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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제(圜丘祭)와 우리의 아픈 역사.이효재

굴어당 2011. 10. 23. 10:13

환구제(圜丘祭)와 우리의 아픈 역사 [제2부]

[환구제(圜丘祭)! 두를 환⋅언덕 구⋅제사 제] 두를 환(圜)은 천(天) 즉, 우주만물의 대자연 중에서 하늘을 말하는 것이고, 언덕 구(丘)는 한양의 도성 밖 남쪽에 있는 언덕을 말하고, 제사 제(祭)는 제사지내다의 뜻이니, [한양궁궐의 남쪽인 성 밖의 언덕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로 풀이할 수 있다. 

[하늘에 제사지내다]는 듣거나 보거나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말이다. 환구제는 환구에다 제단(祭壇)을 지어 그 단에서 제사하였는데, 이를 우리는 환구단(圜丘壇)이라 한다. 환구단은 우리 한민족사의 울분과 통한이 송두리채 배여 있는 하늘의 제단이다.

혹자들은 환구단을 원구단(圓丘壇)이라 말하는 이도 있는데, 원구(圓丘)는 둥글 원(圓)이라 하여 아주 작은 뜻의 둥글다(圓)를 의미하므로, 필자의 개인적인 의미해석으로 본다면 우주공간을 두르는 아주 큰 뜻의 둥글다(圜)와는 사뭇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종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환구와 원구의 쓰임새를 아래 도표를 통해 알아보자.

문헌(文獻)

환구(圜丘)

원구(圓丘)

조선왕조실록

149건

15건

승정원일기

254건

1건

일성록

4건

없음

고전번역(개인문집포함)

38건

40건

445건

56건

이상의 자료에서 보았듯이 환구와 원구의 쓰임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 중 개인문집 등을 번역하면서 “두를 환(圜)”을 대부분 “원”으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위 40건)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사이에선 환구와 원구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일고 있으므로, 3년 전쯤 국가기관인 문화재청에서 공청회를 열어 여러 학자들 간의 논란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환구(圜丘)라 표기하기로 확정하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고종황제께서 천자국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구제(圜丘祭)라는 용어를 직접 쓰고 행하였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관련단체(종묘제례보존회, 사직대제보존회, 조선왕릉보존회, 환구대제보존회 등)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을 환구로 쓰기를 내부적으로 정립하였다 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용어의 쓰임에 대하여 의문한 것이 있다. 이렇듯 환구와 원구의 의미해석이 매우 크므로 혹여나 일제의 입김이 작용하여 환구를 원구로 격하시킴으로 해서 우리의 민족정신을 흔들어 놓겠다는 악심(惡心)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하였고, 이름도 바꾸기를 강요당하였으며, 전국의 명산 곳곳에 기(氣)를 꺽는 쇠말뚝을 박았으며, 종묘(宗廟)로 내려오는 지맥(地脈-현재의 율곡로)을 끊는가 하면 궁궐의 전각(殿閣)마저 해체하여 팔아먹었으니 어찌 통탄스럽다 하지 않겠는가? 일제가 저지른 그 엄청난 죄 값을 저들은 어찌 받으려하는지 두고 볼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農耕文化)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의례로 보고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되었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인용된『고기(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祭祀)지내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天地)에 제사(祭祀)하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祭天壇)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영고(夫餘 迎鼓)와 고구려의 동맹(高句麗 東盟) 그리고 예의 무천(濊 舞天) 등이 그러하다.

『고려사(高麗史)』성종(成宗) 세가의 기록을 보면 성종 2년(983) 정월에 국가의 안녕과 태평성세를 염원하여 “왕이 환구제를 올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의 환구제는 5방(方)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천제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祭)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天子國)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 1385년(우왕 11)에 명(明)나라의 사신으로 온 주탁(周倬)이란 자가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諸侯)의 예(禮)에 따라야 한다면서, 소위 천자국의 나라도 아닌 제후국이 감히 하늘에 제사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인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당시의 정치상은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던 중이었으므로 부득이 제천례(祭天禮)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 또 시작된 셈이었다.

조선 초에 이르러 제천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에 반하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에 따라 그 후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394년(태조 3)에 제후국(諸侯國)의 예(禮)에 준하여 자국(自國)의 동방신(東方神)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圜壇]이 설치되었다. 예조에서 아뢰길,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환단(圜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후 여러 차례 풍년을 빌거나 비를 내리게 해 달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405년(태종 5) 7월 7일에 임금이 좌정승 하륜에게 원단을 새로 축조하여 비를 빌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두 번째로 원단(圓壇)에 비를 빌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적전(籍田)과 원구단(圓丘壇-개성에 있는 고려의 壇)은 전조(前朝)의 옛 것이오니, 청컨대, 신경(新京-한양에 있는 조선의 壇)의 단(壇)에 이를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내(境內)의 땅이 이 하늘 아래인데, 어찌 여기에 편안히 앉아서 신경(新京-한양)에 요제(遙祭)할 수 있겠는가? 옛 원구단은 버려두고 신단(新壇)을 축조(築造)하여 이를 행하라.” 하고,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을 명하여 행사(行事)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서 조선이 창업한지 두 번째로 환구제를 올린 셈이다.

1411년(태종 11)의 실록을 보면 “다시 원단(圓壇)을 남교(南郊)에 쌓았다. 이 앞서 정부(政府)에서 상언하기를, ‘천자(天子)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할 수 없습니다.’ 하였던 까닭으로 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서쪽에 있기 때문에 다만 백제(白帝)만 제사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또한 마땅히 청제(靑帝)를 제사하라고 한다.’ 하였기 때문에 다시 쌓은 것이다.” 라고 하였을 뿐,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때에는 예조(禮曹)에서 원단(圓壇)의 제의(祭儀)를 주청하여 환구제에 대한 제법만 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1416년(태종 16) 6월 1일에는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이 상서(上書)한 전문을 대략 살펴보면, 노(魯)나라의 교사(郊祀)를 운운하면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말씀들을 인용해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올렸는데, 이에 감읍한 임금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을 짓게 하고 자책(自責)하는 뜻을 가지고 매우 자세하게 유시(諭示)하였다. 그러나 혹자들은 “변계량이 부처에 혹(惑)하고 신(神)에 아첨하며, 하늘에 배례(拜禮)하고 별에 배례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심지어 동국(東國)에서 하늘에 제사하자는 설(說)을 힘써 주장하니, 분수를 범하고 예를 잃음을 알지 못함이 아닌데, 한갓 억지의 글로써 올바른 이치를 빼앗으려 한 것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변계량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대(事大-힘의 논리를 앞세운 중국)하기를 아첨하려는 소인배들보다는, 차리리 예를 어길지라도 신(神-천지자연의 신)에게 아첨하려는 변계량을 더 군자로 여기고 싶다.

1418년(태종 18) 7월 1일에는 좌의정 박은을 보내어 원단(圓壇)에 제사지냈다. 원단은 제천(祭天)하는 곳인데, 가물면 나아가서 기우(祈雨)한다. 승도(僧徒)들을 흥복사(興福寺) · 연복사(演福寺) 에 모으고, 판수[盲人]는 명통사(明通寺)에 모아서 기우 정근(祈雨精勤)을 베풀고, 또 호랑이 머리를 박연(朴淵) 에 잠구었다. 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에도 환구제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조선조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의 환구제는 1456년(세조 2)에 일시적으로 제도화(制度化)하는 조치가 취해지기까지 네 번의 기록밖에 없다.

『상정고금례문(詳定古今禮文)』에 실려 있는 고려의 환구단을 참작하여 1457년(세조 3) 1월 15일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환구단(圜丘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世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가 삼헌을 행하였다.”하였다.

1464년(세조 10) 1월 15일에 “환구(圜丘)에 제사하였는데, 새로 만든 음악을 사용하였다.”하였는데, 이 환구제도 이때 실시된 여섯 번째의 제(祭)를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간섭 때문에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환구제를 설행(設行)하려 하였던 것이 기록상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문헌에 보이는 환단의 위치는 한강 서동(選) 또는 남교(南郊-남쪽 성 밖)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지금의 한남동 부근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1897년(고종 34) 9월 21일에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천지에 합제(合祭)하는 것은 사전(祀典)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환구단(圜丘壇)의 의제(儀制)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전에는 남쪽 교외에서 단지 풍운(風雲), 뇌우(雷雨)의 신들에게만 제사지냈는데 단유(壇壝)의 계급이 법도에 맞지 않았으니 밝게 섬기는 의절에서 볼 때 실로 미안합니다. 동지(冬至)절사의 제사를 그대로 거행할 수 없으니 앞으로 고쳐 쌓는 등의 절차에 대하여 폐하의 재가를 바랍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황지기신(皇地祗神)의 위판과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를 만드는 것과 제사에 쓰는 희생(犧牲), 변두(籩豆) 등의 여러 가지 의식에 관한 글들은 역대의 의례를 널리 상고하여 마땅히 일정한 규례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제사지내는 예절은 어느 것이나 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더구나 천지에 합제하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아뢴 것이 실로 짐의 뜻에 부합되니 경(卿)은 영선사장(營繕司長)과 함께 함께 지형을 보고 날짜를 골라서 제단을 쌓을 것이며 제반 예식에 관한 규정은 아뢴 대로 하되 다만 서울에 있는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들에게서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이후 장례원경 김규홍이 영선사장 이근명(李根命)과 함께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을 데리고 환구단(圜丘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니, 남서(南署)의 회현방(會賢坊) 소공동계(小公洞契)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이 길하다 하여 이곳을 정하였고, 위판(位版)과 종향 위패(從享位牌)를 만드는 일은 봉상시(奉常司)에서 맡아 근정전(勤政殿)에서 행하였다. 실로 1464년(세조 10) 이후로부터 433여년이 지난 1897년 10월 12일에 와서야 고종황제께서 우리나라가 천자국임을 천명(天命)하면서 환구단 천제(圜丘壇 天祭)를 복원하여 봉행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500여년이 훨씬 넘도록 우리민족은 중국을 사대(事大)하여야 하였고, 그 댓가는 혹독하게도 힘없는 나라의 설움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해마다 상국(上國-중국)에 갖다 바치는 조공(租貢-세금)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다. 언젠가 현대그룹의 총수인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소 1,000마리를 트럭에 나누어 싣고 북한으로 향하던 일을 떠올려 보라. 아마도 그 소떼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한해에 다른 품목과 함께 소 20,000마리씩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니 과히 상상이나 되겠는가? 차세대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1897년(광무 원년) 음력 9월 7일을 시역(始役)하는 날로 정하여 환구단(圜丘壇)을 조성하였고, 10월 11일에 완성하였다. 또 다른 종묘사직의 경우와 같이 환구단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기로 하고 제조(提調) 1인, 영(令) 1인, 참봉(參奉) 1인의 직제를 반포하여 명실공히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의식의 중요한 시설이 되었다.

 

1899년(광무 3)에 축조된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 건물은 3층 형태로 지어져 환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화강암의 기단위에 세워 중앙에는 황전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의 신위를 주신(主神)으로 봉안하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배향(配享)하였으며, 종향위(從享位)로는 대명지신(大明之神-햇님신)∙ 야명지신(夜明之神-달님신)∙ 사해지신(四海之神-동해, 남해, 서해, 북해)∙ 오악지신(五嶽之神-중악, 동악, 남악, 서악, 북악)∙ 북두칠성지신(北斗七星之神)∙ 목화토금수지신(木火土金水之神)∙ 이십팔수지신(二十八宿之神)∙ 주천성신지신(周天星辰之神)∙ 사독지신(四瀆之神-동독, 남독, 서독, 북독)∙ 오진지신(五鎭之神-중진, 동진, 남진, 서진, 북진)∙ 뢰사지신(雷師之神-천둥신)∙ 풍백지신(風伯之神-바람신)∙ 우사지신(雨師之神-비신)∙ 운사지신(雲師之神-구름신)의 위패를 각 각 봉안해 두었다.

 

1902년(광무 6)에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고(石鼓-돌로 만든 북) 3개가 황궁우의 오른쪽 앞에 세워져 있는데,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돌 북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청주에 있는 강민식 학예사에 의하여 이 돌북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돌북에다 조선의 역대왕에 대한 치적을 새기려고 하였으나 예산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새기질 못하고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고종황제께서 환구제를 복원하여 우리민족사의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업적으로 남기었으니, 비로소 우리민족의 자존감(自存感)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또다시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외세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1907년에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겼으며, 1910년에 이르러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으로 완전히 나라를 잃어 왕조의 문을 닫게 되었으니 기나긴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겪게 되었다.

 

 1910년에는 침략자인 일제에 의해서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를 폐위(廢位)하고 어린 13세의 영친왕(英親王)에게 황제의 위(皇位)를 잇게 하여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 이름하여 볼모를 잡아 일본으로 데리고 가 버렸다. 1926년에 순종효황제의 붕어(崩御)로 의민황태자는 창덕궁에서 즉위의식을 가진 이후 평생을 일제에서 보내다가 노년에서야 환국하여 훙서(薨逝)하니 그 뒤를 이어 구(玖) 황태손이 황위를 물려받았지만, 황태손마저 평생을 일제에서 살다가 아무도 없는 동경의 한 호텔방에서 쓸쓸한 생애를 마쳤으니 힘없는 우리민족사의 슬픔과 찢어지는 아픈 가슴을 어찌 말로서, 글로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그나마 황통(皇統)의 맥을 이어 현재 원 황사손(源 皇嗣孫)이 제 30대 황위를 이어가고 있으면서, 전통문화의 원형복원과 수호발전에 힘쓰는 제사장(祭司長)이 되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이끌고 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을 시행하면서 환구제를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1913년에는 우리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민족혼의 뿌리가 되는 환구단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일제의 철도노동자들이 먹고 자고 싸는 여관을 지어 성지(聖地)를 사창가처럼 만들어 버렸는데,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이 환구단 터가 삼성그룹의 소유가 되어버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으나 다만 등기부와 토지대장에 “공개불가”라는 낙인만 찍혀있을 뿐이다. 환구단내의 건축물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황궁우와 황궁우의 정문, 그리고 석고(돌북)과 2009년에 되찾아 온 환구단 정문이 전부이다.

이뿐 아니라 조선통감으로 있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은 고종태황제를 폐위시켜 이태왕(李太王)으로 강등하여 경운궁(慶運宮)으로 내 쫒으면서 궁궐이름마저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어버렸고, 정문인 대안문(大安門-국태민안의 뜻)도 편안할 안(安)을 빼고 중국 한나라 한(漢)을 넣어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중국의 속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담아 놓았다. 이와 같이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무참히도 짓밟힌 우리민족의 얼과 숨결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이는 국제정세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였던 황제의 책임도 없지 않다만, 그보다도 더 나라를 송두리 채 외세에 팔아먹은 조정의 대신들, 즉 친일파들이 더하였다.

1967년에 삼성은 환구단 자리에 들어서 있는 이 철도여관을 헐어내고 조선호텔을 세워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 주변의 환구단 부속문화재들은 크게 훼손되었고 환구단 정문도 이때쯤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황궁우의 시설물을 조선호텔의 정원으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근세사(近世史)에는 이러한 뼈아픔이 묻어나 있다.

2007년 4월 30일 정오가 되자 종묘의 영녕전(宗廟 永寧殿)과 정전(正殿)의 신문(神門)이 활짝 열렸다. 몇 사람의 제복(祭服)을 갖춘 제관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환구제의 복원을 고하는 고유제를 지내고 있었다. 사실 필자는 벌써 며칠 전부터 이 역사적인 중요성의 고유 행사를 여러 매체를 통하여 알림 글을 올렸으며,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일찍이 종묘에 들러서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의식을 지켜보던 필자의 가슴이 아련히 미어져 옴을 느꼈는데, 그것은 간간히 이 장면을 지켜보던 몇몇의 외국인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기와 제수를 준비하던 제례부 요원 4명과 사직대제봉행위원장 1명과 고유제의 의식을 올리는 제관 9명과 사진기사 1명, 그리고 필자를 포함하여 16명이 전부였다. 너무나 서글픈 생각이 든다. 명색이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인 문화재청이 주관하여 봉행하는 고유의식이 정녕 이러하였단 말인가? 이것이 소위 오늘날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관료들과, 국가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치인들의 시대정신인 것인가?

종묘를 나와 환구단으로 이동하여야 하는데 제복을 입은 채로 가야하건만, 문화재청은 고사하고 중구청에서 조차도 차량하나 지원해 주지 않았다. 일부는 제관 개인이 타고 온 차량과 일부는 택시를 이용하여 환구단까지 이동하였으나 거기에서도 실망을 주긴 마찬가지였다. 이 역사적인 환구단 위패 봉안의식을 중계방송은 해 주지 못할망정 방송국은 커녕 신문사 기자하나 보이질 않는다. 당시 TV 매스컴에서는 연일 모 재벌아비가 술집똘만이 몇명 뚜들겨 팬것을 가지고 몇날며칠로 톱뉴스로 떠들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이 봉안의식이 모든 이들에게는 하찮은 짓거리로 비추어지는 듯하여 매우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주관자인 문화재청 관계자는 물론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던 중구청 관계자 역시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는데, 그나마 성균관에서 나왔다는 한사람이 명함하나 내밀고 몇 마디 질문과 함께 취재하였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건대 그때그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성균관에서 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자체가 아직은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 셈이었다. 환구제의 의례복원을 사실상 그 해 가을에 봉행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복원되지 못하다가 이듬해에 와서야 비로소 봉행하게 되었다.

2007년 8월 22일자 KBS 9시 뉴스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특별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1967년 말경에 홀연히 사라졌던 환구단의 정문을 찾았다는 기사였는데, 서울시 우이동에 있는 한 호텔의 정문으로 쓰여지고 있다 하였다. 관계 전문가들이 현지를 답사하여 정밀조사를 벌여보니, 이 정문을 통해 대형관광버스들이 출입하면서 곳곳이 패여나가 훼손정도가 심각하다 하였다. 2년 동안 관계기관에서 협상을 벌인 끝에 이 정문을 매입하여 2009년 12월에 이곳 환구단 터로 옮겨오게 되었는데, 원래의 제자리로 복원되기는 불가능하였다.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기 때문인데, 부득이 황궁우 언덕 서쪽아래에 임시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보면 광장의 동쪽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지금은 거의 각 농성단체에서 불법으로 점거하여 농성장으로 변질되어 주변환경이 흉물스럽게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환구제가 폐지된 이후 장장 100년이 지난 2008년 11월 27일 현세사(現世史)에서는 처음으로 환구제가 복원되어 환구대제(圜丘大祭)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면서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이날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눈물겨운 자존감(自存感)을 회복한 날이었다. 환구제는 원래 동짓날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지내던 제사이므로 원칙상 원형을 복원한다 함은 동지(冬至)에 지내야 함이 마땅하나, 고종태황제의 대한제국 선포일과 433년만의 환구제의 복원이 이루어진 날이었던 10월 12일을 그 기념일로 삼아 매년 10월 12일을 제향일로 삼았다. 환구단의 황궁우는 1967년 7월 15일자로 국가사적 제157호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관계공무원이나 정치권력가들은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 정작 소중하고도 소중한 우리민족의 가치기준을 세우는 일에는 정녕 무관심한 것 같다. 위 그림은 황궁우로 들어가는 협문(夾門)인데, 출입문의 높이가 매우 낮다. 이는 황천상제를 비롯한 신위를 모신 곳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모든 이는 고개를 숙이라는 뜻에서 처음부터 낮게 지었다 한다.

 

100년만의 환구제가 복원되던 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우리민족의 자존감(自存感)을 되찾아 새롭게 세우려 하던 날, 황궁우의 남문은 개방하였지만 동문과 서문은 개방하지 못한다 하였다. 제사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촛불은 물론 향도 피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오직 화재위험 때문이라 하였다. 어찌 국가기관에서 무지해도 이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하여 강력히 항의도 하였지만 처음엔 소용이 없었다. 관리기관인 중구청의 고위관료를 설득한 끝에 시설물의 창문개방과 촛불을 켤 수 있었고, 신(神)을 불러 내리는 의식의 향도 피울 수 있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올해에는 그래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져 있는듯하여 매우 다행하였다. 위 그림은 당시 처음으로 환구제를 복원한 후에 황사손을 중심으로 제관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필자이다.

이후 2009년에 이어 2010년 그리고 올해 2011년 10월 12일에도 어김없이 황사손(皇嗣孫)이 제사장(祭司長)을 맡아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여러 신들에게 제사하였는데, 올해로 그 네 번째의 대제(大祭)였다. 그러나 현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의례부분(儀禮部分)만 일부 복원되었기에 앞으로 완전한 복원의 환구제는 갈 길이 매우 멀다. 환구제례악(圜丘祭禮樂)의 복원과 환구일무(圜丘佾舞)의 복원이 그것이다. 우선 환구단 터인 조선호텔을 매입하여 옛 원형으로 환구단을 복원하여야만 제례악과 일무의 복원이 동시에 가능하다. 다행히도 몇 년 전부터 정부측과 삼성측간의 부지매입 협상에 들어가 현재 진행형으로 있는 것으로 사료되나 엄청난 매입비용도 문제가 될듯하다. 대략의 비용이 4,000억 정도가 소요될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있고 보니 염려하는 바는 크지만, 그래도 삼성측이 일제의 철도여관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거래내역을 공개불가라는 대외비로 규정하였다는 자체가 매우 의심되는 바가 있으므로 지금이라도 이를 명명백백히 공개하였으면 한다. 만약에 이 과정에서 의혹이 있었다면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환구단 터를 국민들 품으로 돌려주었으면 한다. 아울러 이왕이면 옛 원형을 복원하여 같이 돌려준다면 그야말로 삼성측은 두고두고 국민들의 입으로 회자(膾炙)되면서 그 용기와 결단을 칭찬받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만큼 환구단은 우리민족사에 있어서 역사적인 값진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서나마 삼성그룹측의 위대한 결단을 촉구해보는 바이다. [제2부 끝]

[제3부] 100년만에 되찾은 우리의 자존심 제천의례(祭天儀禮)

[成均館 首善志 명예기자 이효재(기사제보 lee-hyo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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