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 제45권
예문지(藝文志) 4 ○ 경적(經籍) 4
중국 서목(中國書目) 2 동국기사(東國記事)
최이(崔頤)의 《동정고려기(東征高麗記)》
위충(韋沖)의 경략고려문(經略高麗文)
배구(裴矩)의 《고려풍속기(高麗風俗記)》
고음(顧愔)의 《신라국기(新羅國記)》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
왕종우(王宗禹)의 발해군사도(渤海軍司圖)
승안(僧顔)의 《발해행년기(渤海行年記)》
장건장(張建章)의 《발해국기(渤海國記)》
장료(章僚)의 《해외사정광기(海外使程廣記)》
《봉사고려고실(奉使高麗故實)》
여우지(呂祐之)의 《해외담황택시(海外覃皇澤詩)》
송구(宋球)의 《고려도기(高麗圖紀)》
원풍 연간의 《고려입공의식조령(高麗入貢儀式條令)》
원풍 연간의 《고려여탁배변식(高麗女卓排辨式)》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오식(吳拭)의 《계림지(鷄林志)》
왕운(王雲)의 《계림지(鷄林志)》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옛날에 주(周)나라 때 직방씨(職方氏)는 천하의 지도를 맡아서 천하의 땅을 장리(掌理)하여 방국(邦國), 도비(都鄙), 사이(四夷), 팔만(八蠻), 칠민(七閩), 구맥(九貊), 오융(五戎), 육적(六狄)의 인민(人民)을 분간해 그 이해를 두루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인(行人)의 관원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어서 경하(慶賀), 축하(祝賀), 호궤(犒饋), 회제(禬祭) 같은 따위에 있어서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치고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강녕, 안락, 재액, 빈곤 따위에 있어서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분간치고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었는바,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復命)하여 왕이 천하의 일들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외사(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志)를 만들었고, 사도(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땅의 그림을 만들고, 송훈(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존귀한 한 몸이 구중궁궐 속에 팔짱을 낀 채 깊숙이 있으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패공(沛公)이 처음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갔을 적에 소하(蕭何)가 혼자서 진(秦)나라의 도서(圖書)를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漢)나라에서 진나라의 요해지(要害地)와 호구(戶口)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하의 공이었습니다. 그리고 수(隋)나라의 장손성(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 사냥할 적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였다가, 돌아와서 문제(文帝)에게 표문을 올려 아뢰면서 입으로는 그곳의 형세에 대해 말하고 손으로는 그곳의 산천을 그려 마침내 뒷날에 성과가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유헌(輶軒)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본디 도서(圖書)의 수집과 제작을 급선무로 여겨야 합니다. 하물며 저 고려는 요동(遼東)에 있는바,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속국(屬國)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도적을 작성하기가 더욱더 어려운 데이겠습니까.
황제(皇帝)께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 하였으며,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아 주었습니다. 신령하신 선왕께서는 고려를 더더욱 품어 주어 그들의 인재를 뽑아 조정에 있게 해서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였는바, 은혜의 융숭함과 예우의 후함은 전례가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급사중(給事中)으로 있는 신(臣) 노윤적(路允迪)은 경전(經典)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 사인(中書舍人)으로 있는 신 부묵경(傅墨卿)은 학문의 고명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정성껏 지키고 일에 임해 마음이 변치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하는 것이 옛날의 훌륭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임명을 받고서 떠나기 전에 마침 고려에서 왕우(王俁)가 훙(薨)하였다고 부음을 아뢰어 왔으므로, 마침내 전위사(奠慰使)의 직임을 겸임하고 갔습니다.
신은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결원(缺員)에 충당되어 사신 행차의 속관(屬官) 말석에 끼게 되었습니다. 큰일이야 참으로 장(長)의 결정에 따라서 하였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소한 일에 대해서도 역시 조정에서 능력에 따라 부리는 데에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물러나서 스스로,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시경(詩經)》 황화(皇華)의 시에서 노래하였으니, 일을 두루 묻는 것은 바로 사신 된 자의 직책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한 다음, 우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을 취하니, 도합 300여 항목이 되었습니다. 이를 정리해서 40권으로 만들었는데, 사물에 대해서는 모양을 그리고 일에 대해서는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숭녕(崇寧) 연간에 왕운(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는데, 처음으로 그 설(說)을 해설하였으나 그 모양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근래에 사신의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가 참고해 보니, 도움 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 신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면 먼 이역 땅의 모습이 다 눈앞에 모일 것인바, 이는 대개 옛날에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遺制)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옛날 한나라 때 장건(張騫)은 월지(月支)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뒤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그가 경유하였던 나라의 지형과 물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신은 재주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는 겨우 한 달 남짓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숙소가 정해진 뒤에는 파수병이 지키고 있어 문밖을 나가 본 것이 5, 6차례에 불과하였는바, 수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宴席)에서 수작(酬酌)하는 사이에 보고 들은 것은 13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보고 들은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려의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대체,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알 수가 있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는 감히 박식한 것을 자랑하고 부박한 것을 꾸며서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復命)하여 부여받은 책임을 조금이나마 다하고자 해서인 것입니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기에 삼가 대강의 경위를 간추려 서문을 지었습니다.
선화 6년 8월 6일에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賜緋魚袋) 신(臣) 서긍(徐兢)은 삼가 서문을 씁니다.”
중부가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經文)만 남아 있는데, 내가 지금 와서 그리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하였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아, 관 뚜껑을 덮으면 일은 거기에서 끝나 버리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판각하여 징강군(澂江郡)의 군재(郡齋)에 남겨 두는바, 후대의 사람들은 참고할 데가 있을 것이다.
건도(乾道) 3년(1167) 하지에 좌조봉랑(左朝奉郞) 권발견강음군주관학사(權發遣江陰郡主管學事) 서천은 쓰다.”
무릇 고려는 요(遼)나라와 국토를 접하고 있어서 형세상 그들의 정삭(正朔)을 받들면서 섬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탓에 송나라를 대우하는 데에 소홀하였는바, 이에 중국의 체모 역시 낮아졌다. 영우(永祐)는 나라가 패망할 날이 이미 박두하였는지도 모른 채 구구하게 먼 오랑캐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였다. 건염(建炎)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세가 더욱 판이해지자, 삼한(三韓)으로 가서 계림(鷄林)과 결탁하여 이제(二帝)의 어가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니, 그 어리석고 오활함이 참으로 우습다. 그리고 임안(臨安)과 사명(四明)의 거리가 겨우 절수(浙水) 한 강물만 격해 있었던 탓에 항상 갑작스러운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 사신을 물리쳐 버리고 말았다. 송나라가 망함에 미쳐서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니 자못 중국을 높이려고 하였는바, 나는 유독 송나라가 서긍만 못하였던 것을 탄식하는 바이다.”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
《사고려사찬(使高麗事纂)》
《선화접송고려칙령격식(宣和接送高麗勅令格式)》
《선화봉사고려칙령격식(宣和奉使高麗勅令格式)》
《고려칙령예의범좌도(高麗勅令例儀範坐圖)》
《고려표장(高麗表章)》
《고려행정록(高麗行程錄)》
양응성(楊應誠)의 《건염가도고려록(建炎假道高麗錄)》
옹몽득(翁夢得)의 《신라국기(新羅國記)》
염자수(閻子秀)의 《압강일기(鴨江日記)》
왕약(王約)의 《고려지(高麗志)》
송무(宋无)의 《경배음집(鯨背吟集)》
등종(鄧鍾)의 《고려도기(高麗圖記)》
예겸(倪謙)의 《조선기사(朝鮮紀事)》
《요해편(遼海編)》
전부(錢溥)의 《조선잡지(朝鮮雜志)》
장영(張寧)의 《봉사록(奉使錄)》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사동일록(使東日錄)》
《조선잡지(朝鮮雜志)》
공용경(龔用卿)의 《사조선록(使朝鮮錄)》
황홍헌(黃洪憲)의 《조선국기(朝鮮國記)》
위시량(魏時亮)의 요동사의(遼東事宜)
정약증(鄭若曾)의 《조선도설(朝鮮圖說)》
송응창(宋應昌)의 《조선복국경략(朝鮮復國經略)》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소응궁(蕭應宮)의 《조선정왜기략(朝鮮征倭紀略)》
모서휘(茅瑞徽)의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攷)》
왕사기(王士琦)의 《봉공기략(封貢記略)》
제갈원성(諸葛元聲)의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후계국(侯繼國)의 《양절병제(兩浙兵制)》
황우경(黃俁卿)의 《왜환고원(倭患考原)》
왕사기(王士驥)의 《어왜록(馭倭錄)》
오명제(吳明濟)의 《고려세기(高麗世紀)》
주지번(朱之蕃)의 《봉사조선고(奉使朝鮮藁)》
등소경(鄧少卿)의 《봉사시초(奉使詩艸)》
필마(匹馬)로 외로이 가서 반표(班彪)는 유거감부(遊居堪賦)를 지었고,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양수(楊修)는 편안히 쉴 누관(樓觀)을 지었다. 소자범(蕭子範)은 동정(東亭)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왕승유(王僧孺)는 지는 해를 전송하면서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모두 잊었다. 그리고 마경(馬卿)은 격문(檄文)을 받들고 공작(卭筰)에서 군(郡)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며, 성사(星使)는 뗏목을 타고서 은하수에서 곧장 두우성(斗牛星)을 범하려고 하였다. 임연(任延)은 구진(九眞)에 법령을 세웠고, 장교(張喬)는 교지(交趾)에서 방략(方略)을 시행하였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 지방에 사신으로 가서 우리의 위엄을 선포하여, 능히 황의(黃衣)로 하여금 치달리게 하고 청해(靑海)의 자취를 녹여 버린 것이니, 아, 성대하기도 하다.
내가 소경(少卿) 등 선생(鄧先生)의 시를 읽어 보고 선생께서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을 책봉하고 국교를 맺은 일을 살펴보니, 넘어간 곳은 험고한 마한(馬韓)과 낙랑(樂浪)의 지역이고, 통과한 곳은 멀고먼 구정(鉤町)과 누와(漏臥)의 지역이며, 지나간 곳은 염롱(冉隴)과 애뢰(哀牢)의 관문이고, 경과한 곳은 무덥고 독초(毒草)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필마를 타고 길을 떠나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먼 나라 사람에게 훈고(訓誥)를 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먼 이역 땅에 광채를 드날렸다.
그 웅대함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를 남두에서 구분하고, 수레바퀴와 문자를 온 천하가 같게 하였다.[夷夏分南斗 車書共一匡]’이고, 그 비장함으로 말하면 ‘원숭이가 슬피 울어 풍색이 어둡고, 돌들이 어지러워 물소리가 나뉜다.[猿哀風色暝 石亂水聲分]’이고, 그 맑고도 먼 것으로 말하면 ‘구름은 첩첩 산을 돌아 있어 길이 없는 듯하며, 경쇠 소리 긴 숲에서 솟아나 별유천지가 있다.[雲廻疊嶂疑無路 磬出長林別有天]’이고, 그 높고도 험준함으로 말하면 ‘버들 숲 밖의 누대는 허공 속에 솟아 있고, 술잔 앞의 해와 달은 푸른 바다로 달려간다.[柳外樓臺侵碧落 尊前日月競滄瀛]’이다. 이 시들은 모두 제주(題柱)하는 황급한 때에 지은 것으로, 아름다운 시구를 쏟아 낸 도량을 상상할 수가 있다. 선생이 사신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개 그 시를 읽어 보면 알 수가 있다.
선생이 지은 요좌잡흥(遼左雜興)과 맹호행(猛虎行) 등 여러 편은 마치 가생(賈生)이 고질병을 통곡하는 듯한바,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말들을 모두 징험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당시에 그의 시를 읽는 자들이 일찍이 이를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아, 지금은 천자께서 여러 차례 치청(淄靑)의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사나운 호랑이로 하여금 발톱을 거두어들이게 하고 흉악한 올빼미로 하여금 울음소리를 바꾸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동쪽으로 길이 통하지 않아 서쪽에서만 부질없이 탄식하고 있으니, 장차 탐인(撢人)이 실직하여 사신이 도달하기 어렵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평탄한 길을 가듯 가서 반드시 화락하고 아름다운 시를 읊을 것이다. 그러나 경월(卿月)이 이미 떨어져서 사성(使星)에 광채가 없으니, 비록 남긴 시가 찬란하다고는 하지만 덕스러운 음성이 없어진 것이다.
선생은 가학(家學)이 밝고 아름다워 봉황의 꼬리 같고 기린의 이마 같아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뒷날에 용문(龍門)의 역사를 이어서 순열(荀悅)의 기록을 보탤 자가 있을 것인바, 나는 장차 선생이 노닐던 곳을 유람하면서 징험해 보고자 한다. 초소(楚騷)에 ‘곤륜산에 올라감이여, 사방을 바라보노라. 마음이 날아 올라감이여, 넓고 넓도다.[登崑崙兮四望 心飛揚兮浩蕩]’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이 시가 거의 선생과 더불어서 팔극(八極)의 밖에서 정신적으로 감응할 것이다.”
장정매(張廷枚)의 《봉사고려기사시(奉使高麗紀事詩)》
초횡(焦竑)의 《조선시선(朝鮮詩選)》
오명제(吳明濟)의 《조선시선(朝鮮詩選)》
왕경(王京)에 도착해서는 허씨(許氏)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허씨 형제 세 사람은 이름이 허봉(許篈), 허성(許筬), 허균(許筠)으로, 모두 문장으로 해동에 이름이 났다. 허균은 기억력이 매우 좋아 해동의 시 수백 편을 능히 외웠으며, 또다시 그의 매씨(妹氏)에게서 시 200편을 얻었다. 그리고 판서로 있는 윤근수(尹根壽)에게서도 역시 잔편(殘篇)을 많이 찾아내어 쌓인 것이 책 상자에 가득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내가 장안(長安)에 있다가 다시 조선으로 가서 이씨(李氏)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이씨는 조선의 의정(議政)으로 있는 이덕형(李德馨)으로, 본디 시문을 잘하였다. 이에 여러 명사(名士)들의 문집을 찾아 주기를 부탁하였는데, 신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100여 사람의 문집을 구해 주었다. 이 책들을 두 달간에 걸쳐 펼쳐 보고는 좋은 시 약간 편을 얻은 다음, 이를 종류별로 모아 기록하였다.”
손치미(孫致彌)의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
[주D-002]상주(上奏)하니 : 원문에는 ‘卷之’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奏之’로 바로잡았다.
[주D-003]왕부(王溥)의 손자 : 《송사》 권249 왕부열전(王溥列傳)에는 왕이손이 왕부의 아들로 되어 있다.
[주D-004]당나라 태후(太后)의 조정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섭정하던 때를 말한다.
[주D-005]애일재총초(愛日齋叢鈔) : 원문에는 ‘愛日齋叢抄’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06]여경사(如京使) : 송나라 때의 관직으로, 창고의 관리를 맡는 관직이다.
[주D-007]승원(昇元) : 이승(李昇)의 남당(南唐) 연호로, 서기 937년에서 943년까지다.
[주D-008]여요(餘姚) :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주D-009]직방씨(職方氏) : 《주례(周禮)》에 나오는 하관(夏官) 가운데 하나로, 각 지방의 일을 맡아보는 관직이다.
[주D-010]행인(行人) : 《주례》의 추관(秋官)에 속하는 관직으로, 빈객의 접대를 맡아보는 관직이다. 후대에는 사신의 뜻으로 쓰였다.
[주D-011]호궤(犒饋), 회제(禬祭) : 호궤는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고, 회제는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푸닥거리를 말한다.
[주D-012]다섯 가지 종류의 일 : 《주례》 추관 소행인(小行人)의 직장(職掌)을 설명하는 데 나오는 말로, 제후국(諸侯國)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부의(賻儀)를 보내 도와주고, 흉년이 들면 양곡을 보내어 구호해 주고, 전사(戰事)가 발생하면 재물을 모아 지원해 주고, 복된 일이 있으면 축하해 주고, 재앙이 있으면 위문해 주는 것을 말한다.
[주D-013]다섯 가지 종류의 분간 : 다섯 가지 종류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판별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4]외사(外史) : 《주례》 춘관(春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외국에 보내는 명령(命令)을 작성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직이다.
[주D-015]사도(司徒) : 《주례》 지관(地官)의 대사도(大司徒)로, 나라의 토지 그림과 인민의 수효를 확정해서 임금이 나라 다스리는 것을 돕는 관직이다.
[주D-016]송훈(誦訓) :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사방의 기록에 있는 오래된 일들을 설명해서 임금이 각 지방의 옛일을 살필 수 있도록 해 주는 관직이다.
[주D-017]토훈(土訓) : 《주례》 지관에 속하는 관직으로, 지도를 설명해서 각 지방을 살펴 알게 하는 것을 맡은 관직이다.
[주D-018]패공(沛公)이 …… 거둬들였는데 : 한나라 원년(元年) 10월에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으로 진입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앞 다투어 재물을 거둬들였으나, 오직 소하만은 진나라의 승상부(丞相府)에 들어가서 도적(圖籍)과 문서(文書)를 거두어들였다. 유방이 이로 인해 천하의 요새와 호구의 다소를 알 수가 있었다.《史記 卷53 蕭相國世家》
[주D-019]바로 소하의 공이었습니다 : 원문에는 ‘醫何之功’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서문에 의거하여 ‘繄何之功’으로 바로잡았다.
[주D-020]수(隋)나라의 …… 하였습니다 : 북주(北周)의 선제(宣帝) 때 장손성이 돌궐에 사신으로 가 돌궐의 추장과 함께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사냥하였는데, 이로 인해 산천의 형세와 부중(部衆)의 다소를 살펴 그들의 실정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 뒤에 수나라 때 들어와 자주 돌궐에 사신으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隋書 卷51 長孫晟列傳》
[주D-021]유헌(輶軒) : 천자(天子)의 사자(使者)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주D-022]왕우(王俁) : 고려 예종(睿宗)의 이름이다. 예종은 1122년 4월에 훙하였다.
[주D-023]쌀을 …… 유제(遺制) : 후한(後漢) 때의 장수인 마원(馬援)이 광무제(光武帝) 앞에서, 반란을 일으킨 외효(隗囂)의 군대가 토붕와해(土崩瓦解)될 형세에 처해 있으며 군사들을 진격시키면 반드시 격파할 상황임을 설명할 적에, 쌀을 모아 산골짜기의 모양을 만들고 군사의 형세를 말해 주어 광무제가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을 말한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24]장건(張騫)은 …… 뿐입니다 : 한나라 무제(武帝) 건원(建元) 2년에 장건이 대월지(大月氏)에 사신으로 갔는데, 100여 명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떠났다가 흉노(匈奴)에게 구류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몇 차례 탈주 끝에 대월지를 들러서 원삭(元朔) 3년에 간신히 귀국하였다. 그때 장건이 돌아와서 알린 견문록(見聞錄)은 한 무제가 서역(西域)을 경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漢書 卷61 張騫傳》
[주D-025]상관생(上官生) : 원문에는 ‘上宜生’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후지(後志)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26]그림은 없어지고 : 원문에 ‘圖圖’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후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27]청성(靑城)의 화(禍) :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한다. 청성은 송나라 재궁(齋宮)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두 황제가 금나라에 항복하였다.
[주D-028]영우(永祐) : 송나라 휘종(徽宗)의 능호(陵號)로,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있다. 여기서는 휘종을 가리킨다.
[주D-029]건염(建炎) …… 하였으니 :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거란에 포로로 잡혀가 있자, 건염 2년에 양응성(楊應誠)이 “고려에서 여진까지는 길이 매우 가까우니, 신이 삼한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과 우호를 맺어 두 분 황제를 영접해 오겠습니다.”는 내용으로 상언하고 고려에 사신으로 갔으나, 실패하였다.《宋史 卷487 高麗列傳》
[주D-030]임안(臨安) : 절강성의 항주(杭州)로, 송나라 고종(高宗)이 남도(南渡)하였을 때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주D-031]사명(四明) :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032]사신을 …… 말았다 : 사명(四明)이 거란에게 함락된 뒤 송나라에서는 고려가 국내 사정을 염탐하여 금나라에 보고할까 염려해서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다.
[주D-033]글씨 …… 요청하였다 : 원문에는 ‘願得能書者至中國’으로 되어 있는데, 《유환기문》 권6에 의거하여 ‘願得能書者至國中’으로 바로잡았다.
[주D-034]인화 조씨(仁和趙氏)의 소산당(小山堂) : 인화는 지명이며, 조씨는 청나라의 조욱(趙昱)을 가리킨다. 그는 서책을 좋아하여 수만 권의 서책을 사들여 소산당에 보관하였다.
[주D-035]절강서목(浙江書目) : 원문에는 ‘浙浙江書目目’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36]국왕과 …… 않았는데 : 이때 세종이 죽고 문종이 막 즉위하였다.
[주D-037]토목(土木)의 변고 : 토목은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보(堡)의 이름이다. 정통(正統) 14년(1449)에 와랄(瓦剌)의 귀족(貴族)인 먀선(乜先)이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침입하자, 환관 왕진(王振)이 영종(英宗)을 모시고 출정하였다가 토목보에서 포로가 되었다.《史略 卷9 英宗獻皇帝》
[주D-038]굉치(宏治) : 홍치(弘治)를 가리킨다. 《사고전서총목》이 청나라 고종 때 편찬되었는데, 고종의 이름이 홍력(弘曆)인바, 황제의 이름을 휘하여 굉치로 쓴 것인 듯하다.
[주D-039]발씨(哱氏) : 달단족(韃靼族)의 추장(酋長)인 패래(孛來)를 가리킨다. 패래는 명나라 경태(景泰)와 천순(天順) 연간에 자주 변경 지역을 침입하였는데, 성화(成化) 연간에 부족들과 하투(河套)에 웅거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침입하다가 얼마 뒤에 동족에 의해 피살되었다.
[주D-040]관백(關白) : 일본의 풍신수길(豐臣秀吉)을 가리킨다.
[주D-041]양응룡(楊應龍) : 만력 초에 사천(四川)의 파주 선위사(播州宣慰使)를 승습하였는데, 성격이 몹시 잔혹하였다. 묘인(苗人)들과 결탁해 기강(綦江)을 함락하였다가 명나라의 이화룡(李化龍), 유정(劉綎), 오광(吳廣) 등에게 잇달아 패하자 스스로 자살하였다.《明史 卷312 四川土司2》
[주D-042]태사공(太史公)은 …… 되었다 : 태사공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 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D-043]반표(班彪) : 동한(東漢) 때의 사람으로, 처음에는 외효(隗囂)를 따르다가 뜻이 맞지 않아 두융(竇融)을 따랐다. 역사 찬술에 뜻을 두어 《한서(漢書)》를 저술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반고(班固)가 이를 완성하였다.《後漢書 卷40 班彪列傳》
[주D-044]양수(楊修) : 후한 때의 사람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조조(曹操)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조조와 재주를 겨루고, 조조의 뜻을 미리 알아맞혔다가 조조의 시기를 받아 살해되었다.《三國志 魏書 卷21 王粲傳 楊修》
[주D-045]소자범(蕭子範) : 양(梁)나라 사람으로 자가 경칙(景則)이다. 매우 효성스러워서 거상(居喪)하면서 몸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대사마를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다.《梁書 卷35 蕭子範列傳》
[주D-046]왕승유(王僧孺) : 원문에는 ‘王僧儒’로 되어 있는데, 《양서(梁書)》 권33에 의거하여 ‘王僧孺’로 바로잡았다. 왕승유는 양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고서(古書)를 좋아해서 수만 권을 모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진본(珍本)이었다.《梁書 卷33 王僧孺列傳》
[주D-047]마경(馬卿)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사마상여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주D-048]공작(卭筰) : 한나라 때 서남 오랑캐인 공도(卭都)와 작도(筰都)로, 대략 사천(四川)과 서창(西昌) 일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9]성사(星使)는 …… 하였다 : 성사는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한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주D-050]임연(任延)은 …… 세웠고 : 임연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장손(長孫)이다. 구진(九眞)은 남월(南越) 지방의 지명으로, 한나라 때 구진군(九眞郡)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의 안남(安南) 일대이다. 한나라 건무(建武) 초에 임연이 구진의 태수가 되었는데, 구진 지방은 본디 사냥을 생업으로 삼아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이에 임연이 농기구를 만들어서 농사짓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또 결혼하는 예법(禮法)이 없어서 부자간의 윤리나 부부의 도가 없었는데, 임연이 남녀를 각각 나이에 맞게 서로 맺어 주었다.《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任延》
[주D-051]장교(張喬)는 …… 시행하였다 : 장교는 한나라 순제(順帝) 때 사람으로, 만족(蠻族)이 중국을 쳐들어왔을 때 여러 주군(州郡)에서 그들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교가 교주 자사(交州刺史)가 되어 이들을 진압하였다.《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주D-052]황의(黃衣) : 누런 옷으로, 본디는 황제가 입는 옷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황제의 사신이 입는 옷을 말한다.
[주D-053]청해(靑海) : 중국 중부의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황하의 발원이 되는 호수인 청해(靑海)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하였으며, 서쪽 변경의 오랑캐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주D-054]구정(鉤町)과 누와(漏臥) : 구정이 원문에는 ‘구가(鉤
[주D-055]염롱(冉隴)과 애뢰(哀牢) : 염롱은 사천성(泗川省) 무현(茂縣) 지역에 있던 서이(西夷)인 염롱(冉䮾)의 잘못인 듯하다. 애뢰는 중국의 서남방에 있는 소수 민족의 이름이다.
[주D-056]가생(賈生) : 한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나가면서 상수(湘水)를 건너다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다시 양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겨졌는데, 양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史記 卷84 賈生列傳》
[주D-057]치청(淄靑) : 본디 당나라 때의 방진(方鎭) 이름으로, 치청평로(淄靑平盧)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열하성(熱河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주D-058]탐인(撢人) : 《주관(周官)》 하관(夏官)에 나오는 관직명으로, 왕의 뜻을 서술하여 천하에 알리는 관직이다.
[주D-059]경월(卿月) : 《서경》 홍범(洪範)에, “임금은 해를 살펴야 하고, 귀족과 관리들은 달을 살펴야 하며, 낮은 관리들은 날을 살펴야 합니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 한 데서 나온 말로, 뛰어난 재신(宰臣)을 가리킨다.
[주D-060]사성(使星) : 사신(使臣)을 가리킨다.
[주D-061]용문(龍門)의 역사 : 역사서(歷史書)를 가리킨다. 용문은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이 태어난 곳으로, 사마천의 별호(別號)로 쓰인다.
[주D-062]순열(荀悅)의 기록 : 역사가의 기록을 말한다. 순열은 후한 때의 사람으로, 저술하기를 좋아하여 《신감(申鑑)》, 《한기(漢紀)》 등을 저술하였다.
[주D-063]초소(楚騷)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를 말한다.
[주D-064]삼한인(三韓人) : 《국조기헌유징(國朝耆獻類徵)》 권170에는 ‘漢軍人’으로 되어 있다. 장정매는 청나라 사람이다.
[주D-065]고려(高麗) :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킨다.
[주D-066]절풍건(折風巾)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삼국의 각 지역에서 성행하던 가장 오래된 고깔형의 관모(冠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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