魚無迹
流民歎
蒼生難 蒼生難
年貧爾無食
我有濟爾心而無濟爾力
蒼生苦 蒼生苦
天寒爾無衾
彼有濟爾力而無濟爾心
願回小人腹
暫爲君子慮
暫借君子耳
試聽小民語
小民有語君不知
今歲蒼生皆失所
北闕雖下憂民詔
州縣傳看一虛紙
特遣京官問民瘼
馹騎日馳三百里
吾民無力出門限
何暇面陳心內事
縱使一郡一京官
京官無耳民無口
不如喚起汲淮陽
未死孑遺猶可救
―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흉년이 들어 너희는 먹을 것이 없구나. 나는 너희를 구제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너희를 구제할 힘이 없구나.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날은 찬데 너희는 이불조차 없구나. 저들은 너희를 구제할 힘은 있으나, 너희를 구제하려는 마음이 없도다. 원하노니, 소인의 심보를 돌려, 잠시라도 군자다운 생각을 하고, 잠시라도 군자의 귀를 빌려, 가난한 백성의 말을 들어보아라. 백성들 할 말 있으나 임금은 알지 못해, 올해 백성들 모두 살 곳을 잃었다네. 대궐에선 비록 백성을 근심하는 조서를 내리건만, 고을에선 일개 빈 종이로 돌려 보는구나. 특별히 경관을 파견하여 민폐를 물어 보건만, 역마타고 하루에 삼백리를 달려가 버리네. 우리 백성 문턱 나설 기력도 없는데, 어느 겨를에 마음 속 사정 대면하여 하소연할꼬? 가령 고을마다 경관이 한 사람씩 간다해도,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으니, 汲淮陽을 불러 일으켜, 죽지 않은 남은 백성들을 오히려 구하는 것만 못하다네 ―
∙감상 : 시풍전환기에 시짓는 저변 확대 증거. 작가의 생각이 직설적으로
드러난 시로 다소 다듬어짐이 부족하지만 절박한 심정을 노래한 바이므로
직설적인 표현도 적절하다(좋은 시는 각각 경향에 따른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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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의 횡포를 규탄한 작매부(斫梅賦)-浪仙 魚無迹(낭선 어무적)
조선 전기(前期) 연산군(燕山君) 무렵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경상도 김해(金海) 출신의 낭선 어무적(浪仙 魚無迹)은, 아버지는 엄연한 사대부(士大夫)였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 출신이어서 법에 따라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나중에 속량(贖良)하여 면천(免賤)된 사람이다. 그는 연산군(燕山君)7년(1501)에 상소(上疏)를 올려서, “나는 천민출신(賤民出身)으로 벼슬 할 생각은 없지만, 옛말에 ‘집이 위에서 새는 것을 밑에서 가장 잘 안다’고 했듯이 지금 이처럼 밑에 있으면서 세상의 새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들어서 밝혔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다.
그가 살던 고을에서 백성의 매화(梅花)나무에다 세금(稅金)을 부과한 일이 있어, 백성이 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렸는데, 이를 보고 관장(官長)의 횡포를 규탄하는 작매부(斫梅賦)〉를 지었다가 체포령이 내려, 도망하여 유랑(流浪)하던 중 어느 역사(驛舍)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그의 유민탄(流民歎)과 신력탄(新曆歎〉은 뛰어난 명작(名作)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과 조시산(國朝詩刪)에까지 올라 있으며, 특히 허균(許筠)은 그의 성수시화(惺?詩話)에서 다음의 유민탄(流民歎)을 당시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流民歎(유민탄)浪仙 魚無迹(낭선 어무적)
蒼生難蒼生難 年貧爾無食
창생난창생난 연빈이무식
我有濟爾心 而無濟爾力
아유제이심 이무제이력
蒼生苦蒼生苦 天寒爾無衾
창생고창생고 천한이무금
彼有濟爾力 而無濟爾心
피유제이력 이무제이심
願回小人腹 暫爲君子慮
원회소인복 잠위군자려
暫借君子耳 試聽小民語
잠차군자이 시청소민어
小民有語君不知 今世蒼生皆失所
소민유어군부지 금세창생개실소
北闕雖下憂民詔 州縣傳看一虛紙
북궐수하우민조 주현전간일허지
特遣京官問民? 馹騎日馳三百里
특견경관문민막 일기일치삼백리
吾民無力出門限 何暇面陳心內事
오민무력출문한 하가면진심내사
縱使一郡一京官 京官無耳民無口
종사일군일경관 경관무이민무구
不如喚起汲淮陽 未死孑遺猶可救
불여환기급회양 미사혈유유가구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백성들아
흉년이 들었으니 먹을 것이 없구나
나야 너를 돕고 싶다만
도울 힘이 있느냐
괴로운 백성들아 괴로운 백성들아
날씨가 추워 와도 덮을 이불이 없구나
저들이야 너를 도울 힘이 있지만
어디 도울 마음이 있느냐
원컨대 저들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
잠시라도 군자의 마음을 만들고
잠시라도 군자의 귀를 빌려서
불쌍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소
백성들이 하소연해도 임금은 알지 못하니
세상의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대궐에서 아무리 백성들 걱정하는 글을 내려도
고을에만 내려오면 한 장의 휴지 쪽이 되고 만다네
특별히 경관을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본다고
역마는 하루에도 삼백 리를 달린다만
백성들 힘이 없어 문지방을 넘지 못하니
어느 제 얼굴을 쳐다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랴
설사 고을마다 한 사람씩 경관을 보낸다 해도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으니
차라리 급회양 같은 착한 원을 보내어서
죽다 남은 이 백성이라도 살려야 하리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날이 추워도 입을 것이 없는 백성들. 백성들이 하소연한다고 임금이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대궐 앞에 달아 놓은 신문고(申聞鼓)를 치니 치라고 달아놓고는 쳤다고 잡아넣지 않았더냐? 어사(御使)니 경관(京官)이니 하는 사람들을 아무리 내려 보낸들, 내려오는 사람은 눈도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으니, 결국은 모두 하나의 민폐(民弊)만 더 보태는 꼴이 되고 말지 않던가?
斫梅賦(작매부;매화나무를 잘라내는 노래)-어무적(魚無迹)
世之馨香之君子 時務蛇虎之苛法
세지형향지군자 시무사호지가법
慘已到於伏雌 政又酷於童?
참이도어복자 정우혹어동고
民飽一盂飯 官?涎而齎怒
민포일우반 관참연이재노
民暖一?衣 吏攘臂耳剝肉
민난일구의 리양비이박육
使余香掩野?之魂 花點流民之骨
사여향엄야표지혼 화점유민지골
傷心知此 寧論憔悴
상심지차 녕론초췌
奈何田夫無知 見辱斧斤
내하전부무지 견욕부근
風酸月苦 誰招斷魂
풍산월고 수초단혼
黃金子? 吏肆其?
황금자번 이사기도
增顆倍徵 動遭鞭?
증과배징 동조편타
妻怨晝護 兒啼夜守
처원주호 아제야수
玆皆梅? 是爲尤物
자개매수 시위우물
南山有樗 北山有?
남산유저 북산유력
官不之管 吏不之虐
관부지관 이부지학
梅反不如 豈辭剪伐
매반불여 기사전벌
세상에 향기내는 좋은 지도자 없고 지금 뱀과 호랑이 같은 잔인한 법에만 힘쓴다.
참혹함은 이미 숨어사는 꿩에게 이르고 정치는 뿔 없는 양들에게 더욱 참혹하다.
백성이 한 사발밥에 배부르면 관리는 군침을 흘리며 분노를 일으킨다.
백성이 한 번 솜옷으로 따뜻하면 아전은 팔을 걷어붙이고 살을 벗긴다.
나의 향기는 들판에 굶어죽은 영혼을 덮고 꽃잎은 떠도는 백성의 백골에 뿌려진다.
상심함이 이 지경인데 어찌 초췌함을 논하겠는가.
어찌 하리오, 농부들이 도끼날에 치욕을 당함을 알지 못함을
바람도 매섭고 달빛도 괴로우니 누가 단장의 영혼을 불러주나.
황금 같은 열매는 아전의 창고에 흘러넘친다.
낱알의 수를 늘이고 배로 징수하니 문득 반항하면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아내는 원망하여 낮에 울부짖고 아이들은 울며 밤을 지세운다.
이는 모두 매실 때문이니 매실이 더욱 좋은 물건이 되었다.
남산에 가죽나무가 있고 북산에 상수리나무가 있도다.
벼슬아치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아전도 그것은 요구하지도 않는다.
매화는 도리어 없는 것만도 못하니 어찌 잘라버림을 거부하리오.
관청의 횡포를 이기지 못해 자기 양경(陽莖-남자 생식기)을 잘라버린 백성들의 고초를 보고
哀絶陽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
蘆田少婦哭聲長 哭向縣門號穹蒼
노전소부곡성장 곡향현문호궁창
夫征不復尙可有 自古未聞男絶陽
부정불복상가유 자고미문남절양
舅喪已縞兒未? 三代名簽在軍保
구상이호아미조 삼대명첨재군보
薄言往?虎守? 里正咆哮牛去?
박언왕소호수혼 이정포효우거조
磨刀入房血滿席 自恨生兒遭窘厄
마도입방혈만석 자한생아조군액
蠶室淫刑豈有辜 ??去勢良亦慽
잠실음형기유고 민건거세량역척
生生之理天所予 乾道成男坤道女
생생지리천소여 건도성남곤도녀
?馬?豕猶云悲 況乃生民思繼序
선마분시유운비 황내생민사계서
豪家終歲奏管絃 粒米寸帛無所捐
호가종세주관현 립미촌백무소연
均吾赤子何厚薄 客窓重誦?鳩篇
균오적자하후박 객창중송시구편
갈밭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처절코나
관문(官門) 향해 울부짖다가 하늘 보며 통곡하네.
전쟁 나가 못 돌아오는 일이야 있을 법도 하지만
그걸 자른 남자 이야긴 옛날에도 못 들었어
벌써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안 마른 어린 자식을
황소 같은 장정이라고 삼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네.
이장 놈 호통 치며 소마저 끌어가는데
달려가 하소연해도 버티고만 서있는 저 문지기
칼 갈아 들어가선 피바다가 웬 말이요
이 놈 땜에 아이 생겨 이 고생 치른다고
궁형(宮刑) 당한 환관(宦官)들이야 무슨 죄가 있더냐.
민(?) 땅 사람 자식 거세도 기차는 풍습이지
종자를 퍼치는 건 하늘이 낸 이치이니
음양이 부딪치면 아들 딸 낳게 마련
말, 돼지 불까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인데
하물며 사람이리요, 후손도 이어가야지
한 평생 잘난 이는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 톨 쌀, 한 치 베도 바치는 일 없다네
다 같은 백성들인데 왜 이렇게 다릅니까.
시구편만 객창에 앉아서 거듭 읊조리노라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 1762-1836)의 작품이다. 동서고금의 시사상(詩史上)에 이런 희한(稀罕)한 시(詩)도 있었던가? 다산은 이 시작(詩作)의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은 가경(嘉慶) 계해년(순조3-1803) 가을에 내가 강진(康津)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어떤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3일만에 (그 아이가) 군적(軍籍)에 오르게 되어 이정(里正)이 (軍布 명목으로) 소를 끌어가 버렸다. 그 백성은,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른다’ 하고는 칼을 갈아 가지고 자기 양경(陽莖-남자 생식기)을 잘라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듣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들고는, 관청을 찾아가서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했으나, 문지기는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고 한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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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탄 流民歎 / 어무적魚無迹
蒼生難蒼生難(창생난창생난)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백성들아
年貧爾無食(연빈이무식) 흉년이 들었으니 먹을 것이 없구나
我有濟爾心(아유제이심) 나야 너를 돕고 싶다만
而無濟爾力(이무제이력) 도울 힘이 없구나
蒼生苦蒼生苦(창생고창생고) 괴로운 백성들아 괴로운 백성들아
天寒爾無衾(천한이무금) 날씨가 추워 와도 덮을 이불이 없구나
彼有濟爾力(피유제이력) 저들이야 너를 도울 힘이 있지만
而無濟爾心(이무제이심) 어디 도울 마음이 있느냐
願回小人腹(회고소인복) 원컨대 저들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
暫爲君子慮(잠위군자려) 잠시라도 군자의 마음을 만들고
暫借君子耳(잠차군자이) 잠시라도 군자의 귀를 빌려서
試聽小民語(시정소민어) 불쌍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소
小民有語君不知(소민유어군부지) 백성들이 하소연해도 임금은 알지 못하니
今世蒼生皆失所(금세창생개실소) 세상의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北闕雖下憂民詔(북궐수하우민조) 대궐에서 아무리 백성들 걱정하는 글을 내려도
州縣傳看一虛紙(주현전간일허지) 고을에만 내려오면 한 장의 휴지 쪽이 되고 만다네
特遣京官問民瘼(특견경관문민막) 특별히 경관을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본다고
馹騎日馳三百里(일기일치삼백리) 역마는 하루에도 삼백 리를 달린다만
吾民無力出門限(오민무력출문한) 백성들 힘이 없어 문지방을 넘지 못하니
何暇面陳心內事(하가면진심내사) 어느 제 얼굴을 쳐다보며 속마음을 털어놓으랴
縱使一郡一京官(종사일군일경관) 설사 고을마다 한 사람씩 경관을 보낸다 해도
京官無耳民無口(경관무이민무구)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으니
不如喚起汲淮陽(불여환기급희양) 차라리 급회양 같은 착한 원을 보내어서
未死孑遺猶可救(미사혈유유가구) 죽다 남은 이 백성이라도 살려야 하리
조선 전기(前期) 연산군 무렵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경상도 김해(金海) 출신의 낭선 어무적(浪仙魚無迹)의 작품이다. 그는, 아버지는 엄연한 사대부(士大夫)였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 출신이어서 법에 따라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나중에 아마도 어떤 방법으로 속량(贖良)하여 면천(免賤)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이다. 그는 연산군 7년(1501)에 상소(上疏)를 올려서,
“나는 천민출신(賤民出身)으로 벼슬 할 생각은 없지만, 옛말에 ‘집이 위에서 새는 것을 밑에서 가장 잘 안다’고 했듯이 지금 이처럼 밑에 있으면서 세상의 새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들어서 밝혔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살던 고을에서 백성의 매화(梅花)나무에다 세금(稅金)을 부과한 일이 있어, 백성이 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렸는데, 이를 보고 관장(官長)의 횡포를 규탄하는 〈작매부(斫梅賦)〉를 지었다가 체포령이 내려, 도망하여 유랑(流浪)하던 중 어느 역사(驛舍)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의 〈유민탄(流民歎)〉과 〈신력탄(新曆歎)〉은 뛰어난 명작(名作)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과 《국조시산(國朝詩刪)》에까지 올라 있으며, 특히 허균(許筠)은 그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이 〈유민탄〉을 당시의 대표적 걸작(傑作)으로 평가하고 있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날이 추워도 입을 것이 없는 백성들. 백성들이 하소연한다고 임금이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대궐 앞에 달아 놓은 신문고(申聞鼓)를 치니, 치라고 달아놓고는 쳤다고 잡아넣지 않았더냐? 어사(御使)니 경관(京官)이니 하는 이름들을 아무리 내려 보낸들, 내려오는 사람은 귀가 없고 쳐다보는 백성은 입이 없으니, 결국은 모두 하나의 민폐(民弊), 민막(民瘼)만 더 보태는 꼴이 되고 말지 않던가? 너무도 가슴이 저리고 너무나 공감이 가는 시편이다. 표현은 아주 평이(平易)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하다.
'http:··blog.daum.net·k2g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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