양국 정부가 297책의 의궤 중 국내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은 의궤(유일본의궤) 30책의 디지털화 사업을 추진하였지만 원본을 확보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프랑스 측이 한국 측에 반환을 꺼린 이유는 무엇보다 프랑스가 보유한 문화재 중 다수가 약탈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의궤의 반환이 다른 문화재 반환의 선례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거듭 미온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 기간 중 프랑스 측은 드디어 의궤의 한국 반환에 합의하였다. 20년 가까이 학계와 머리를 맞대며 의궤 반환을 적극 추진한 외교부의 노력과 문화계, 언론계, 시민단체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의궤 반환의 세부 협상 결과 1차분 의궤가 2011년 4월 14일 한국으로 돌아오고, 5월 말까지 전체 의궤가 돌아오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비록 ‘반환’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우리 측이 시종일관 요구한 ‘영구임대’ 방식에서도 일부 후퇴한 ‘5년마다의 대여’ 방식을 취했지만, 의궤가 14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최근 들어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등 일부 문화재가 반환된 사례는 있었지만, 이처럼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조선 왕실의 상징적 문화재가 돌아오는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외규장각 의궤는 반환 이후가 중요하다. 의궤는 조선 왕실의 행사 기록물인 만큼 일반 감상용이나 전시용 문화재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의궤 연구자가 의궤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의궤에 대한 적극적 연구를 통해 조선 왕실의 문화, 나아가 한국학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가야 한다. 의궤가 원래의 생산국인 한국에 돌아옴으로써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잠자고 있던 아쉬움을 극복하고, 한국학 연구가 활성화되고 나아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의 교류에 기여하는 방안을 마련해 가야 한다. 또한 의궤 반환을 계기로 외교부, 문화재청 등이 주도하는 ‘문화재환수 전담기구’를 설치하여 해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반환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확보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