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좌익계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정치인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권을 겨루다 ‘사법살인(司法殺人)’을 당한 진보 세력의 주도 인물이다. 대법원은 그가 간첩죄로 사형당한 지 52년 만인 지난 1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간첩죄 등으로 기소돼 1959년 사형당한 진보당 당수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진보당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을 수정하려 했을 뿐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로 볼 수 없다’며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원심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밝혔다.
조봉암의 장녀 호정(84)씨는 그동안 부친의 신원(伸寃)을 위해 진력했다. 1950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부친의 비서로 일했던 그녀는 팔순이 되어 있었다.
“제가 서른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6·25전쟁 때 납북돼서 사촌오빠 부부와 제가 아버지 옥바라지를 했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경찰들이 집에 상주하면서 남편(이봉래 전 예총회장)을 감시했지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에 들어서자 맹견이 컹컹 짖어대며 반겼다.
조호정씨는 1959년 2월 27일에 있었던 ‘지금으로부터 진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도한다’는 주심 김갑수 대법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했다. 오후 1시50분 김 대법관은 판결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김정학·양명산·이동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고인에 대한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조봉암은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전세용·이상두는 각 징역 2년에 처한다.”
조호정씨는 “재판 과정에서 ‘평화통일론’ 문제는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육군첩보부대 소속 대북첩자이자 북을 왕래하는 대북상인 양명산을 등장시켰다”라고 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양명산 아저씨는 상하이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지요. 약수동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만날 때면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네가 상하이에서 태어난 호정이구나. 상하이에서 너를 본 기억이 있어’라고 말씀하셨지요.”
판결이 끝나자 재판부는 곧바로 퇴정했다. 방청객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눈물이 뒤범벅된 가족만이 일어설 줄 몰랐다. 그날 이후 조호정씨는 부친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 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은 무슨 운명이 그다지 기구하시기에 일제 때는 항일투사로 구사일생을 하고,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없애라’는 공산당 벽보가 제1착으로 서울 거리를 휩쓸다시피 했고, 오늘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시던 대한민국 이 땅에서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박사님! 저희 아버님의 항일 역사를 보나, 해방 후 악질 지주와 싸우며 농지개혁을 단행한 공을 보나 죽음을 불사한 반공 이념을 보아서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고, 간첩죄를 씌워서 죽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탄원서는 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탄원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자택으로 찾아갔으나 이화여대 스승이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만나주지 않았다. 다시 교수실로 찾아갔으나 박 여사는 탄원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내가 뭐라고 한담’ 하시기에 ‘선생님, 어쨌든 꼭 전해 주세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라고 간청했어요. 그러자 ‘두고 가봐. 전해는 줄게’ 하세요. 교수실을 나서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변호인단이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이해 7월 30일 재심은 기각됐고, 다음날 오전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의 상황을 조호정씨의 증언을 따라 재구성해 본다.(월간조선 2007년 11월호)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30분. 형무관이 감방으로 왔다. 조봉암은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감방 문이 열리고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형무소 본건물을 빠져나와 ‘고민통’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섰다. 길가에는 몇 송이 꽃이 피어 있었다. ‘이곳에도 꽃이 피는구먼, 그런데 향기가 없어.’ 조봉암은 혼잣말을 했다. 그는 머리를 산뜻하게 가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었다. 가슴에는 ‘2310’이란 수인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현장으로 가는 길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에 태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봉암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 구절(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달라고 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은 그 옛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환상을 불러 침통한 마음을 조용히 달래며 마지막 숨결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청했지만 규정에 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봉암은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조호정씨는 말을 잇는다.
“당시 홍진기 법무부 장관도 차일피일 미루다 어쩔 수 없이 결재를 했지만, 그렇게 빨리 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홍 장관은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여름 휴가를 떠났답니다. 그곳 호텔 식당에서 ‘曺奉岩 死刑執行, 31日 西大門刑務所(조봉암 사형집행, 31일 서대문형무소)’라고 쓰인 벽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조호정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에 서울 수표교 근처의 장택상씨 집에 갔다. 장씨가 몇 곳에 전화를 했지만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뒤이어 김춘봉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오후 3시30분. 김 변호사가 힘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이날 밤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길에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운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봉암은 이마 부분에 약간 검은빛을 띠고 있을 뿐 잠자듯 평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위를 우려한 경찰의 통제로 조문객은 200여명에 불과했고, 장택상씨도 조문하지 못했습니다. 강화 선산에 모실 겨를이 없어서 망우리에 모셨습니다.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다가 1961년 김충현 선생이 ‘竹山 曺奉岩之墓(죽산 조봉암지묘)’를 써 주셨는데, 그 일로 김 선생이 곤욕을 치렀답니다.”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것은 간첩 혐의 때문이다. 1심에서 무죄로 판결나자 ‘용공판사 물러나라’는 우익단체의 시위가 있었다. 그 뒤 2심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다. 일반 국민은 의혹의 눈으로 이 재판을 바라보았다.
“당시 기자였던 내가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이 사형당한 그날 형무소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기자가 다가가자 ‘당신네들은 언론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단 말이오? 감투가 아무리 좋아도 죄 없는 생사람의 생명마저 빼앗을 수 있소?’라고 언론을 원망했다는 보도였다.”(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남 사장의 증언은 계속된다.(‘조봉암 선생 명예회복을 소망합니다’ 동아일보 2009년 8월 18일자)
“그로부터 몇 달 후 자유당 정권 치하의 법원을 출입하면서 직접 들은 이야기들, 관련자들의 회고 및 자유당 정권 말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종합해보면서 그의 간첩혐의가 조작되었다는 의심을 점점 깊이 하게 됐다. 검찰이나 사법부의 권위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권력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듬해인 1960년 마산에서 4·19혁명의 불이 붙자 자유당 정권의 검찰, 경찰 및 특무대가 합동해서 부정선거 규탄시위 배후에 북한의 공작이 있는 것으로 조작하려다가 중단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조봉암은 1899년 10월 29일 강화군 선원면에서 농사짓던 조병창(曺秉昌)과 강릉 유씨 사이의 3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조봉암이란 아호는 ‘곧고 청청한 대나무가 부러지기 쉬우니 그 밑에 산을 넣어 산같이 너그러우라’고 김찬 선생이 지어주었다. 조봉암은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 부내면에서 면서기로 일하다 3·1운동을 맞는다. 그는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하다 서대문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에 불타게 됐다.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자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내가 걸어온 길’ 조봉암)
그의 첫사랑도 이때 찾아왔다. 조봉암은 3·1운동 때 제1여자고보(현 경기여고)에 다니던 강화 부농의 딸 김이옥(金以玉)과 함께 시위 격문을 찍고 태극기를 그려내는 일로 밤을 지새운다. 조봉암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김이옥은 자주 면회를 갔고,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그러나 김이옥의 집안에서는 ‘가당치 않다’고 극력 반대한다. 조봉암은 사랑을 포기하고 1921년 도쿄로 떠나 주오(中央)대학 정경부에 입학한다. 조봉암의 일본 유학을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 ▲ 죽산 조봉암 이야기를 하는 후예들. 외손녀 이성란, 딸 조호정, 외손사위 유수현씨(왼쪽부터).
“강화도 부내면 관정리에 거주하는 조봉암군은… 재작년 조선독립만세 관계로 인하야 1년 유여의 철창생활을 하다가 만기출옥하야 재가(在家) 정양 중이더니 금반 유학차로 거(去) 7일 상오 7시30분발 부산행 열차로 동경을 향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0년 7월 11일자)
그해 박열 등과 함께 재일유학생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한다.
“나는 처음에는 흑도회까지 조직하였으나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생각에도 지식적 충족이나 관념적인 만족으로가 아니고 무슨 조직을 가지고 힘을 만들어서 일본놈과 싸우고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되고 또 독립이 된 뒤에는 사회주의 사회를 결성해야 된다고 생각이 되었다.”(‘내가 걸어온 길’)
조봉암은 1922년 7월 귀국해 베르흐노이진스크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다.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23년 귀국해 혁명동지 김조이(金祚伊)를 만나 이듬해 결혼한다. 김조이는 동덕여고를 나온 좌익투사였다. 그녀는 당시 좌경지식여성들의 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의 핵심멤버로, 박헌영의 처 주세죽과 함께 맹렬여성투사로 통했다.
1927년 어느날 조봉암은 상하이에서 첫사랑 김이옥을 만난다. 조봉암에게 순정을 바쳐온 그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이화여전 음악과에 재학하던 중 폐병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다가 몰래 여비를 꾸려 조봉암을 찾아 상하이로 온 것이다. 상하이에서 두 사람은 신혼살림을 차렸고, 그 사이에서 호정씨가 태어났다. 김이옥은 조봉암의 활동을 열심히 도왔다. 공산당원이 되어 기관지 ‘조선지광’ ‘혁명’ 등의 편집을 도왔다.
그러나 둘 사이의 행복은 짧았다. 1932년 조봉암이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자 김이옥과 조호정은 강화로 돌아왔다. 김이옥은 1934년에 눈을 감는다. 1939년 출옥한 조봉암은 일제의 엄한 감시 속에서 미강(쌀겨)조합장으로 일한다. 이즈음 조봉암은 별거 중이던 첫부인 김조이와 재결합한다.
“아버지는 그 조합에서 일하시는 동안 빈민들을 돕는 데 힘쓰셨지요. 이때 혁명동지인 김조이 여사와 재결합하셔서 저를 키우셨어요. 그분은 6·25전쟁 때 납북되셨지요.”(조호정씨)
조봉암은 1945년 1월 일본군 헌병대의 예비검속으로 구금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에 석방된다. 인천에서 광복을 맞은 조봉암은 1946년 5월 공산당 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박헌영에게 보내 공산당과 결별한다.
“조봉암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 준다. 악수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 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남재희 칼럼 ‘프레시안’ 2009년 7월 30일자)
1948년 5·10선거에서 인천지역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장관에 임명되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에 크게 힘썼다. 봉건적인 토지소유제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한다는 그의 소신을 편 것이다.
조봉암은 1950년 2대 의원에 재선되며, 국회부의장에 당선된다. 1952년에 실시된 2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나서 낙선하나 초대 부통령이었던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를 눌러 크게 주목을 받는다. 그는 1956년에 진보당을 창당하고,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조봉암의 측근이었던 전세용씨의 회고담에 의하면 진보당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3분의 1은 진보계이고, 3분의 1은 동암(서상일)계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각종 정보기관원인 ‘정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때 지방에서 거의 선거운동을 못했다는 증언이다. 신문지에 쓴 벽보 약간 붙여놓고 한 지역에서 잠깐 연설을 하다가 경찰들에 억류될까봐 급히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던 그런 떠돌이식 엉성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언론인 남재희 증언)
조봉암은 당시 민주당과 후보 단일화 협상 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여 자동으로 야권의 단일 후보가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태도를 바꾸어 조봉암 지지를 거부하며, 이승만의 504만표에 비해 216만표로 패배한다. 조봉암은 대구를 비롯한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이승만을 눌러 보수세력을 압박한다.
“조병옥 박사는 1956년 10월 국회 본회의에서 ‘만일 자유 분위기의 선거가 이뤄졌다면 이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진보당 실험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억압되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정치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죠.”(조호정씨)
“그는 진보주의 정치이념과 평화적 통일 방안을 신봉했는데, 1958년이란 시대적 환경은 너무 엄혹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시대를 너무 일찍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김구가 통일에 대해서 보였던 열정과 같이 조봉암이 ‘평화통일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념은 그후 역사적 진행 방향과 맞아떨어졌음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특별부록)
조봉암은 1남3녀를 두었다. 아들 규호(63)씨가 있고, 맏딸 호정씨의 딸 이성란(52)씨는 섬유패션업자이며 유수현(57)씨와 결혼했다. 조봉암은 호정씨 외에 임정(65), 의정(62)씨 두 딸을 뒀다.
내가 본 조봉암 조병선 전 농림부 장관 비서 죽산 조봉암 선생과 선친은 어려서부터 강화도 한 동네에서 보통학교를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다. 조봉암 선생은 중국 노령으로 가셨고, 선친(조광원)께서는 하와이로 가서 국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런 인연으로 조봉암 선생께서 농림장관을 하실 때, 나는 비서로 그분을 모셨다. 그분은 평소 소련이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예 말씀이 없으셨고, 백성을 배부르게 잘살게 하는 것이 곧 정치라고 하셨다. 성격이 너그러워서 혹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문책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마디로 가르치는 포용력을 지니셨다. 서민적 풍모에다 아랫사람들을 아들 딸처럼 다독이셔,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모시기가 편했다. 철기 이범석 장군과 가깝게 지내 대소사를 자주 의논하시곤 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운동해 당선되셨다. 농림장관 당시 농촌진흥청장이었던 강정택씨를 데려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수원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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