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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불교(龜玆佛敎)의 보물창고, 키질 석굴(克孜爾石窟) - 실크로드 여행기 22 .조한용 逍宙 님의 블로그 더보기

굴어당 2011. 5. 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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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 주변 유적지(출처: google maps)


오전 10시에 쑤바스 고성(蘇巴什古城)을 떠났다.  왔던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국도(G314)에 진입하여 서쪽으로 향했다.  314번 국도는 쿠차(庫車) 중심부 북쪽을 지나 217번 국도와 교차하였다.  두 국도가 교차하는 지역은 너른 들판이었다.  너른 들판에는 화학비료 공장 하나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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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수이거우(鹽水溝) 협곡, 빙하가 지나간 U자형 계곡처럼 파인 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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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수이거우(鹽水溝) 협곡, 도끼가 지나간 듯 날선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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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수이거우(鹽水溝) 협곡, 포탈라 궁(布達拉宮)이라 이름 붙은 단애(斷崖)


두산즈(獨山子)까지 이어지는 217번 국도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도로는 굽이굽이를 지나 산지로 들어섰다.  위구르어로 키질아타그(克孜爾亞達格)¹라 불리는 산중에 얀수이거우(鹽水溝)라는 협곡이 있었다.  협곡의 이름과 쑤바스 고성(蘇巴什古城)의 옛 여아국(女兒國) 전설 모두가 바닷물과 관계되어 있었다.  그 옛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질 때'에 이들 지역이 바다에서 융기되었음을 암시하였다.  협곡 양편으로 늘어선 봉우리들이 사층리(斜層理)를 확연히 들어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이들 봉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절경을 보여주었다. 

얀수이거우에는 한대(漢代)에 만들어진 봉화대(鹽水溝關壘)의 유적이 있었다.  한은 흉노에 대항하여 서역을 경영하였다.  쿠차에서 동쪽으로 75㎞ 정도 떨어진 오루성(烏壘城, 룬타이)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더불어 흉노의 침입을 탐지하기 위한 봉화대도 함께 설치하였다.  쿠차 지역을 통과하여 오루성으로 연결되는 봉화대 연락망은 모두 3개였다.  그중 1개가 이곳의 얀수이거우 봉화대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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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수이거우(鹽水溝) 협곡, 터널 공사 현장


산골짜기를 따라 지그재그로 돌아가는 길 왼쪽 계곡너머로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내년(2011년) 완공 목표로 길이 176m 굴을 뚫는 공사였다.  터널이 완공되면 차량 운행거리와 시간이 단축되고 위험도도 줄어들겠지만 절경의 일부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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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307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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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307 도로, 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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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307 도로, 양떼


키질아타그를 가로지르고 난 10시 40분에 악수(阿克蘇)로 연결되는 성도(省道, S307)와 만났다.  도로는 한산하여 차 한 대를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 누구라도 과속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도로 일부를 차단하였다.  왕복 2차선인 도로를 콘크리트 구조물로 차단하고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폭만 남겨놓았다.  그 공간도 철봉으로 ⊓ 형태의 문을 만들어 낮은 차량만 통과하게 하였다.  이곳을 통과하려면 자연히 서행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검문소도 있었지만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교통경찰이 없었다.  샤오류(小劉)는 검문소를 지키는 교통경찰을 야차(夜叉)로 여겼다.  그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경찰에 대한 불만이 끝이 없었다.

서북쪽으로 향하던 도로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악수를 향해 곧바로 뻗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해발이 1200m인 고원 평지를 달렸다.  간혹 양떼와 마주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빈들이지만 도로 이정표에 의하면 곳곳에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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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타그산(雀爾達格山)과 무자티허(木扎提河)가 흐르는 계곡


키질 향(克孜爾鄕) 가까이에 이르러 남쪽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였다.  2㎞ 정도 지나서 나타난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섰다.  간밤에 많은 비가 왔는지 도로 양편에는 물이 많이 고여 있었다.  언덕 사이를 통과할 때는 붉은 토사가 흘러내려 도로를 덮고 있었다.  조금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도로가 훅 꺼진 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100m 이상의 깊은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아래로 한 가닥의 물줄기와 더불어 녹지(綠地)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보아온 잿빛이나 붉은 색이 아닌 푸른색이었다.  마주한 산을 배경으로 보석 같은 빛을 내며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계곡을 몇 굽이를 돌아내려가니 계곡 중간에 키질 천불동(克孜爾千佛洞)이 나타났다(입장료 55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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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과 키질 석굴(克孜爾石窟)


쿠차(庫車)에는 모두 6개의 석굴이 있다(克孜爾石窟, 庫木吐拉石窟, 森木塞姆石窟, 克孜爾尕哈石窟, 碼扎伯哈石窟, 托乎拉克埃石窟).  그중 키질 석굴(克孜爾石窟)²이 둔황(敦煌), 롱먼(龍門), 윈강(雲岡) 등의 석굴과 더불어 4대 석굴로 알려져 있다. 


키질 석굴은 쿠차에서 서쪽으로 약 73㎞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³과 초르타그산(雀爾達格山)이 마주하고 있다.  계곡에는 무자티허(木扎提河)가 쿠차가 있는 동쪽으로 흐르고, 푸른 수목들이 물줄기를 따라 띠를 이루고 있다.  이 푸른 띠는 그 옛날 대상들과 승려들에게 알맞은 길이 되었다.  물과 쉴만한 곳을 쉽게 제공받을 수 있고 이동에 장애가 덜하기 때문이었다.  승려들은 교통로와 가까운 천혜의 장소에 그들의 도량인 석굴을 조성하였다. 


석굴은 계곡 북쪽에 있는 밍우타그산 낭떠러지에 3㎞에 걸쳐 3백여 개에 이르는 석굴을 조성하였다.  석굴이 처음 조성된 시기를 동한(東漢, 서기전 202-서기 220) 말기로 추정한다.  이것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보다 1세기 정도 앞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대승불교에 있어서 최초 석굴이며, 지리적으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석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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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 같이 보존된 키질 석굴(克孜爾石窟)


석굴은 대개 불전(佛殿: 支提窟), 승방(僧房: 毘訶羅窟, 倉庫窟)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배와 강경, 설법이 이루어지는 불전의 입구는 개방되어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천정이 높은 큰 사각형의 주실(主室)이 나타난다.  주실 정면 벽에 석가모니불상이 있고, 좌우 벽과 천정에 석가모니의 '본생고사(本生故事)'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실 정면 벽의 좌우로 통로가 있어, 정면 벽이 기둥 역할을 겸하고 있다.  이 기둥이 키질 석굴 건축의 특징이다.  기둥 뒤로 열반상(涅槃像)이 있는 후실(後室)이 있다.  후실로의 통행은 왼쪽 통로로 들어가 오른쪽 통로로 나온다.  또한 주실 형태가 사각형이 아닌 석굴들도 있다.  이들은 일렬로 이어져 있는데, 하나의 사찰로 여겨진다. 

승방은 승려의 기도와 고행 장소(禪窟), 그리고 그들의 주거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각 방들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화덕 등의 생활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재 발견된 석굴은 모두 236개다.  그중 81개 석굴에 벽화가 남아 있다.  벽화는 간다라 미술과 중국불교 미술, 그리고 쿠차의 독특한 화법(濕畵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벽화의 총 면적을 약 1만㎡로 추정하는데, 오늘날은 5천㎡ 정도가 남아 있다. 

벽화가 최초 제작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둔황 벽화보다 300여 년 앞서 있다.  벽화의 내용은 불교에 관한 것(飛天, 伎樂天, 佛塔, 菩薩, 羅漢, 天龍八部, 佛本生故事, 佛傳故事, 經變圖畵)에 그치지 않고 민간 풍속(생산 활동과 생활상, 서역지방 풍경과 동물)까지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중 17호 석굴 벽화(故事畵)와 38호 석굴 벽화(龜玆樂隊演奏圖)가 유명하다.  이외에도 76호 벽화(孔雀圖), 175호 벽화(二牛抬杠圖, 耕作圖) 등도 잘 알려져 있다. 

벽화 외에도 6m 높이의 불상(신1호 석굴)을 위시한 많은 소상(塑像)들도 있다. 

이렇듯 키질석굴은 서역불교의 중심인 구자불교의 건축, 조각, 회화 등이 집약된 보물 창고다. 


석굴은 서기 6-7세기에 가장 번성하다가 8세기 후반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8세기 초반에 이 지역에서 당(唐)과 토번(吐蕃)의 큰 싸움이 있었다.  이어서 당이 토번에게 이 지역을 내어줌으로 승려들이 떠나고 쇠락하게 되었다.  11세기에 들어 이슬람 세력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완전히 잊히게 되었다.  이후 지진과 홍수 등으로 훼손되어져 갔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훼손이 더 심했다.  20세기에 들어서 구미 열강들의 탐험대 - 약탈자들이 이곳에 나타나면서 급격하고 광범위한 훼손이 이루어졌다.  특히 독일 베를린 민속학박물관 소속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Albert von Le Coq)가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벽화와 고문서 등 100여 상자에 이르는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영국의 스타인(Marc Aurel Stein)도 나중에 한 몫 거들었다. 

오늘날 베를린 인도예술박물관에 공작도(76호 벽화)를 위시한 키질 석굴의 벽화가 가장 많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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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 석굴(克孜爾石窟) 앞 녹지(綠地).


키질 천불동의 석굴들은 모두 4개 구역으로 구분되어져 있다(谷西區, 谷內區, 谷東區, 後山區).  입구에서 경사진 길을 따라 50m 정도 내려가니 원형 화단 가운데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반가상(半跏像)이 있었다.  그 아래로 한족 단체관광객 한 무리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곳에서 왼쪽 경사로를 따라 조금을 올라가니 관리 사무실이 나타났다.  직원들이 입장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석굴을 들어가지 않고 경내에만 머물 경우 10위안).  석굴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이곳에서 카메라를 포함한 짐들을 맡겨야 했다.  이곳에서는 안내원도 배정해 주었다.  영어와 일어 안내는 100위안, 중국어와 위구르어 안내는 60위안(특별 안내는 100위안)이었다.  어차피 쇠귀에 경 읽기라 한족 단체관광객을 뒤따라 다니면서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족 청년이 따라왔다.  다시 한 번 사정을 설명하였지만, 그는 상관없다면 따라 나섰다.  관리 사무실부터는 계단 길이었다.  그리 많은 계단은 아니었지만 쫓아오는 청년의 발걸음이 미안했다.  이름이 양보(楊波)인 청년은 다리를 약간 절었다.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초롱초롱하였다.  27호, 28호, 7호, 10호, 17호, 15호 동굴 등을 관람하였다.  때로는 한족 관광객들과 때로는 혼자 관람하였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동굴 번호나 위치에 상관없이 양보의 안내대로 관람을 하였다. 

석굴은 기대 이하였다.  무식하고 미욱해서인지 모르겠으나 개방된 석굴은 그저 석굴일 뿐이었다.  벽화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겨우 만난 소상(塑像)의 뼈대가 되는 목불(木佛, 15호 석굴)도 모조품이었다.  이런 정도인데 굳이 사진촬영을 금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석굴에서 계곡 전경이라도 촬영하게 해주지 … '.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귀중한 석굴은 개방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듣기로는 벽화로 유명하다는 17호 석굴과 38호 석굴은 추가 요금을 지불하면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개 발에 편자'였다.  한족 관광객들 역시 관람하는 동굴이 몇 안 되었다. 

 

그나마 석굴 중에 관심을 끈 석굴은 10호 석굴이었다.  이곳이 키질 석굴을 발굴 조사하였던 한낙연(韓樂然, 1898-1947)이 머물던 곳이었다.  화가이자 혁명가인 그는 롱징(龍井) 출신 조선족이었다.  그는 1946년 6월에 이곳에서 14일간 머물면서 벽화 모사, 유물 고찰 등 탐사 활동을 하였다.  발굴과 탐사를 마친 후 그는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을 통해 키질 석굴 벽화가 둔황 석굴 벽화보다 뛰어나고 연대가 오래되었음을 밝혔다.  다음해 봄에 그는 다시 탐사대를 이끌고 키질 석굴에 도착하였다.  벽화 모사와 더불어 석굴에 일련번호를 매기는 등 분류 작업도 병행하였다.  75호 석굴까지 분류하던 중에 13석굴 옆에서 신(新) 1호 석굴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탐사가 마지막이었다.  귀로에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머물던 10호 동굴에는 그가 그린 자화상과 키질 풍경화, 그리고 동료 6명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북쪽 벽면에는 그가 새겨놓은 글귀가 있었다.  글의 내용은 서구 고고학자들의 문화재 약탈 행위 질타와 유물 보존 당부였다.  더불어 탁자 위에 중국 공산당 정부에서 수여한 그의 '혁명 열사증'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가 새긴 글귀로 스스로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 열사증에도 그가 중국인임이 확실히 명시 되어있는 것이 왠지 안쓰러웠다.

 

양보는 친절하게도 일부 석굴을 열어 주면서 더 관람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더 의미가 없다는 생각과 그에게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게도 그가 감시업무를 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내가 석굴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면 그가 문을 닫아거는 등 철저히 단속하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석굴을 조성될 때에는 불전의 입구가 항시 개방되었다는데 … .

돌아 나오는 길에 문물전시실(10위안)을 둘러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의 문물이 장안(長安)을 거쳐 신라로 유입된 흔적을 보려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도록(圖錄)이 아닌 실물 확인을 원했었다.  이럴 바에는 경내 입장권만 구입할 걸 하는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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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습(鳩摩羅什) 반가상(半跏像)


다시 구마라습의 반가상이 있는 곳으로 왔다.  어디선가 그가 이곳에서 불경을 번역하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양(梁, 502-557)의 승려 혜교(慧皎)가 쓴 '고승전(高僧傳)' 등에 의하면, 구마라습의 번역 작업은 장안에서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곳에 그의 동상이 있는 것은 그가 이곳에서 불경을 번역했다는 것보다는 이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곳에서 수행을 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는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온숙국(溫宿國)에 얼마간 머물렀다.  온숙국은 이곳과 인접해 있었다.  아마도 이곳이 당시에 온숙국 영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승전(高僧傳)'을 기초로 구마라습의 생애를 살펴보면:


구마라습(鳩摩羅什, 334-413)은 5호16국이 중국 화북지역에서 흥망성쇠를 하던 시기의 고승이 있었다.  그는 오늘날 쿠차(庫車)에 있었던 구자(龜玆) 왕국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구마라염(鳩摩羅炎)은 인도 귀족가문 출신으로 타고난 기품이 뛰어났다.  그는 가문을 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출가를 하였다.  그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구자에 이르렀을 때에 구자 왕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직접 영접을 하고 국사로 삼았다.

구마라습의 어머니는 구자 왕의 누이동생인 기파(耆婆)였다.  매우 총명한 그녀는 여러 혼처가 있었으나 모두 거절을 하였다.  그러다가 구마라염을 본 순간 마음을 결정하였다.

구마라습이 태어난 이후 기파는 출가를 결심하였으나, 구마라염이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인 불사제파(弗沙提婆)를 출산을 한 기파는 또 다시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에 항의하여 단식을 하였다.  6일이 지나자 구마라염은 마지못해 승낙을 하였다.  승낙을 받았음에도 그녀는 먼저 삭발을 하고 나서야 음식을 취했다.  다음날 수계를 받고 용맹정진 하였다. 

이때 일곱 살인 구마라습도 그의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였다.  매일 32자(字)로 이루어진 게송(偈訟)을 천 개씩 읽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대비파사론(大毗婆沙論)을 모두 외우게 되었다.  한 번은 노승이 구마라습을 위해서 해석해 주려했으나, 그가 이미 스스로 그 뜻을 완전히 깨우쳐 치고 있어 헛일이 되었다.  

기파는 자신들에 대한 구자 백성의 특별한 공양이 구마라습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구마라습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기파는 그를 대동하고 구자를 떠났다.  구마라습은 계빈(罽賓,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이르러 국왕의 사촌 동생인 고승 반두달다(槃頭達多)에게서 소승불교(小乘佛敎)를 배웠다.  게빈 국왕은 그의 뛰어난 지혜에 그를 귀빈의 예(禮)를 표하고 공양을 하였다.

구마라습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귀국을 하였다.  귀로에 소륵(疏勒, 카슈가르)에 이르렀을 때, 야르칸드 국왕의 동생인 승려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를 만나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배웠다.  특히 남인도 출신 용수(龍樹)의 중관파(中觀派)를 접하게 되었다.  소륵을 떠난 구마라습은 온숙(温宿, 악수 부근)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불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였다.  당시 온숙에는 유명한 도사가 하나 있었다.  구마라습은 이 도사와의 논쟁에서 승리하여 명성이 떨쳤다. 

구자 국왕 백순(白純)이 구마라습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세력 아래 있는 온숙까지 직접 찾아와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당시 구자는 소승불교를 따르고 있었다.  구자로 돌아온 구마라습이 대승불교를 전하자 모든 이가 반겼다.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이었다.  그는 궁에 새로이 마련된 절에서 수계를 받고, 국왕의 딸인 아갈야말제(阿竭耶末帝)를 가르쳤다.  그녀 역시 출가하였다.  또한 구마라습은 계빈 출신 비마라차(卑摩羅叉)를 스승으로 모시고 율(律)을 배웠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서역을 넘어 중국과 인도 등지까지 알려졌다.  


한편 중국의 장강 이북은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에 의해 평정되었다.  전진의 양주 자사(凉州刺史) 양희(梁熙)는 외교로 서역 국가들이 전진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의 공물은 부견으로 하여금 서역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하였다.  더불어 선선(鄯善)과 차사전(車師前) 같은 서역 국가들이 길잡이를 자청하고 전진의 서역도호 설치를 요구하였다.  서기 382년, 부견은 여광(呂光)에게 7만의 병력을 주어 서역 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구자를 정복하는 즉시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보낼 것을 여광에게 지시하였다. 

서기 384년, 여광은 구자를 정복하고 구마라습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소문에 비해 너무 젊은 구마라습을 본 여광은 그를 우습게 여겨 장안으로 즉시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성질 사나운 우마에 태워 땅에 떨어지게 하는 등 그를 희롱하였다.  더 나아가 구마라습이 아갈야말제를 취하지 않으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가 응하지 않자 술을 먹이고 그녀와 한 방에 가두어 파계토록 하였다.


한편 부견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강 이남의 동진(東晋)과 일대 격전(淝水大戰)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서기 383년).  그가 권토중래할 시간도 없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라는 뿔뿔이 갈라졌다.  마침내 부견은 그를 배반하고 후진(後秦)을 건국한 요장(姚萇)에 의해 살해되었다(서기 385년). 

구마라습을 대동하고 돌아가던 여광은 양주(涼州) 부근에 이르러 부견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양주를 차지하고 서역과 양주에 걸친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구마라습을 경시하던 여광은 귀로에 그의 천변지이(天變地異)를 꿰뚫는 능력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제 부견의 명령이 소용없어졌지만 여광은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결국 구마라습은 18년간 여광과 그를 이은 여찬(呂纂)에 의해 양주에 연금을 당하면서 그들의 정치 고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구마라습이 한어문(漢語文)에 능통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부견을 제거한 요장은 구마라습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 터라 여찬에게 그를 장안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여찬은 지혜가 뛰어난 구마라습이 요장을 도와 자기를 괴롭힐 것이 두려워 거부하였다.  요장은 곧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뒤를 이었다.  요흥 또한 구마라습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서기 401년, 요흥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모셔 국사로 삼았다.  이때 구마라습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요흥은 구마라습의 지혜를 이어받은 많은 자손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구마라습을 핍박하여 열 명의 기녀(궁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구마라습은 장안의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불경 번역과 강설을 하였다.그는 '금강경(金剛經)', '법화경(法華經)' 등 삼장경론(三藏經論) 74부, 384권의 경전을 한역(漢譯)하였다.  그리고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 저술하였다.  이를 통해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의 제자는 삼천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중국불교의 제2기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중 도생(道生), 승조(僧肇), 도융(道融), 승예(僧叡)가 뛰어났다.

구마라습은 서기 413년에 69세 나이로 장안에서 죽었다.



참조


1. 중국 이름은 홍야산(紅崖山)


2. 키질 천불동(克孜爾千佛洞)이라고도 하며 다르게는 허쓰얼 석굴(赫色爾石窟)이라고 한다.


3. 중국 이름은 팡지엔산(房間山)


4. 중국 이름은 모요우산(沒有山)


5. 다르게는 木扎特河라고도 기록하며, 중국 이름은 웨이간허(渭干河)


6. 산스크리트어(梵語)로 구마라지바(Kumārajīva)로 그의 아버지(鳩摩羅炎)와 어머니(耆婆)의 이름을 합쳐서 지어졌다.  다르게는 구마라기파(拘摩羅耆婆), 구마라시파(鳩摩羅時婆), 그리고 구마라십파(鳩摩羅什婆)로 음역되기도 하였다.  간략하게 나습(羅什), 습(什)이라고 하였다.  한어(漢語)로 의역하면 동수(童壽)이다. 

진체(眞諦, 499—569), 현장(玄奘, 602-664)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3대 역경승(譯經僧)이었다.


7. 본래 명칭은 아비달마대비파사론(阿毗達磨大毗婆沙論).  불교 설일절유부(設一切有部)의 근본 논서(論書).


8. "羅什: 嘗講經于草堂寺, (姚) 興及朝臣, 大德沙門千有余人, 肅容觀听. 羅什忽下高座謂興曰: 有二小儿登吾肩, 欲鄣, 須婦人.  興乃召宮女鎭之, 一交而生二者焉!" - 晋書 羅什傳


9. "秦王興, 以鳩摩羅什爲國師, 奉之如神!  親帥君臣及沙門听羅什講經.  又明羅什飜譯西域經論三百余券.  大營塔寺.  沙門坐禪者常利千數.  公卿以下皆奉佛.  由是州郡化之, 事佛者十室而九!" - 資治通鑑 券一一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