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성의 만남 도산 안창호가 결혼식 축사
정일형, 개척교회 목사로 출발 국무위원 거쳐 8선의원
일제 때 항일운동으로 투옥 평생 불의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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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형·이태영 박사 부부. photo 정일형·이태영박사기념관 |
그는 광복 후 정치에 나서 자유당 독재를 물리친 4·19혁명 후 장면 내각의 수석국무위원(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회복운동에 앞장서는 투혼을 보였다. 8선 의원을 끝으로 박탈당한 그의 의원직을 아들 정대철이 이었다. 정대철 역시 부친의 투지를 독재에 맞선 5선 의원으로 물려받아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말 금연과 결혼한 이태영 역시 잔혹한 고문을 이겨내며 금연의 옥바라지를 한 애국지사다. 대한민국 첫 번째 여성변호사로 가정법률상담소를 설치·운영하면서 여성 지위 향상에 공을 세워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여성운동지도자로까지 부상했었다.
의병대장 집안의 손자
금연은 1904년 2월 23일 황해도 안악군 장연면 저도리에서 유복한 집안 선비 정기찬(鄭基贊)과 한은총(韓恩寵)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대동강이 흘러내려 서해에 합류하는 진남포 앞 제섬 부근의 한 작은 섬마을이다.
“어린시절 나의 외로움을 달래고 꿈을 키우던 진남포 포구에서 몇 마장 떨어진 바닷가 벌판에는 널따란 수수깡밭이 있었다. …어른 키보다 더 큰 수수깡이 빽빽이 서 있는 그곳에는 수많은 장정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낮엔 거의 잠만 자고 있다가 해가 지면 어디론가 부산스럽게 떠나갔다. 다음날 가보면 그들은 또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저 아저씨들과 함께 그런 낭만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들은 나에게 커다란 호기심과 동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분들은 우리 집에서 양병하는 구국의 항일의병이었다. 그것을 자라서야 뒤늦게 알았다.”(‘오직 한 길로’ 정일형)
금연의 조부 정원모는 문무 겸전한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남달리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통솔력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재에 탁월해서 일찍이 상하이와의 교역으로 큰 실업가가 되었다. 의병대장 집안의 손자로 태어난 금연은 그 섬마을 주민들의 귀여움을 둠뿍 받고 자랐다.
“우리 종문은 본래 충청남도 금강 부근이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선조 한 분이 사화를 모면하고자 황해도 서해안 연변으로 이주해 왔다지요. 선친의 아호가 금연인 것도 금강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뜻이지요. 조부님이 집안을 크게 일으켰으나 조부님과 선친께서 급서하셔서 아버님의 어린시절도 매우 어려워졌다고 해요.”(금연의 아들 대철씨)
맨발로 10리길 걸어 학교 다녀
금연이 일곱 살 때 모친은 어려운 살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가를 한다.
“결국 어머니와 나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인 나를 남겨둔 채 동생 신형이를 데리고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 들어가 가정주부가 되었다. 김일엽 스님의 아버지인 김용겸 교목자의 재취부인이 되어 신앙생활에 접어든 것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김일엽 여사가 나의 이복 누님이 된 것이다.”(‘오직 한 길로’)
금연은 1910년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진 미션계 삼존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간다. 성적이 1등으로 올라 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독립에 관한 글짓기를 한 것이 탄로나 학교가 문을 닫게 된다. 금연은 집성학교로 옮기고 수안보통학교 삼승학교를 거쳐 1921년 평양 광성고보를 졸업한다. 이즈음의 어려웠던 생활형편을 금연은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미투리를 짜서 신었다. 손재간이 말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모양은 형편이 없었다. 어쩌다가 신발을 한 켤레 사도 하루 30리 길을 다니느라 며칠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맨발로 걸어 다녔다. 신발은 자랑스럽게 그리고 소중하게 꽁무니에 차고서. 그러다가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나야 할 때 혹은 학교 교문 앞에 와서야 비로소 신발을 끌러 신곤 했다. 한번은 도시락 소동이 벌어졌다. 점심 시간이 되면 나는 도시락을 들고 슬그머니 학교 뒷산으로 올라간다. 매일 그랬다. 깡조밥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 금방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점심시간 때면 학생들은 모두가 둘러앉아 함께 먹었다. 하지만 나는 많은 아이들 속에서 내 도시락을 꺼내 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모래알같이 흩어지는 좁쌀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루는 저녁 설거지를 하다 말고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아무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 몇 술 뜨다 말고 남겨온 도시락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어 그 다음부터는 모래 씹는 것 같은 점심밥을 남기게 되면 돌아오는 도중에 바다에 버렸다. 이런 날이면 배가 고파도 저녁밥 독촉을 하지 못했다.”(‘오직 한 길로’)
3·1만세운동 주동학생으로 몰려 구금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33인 중의 한 사람인 남산현 감리교회 신홍식 목사의 지도 아래 남녀 학생 수천 명이 모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 행진에 나섰다. 광성고보 3학년이던 금연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양 거리를 뛰어 다녔다. 만세 행렬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마침내 금연은 주동 학생으로 몰려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 1주일간 구금됐다. 어머니는 석방된 금연을 와락 끌어안고 ‘그래 일형아, 장하구나 장해!’라고 외치면서 마치 개선장군이기나 한 듯 맞이했다고 한다. 몇 개월 후 금연은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일경들은 눈이 뒤집힌 채 불온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소위 고등계 형사들이 총동원되었는데 금연도 검거되었디.
“어른들의 심문을 모두 끝내고 우리들을 족치기 시작하였다. 이미 사건의 전모는 낱낱이 밝혀졌다. 나도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훈계 방면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겐 ‘후데이 센징(不逞鮮人)’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형사들은 수시로 나를 감시하였다. 미성년자로서 요시찰인이 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오직 한 길로’)
금연은 광성고보 졸업 후 연희전문으로 입학하여 공사판 인부 등으로 고학을 하면서도 1등을 하여 장학금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독립사상을 비난하는 일부 교수의 배척운동에 나섰다가 1년간 정학을 당한다. 이 기간 중 진남포 모교인 집성학교에서 야학을 차린 금연은 ‘한국 농촌의 측면상’이라는 특강으로 진남포 경찰서에 구속되어 1개월간 구류된다. 연희전문 시절에도 금연은 학비 걱정에 시달린다. 막다른 곤경에 처한 그는 지금 서울 마포구청 자리 도로공사에 인부로 취직하였다. 그런데 막벌이 노동이라고 해서 쉽사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막노동 고학하면서 장학금 받아
“손수레에 흙을 실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는 단순한 노동이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 1주일가량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바른손 둘째 손가락이 반가량 잘리고 이마를 크게 다쳐서 한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로 중상이었는데 그곳 도로 십장은 나의 잘못으로 인한 사고라고 하면서 무자비하게 해고해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하는 참담한 생각뿐이었다.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도 앞으로 살아갈 묘안이 없었다. 자살을 생각했다.”(‘오직 한 길로’)
금연은 마지막으로 문과 과장 빌링스 교수를 찾아갔다. 학비가 모자라니 소학교에 가서 일하다가 다시 와 공부를 하겠다고 휴학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빌링스는 이름을 물었다. ‘정일형’이라고 답하자 ‘이번에 1등을 했다’고 소리쳤다. 장학생이 된 것이다.
1927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금연은 감리교 선교부의 한 기관인 종교교육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신생(新生)’의 편집에 연전 동창 노산 이은상과 같이 취직된다. 2년 후 감리교 연회에서 시행하는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에 여권 신청을 하나 ‘신생’지에 실린 금연의 글이 불온하다고 하여 거절당한다. 감리교 베이커 감독이 일본 외무성에 직접 가서야 허락을 받는다. 1929년 3월 도미 유학 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한다. 이때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졌다는 고국 소식을 듣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지원활동을 벌인다.
1930년대 접어들며 미국은 심한 불경기를 겪게 돼 금연도 생계 마련을 위해 뉴욕으로 와 한인교회로 갔다. 이미 장덕수·김도연·허정·오천석씨 등이 부근의 상점이나 주택에서 막일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금연은 1933년에 시라큐스대학에서 종교교육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금연은 주간으로 나오던 신한민보에 ‘풍차의 노래’라는 칼럼을 3년간 집필한다. 금연은 1935년 드류대학에서 ‘미국 남부 여러 주의 농촌 사회 조직체의 유형’을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7년 7월에 귀국했다.
이태영과의 만남
- ▲ 서울 봉원동 정일형·이태영박사기념관에서 만난 후예들. 아들 대철, 며느리 김덕진, 손부 전영지, 손자 호준(왼쪽부터)이 담소하고 있다.
“윤치호, 조병옥, 유억겸씨 등이 서울 명월관에서 귀국 환영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철학박사 정일형씨 귀국’이라는 제호 밑에 선친의 사진을 곁들인 기사를 실은 당시 신문들도 보았습니다. 앞으로 교육계에 투신하리라는 추측 보도까지 했더군요. 그때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서 학감으로 일하고 있던 이묘묵 박사가 모교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라고 권유했대요.”(아들 대철씨)
하지만 금연은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양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연희전문은 안전지대라 할 수 있었으나 금연은 개인의 안일보다 ‘주어진 현실’에 뛰어들기로 다짐한다. 금연은 일터를 평양으로 정하고 가난한 근로자들이 사는, 새로 생긴 공장지대 신리(新里)를 중심으로 일하기로 했다. 금연의 평양행은 그의 미래의 평생 동지가 되는 이태영과의 만남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울 정동교회에 갔다. 합창대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노래했다. 합창이 끝날 무렵 어느 여학생이 독창을 했다. 메조 소프라노였다. 나는 조금 신경을 써가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독창을 하는 여학생은 합창대원 중 가장 키가 컸다. 얼굴도 시원스러웠다. 공연히 나는 거북스러워졌다. 여학생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리라. 결국 나는 옆의 사람을 툭 치며 ‘저 노래하는 여학생이 누구지?’라고 묻고야 말았다. ‘이태영이라고 유명한 여자죠.’ ‘유명하다니?’ ‘바로 전에 있었던 전국 전문학교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지요.’ ‘지금 학생이오?’ ‘아마 이번에 이화전문을 나올 겁니다.’ ‘졸업하고 뭘 한답디까?’ ‘평양에 가서 여학교 선생을 한다던가?’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어 물은 것 같아 오히려 쑥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후 나도 평양으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오직 한 길로’)
금연은 1936년 4월 신리 공장지대 제사공장의 빈 창고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다. 그의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일거리가 없어 헤매는 사람에게는 직장을 구해 줘야 했고, 문맹자에게 글을 가르쳐야 했으며, 가정문제도 상담해야 했다. 이때부터 왜경의 감시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안창호 선생이 연사로 나오는 특별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거사와 관련되어 왜경에게 체포, 수년간 복역하다가 1935년 2월에 가출옥하여 평양 근교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 중이던 도산을 연사로 모시는 일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주최자로서의 책임을 각오한 행사였다.
도산 안창호 강연 주최로 투옥
장소는 평양에서 가장 많은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남산현 감리교회. 종교 단체의 종교 강연에는 집회 허가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을 이용했다. 도산의 강연이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평양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심한 압박에 겁먹은 청년회 간부들은 도산의 강연 계획을 변경하자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금연의 결의를 꺾을 수 없었던 그들은 불행한 사태가 생길 경우 모든 책임을 혼자서 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나는 도산 선생을 찾아 뵙고 왜경의 탄압과 방해가 극심하다는 보고를 드렸다. 도산 선생은 나를 격려하면서 강연회를 강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창호 선생의 강연회가 예정대로 열리게 되었다. 경찰의 압력 때문에 벽보 한 장 변변히 붙이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평양이 생긴 이래 최대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교회당 안팎이 인파로 꽉 메워졌다. ‘나아가자’라는 강연 제목으로 도산 선생은 두 시간이 넘도록 열변을 토하였다. …이 강연은 도산 선생의 마지막 강연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강연회를 주최하였던 나는 왜경의 문초와 투옥을 감수해 야 했다.”(‘오직 한 길로’)
한편 이 무렵 금연을 만난 이태영 역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태영의 임 향한 마음’을 읽어 본다.
“나는 은연중 정 박사를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달리 학력도 뛰어났지만 굳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색다른 일에 뛰어든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해 여름 금강산에서 기독교 수양회가 열렸는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거기 참석하였고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수려한 금강산의 절경에서 그는 나더러 삼선암까지 동행할 것을 제의했고 나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하늘을 가리고 우거진 숲, 우뚝 솟은 기암절벽, 물보라를 일으키며 골짜기를 빠져 쏟아지는 폭포수, 뽀오얀 물안개 속에 서서 나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삼선암이 아니라 사선암이군요.’ 이 한 마디는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말한 프러포즈였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내가 걷는 길’ 이태영)
평양 정의고녀 강당에서 결혼식
금연의 프러포즈는 그에게 품고 있던 이태영의 호감에 더욱 부채질을 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보다 오빠의 반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공부는 많이 했다지만 일정한 수입도, 안정된 직장도 없이 왜경에게 쫓기는 청년과 혼인한다는 것을 찬성할 리 없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 무렵 나는 지독한 열병으로 기독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이때 정 박사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문병을 와서 진심으로 쾌유를 빌어 주었다.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와 오빠였으나 문병 오는 그를 자주 대해 본 가족들은 정 박사의 인품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는지 결국은 결혼을 승낙하기에 이르렀다.”(‘내가 걷는 길’)
1936년 12월 26일. 금연과 이태영은 평양 정의고녀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랑은 32세, 신부는 22세. 당시 결혼 풍습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촐하고 간소한 모범 결혼식이었다.
“내가 입은 한복이며 면사포, 심지어는 들러리를 서 준 친구들의 옷까지도 내가 손수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장식한 트리를 그대로 이용했고, 신랑 신부 입장에 이어 기도와 예물교환 정도로 간소하게 식을 마친 후 조촐한 피로연을 가졌다. 홍차 한 잔에 샌드위치 한 쪽씩으로 하객들을 대접했고, 의젓한 웨딩케이크를 주문했다가 신랑 신부가 함께 잘라서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며, 꼭 집에 가지고 가서 잠들기 전에 신랑 신부를 축복하며 드시라고 피로연을 진행한 최윤호 박사는 말했다. 이 피로연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축사를 해 준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감회가 깊다. 그분은 우리들의 결합에 있어서 많은 조언과 협조를 해 주셨다.”(‘내가 걷는 길’)
내가 본 금연 정일형 박권상 전 KBS 사장 금연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52년 늦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정치파동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대낮에 무장한 헌병부대가 야당의원이 탄 국회의원 전용버스를 견인차로 끌어갔고 정 박사 일행은 날조된 국제공산당이 되어 한참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정 박사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이 아직도 내 귓전을 때리는 것만 같다. “임자, 우리는 숙명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해야 살 수 있어. 유엔군이 왜 이곳까지 와서 매일같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겠소?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어찌되는 거요. 독재는 붉은 독재나 흰 독재나 매한가지요. 꼭 망하게 돼있는 거요.” 외유내강이랄까. 늘 온유하면서도 원칙과 신념으로 행동하는 정치가였다. 노자가 말한 유지승강(柔之勝剛)의 기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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