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소(司馬所)
소재지 : 경주시 교동 89~1번지(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호 지정)
건립자 : 사마시 합격 회원(司馬試合格會員)
건립연도 : 1741년 중건
사마소는 연계소(蓮桂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를 달리 연방(蓮榜)이라 하고, 문과를 계방(桂榜)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곧 사마소는 대소과(大小科)의 급제자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이다. 사마소의 건립 배경은 여러 학설이 있다. 조선 전기 유향소의 혁파에 따라 새로운 향촌 교화의 필요성에 의한 설립했다는 설과 성균관 분번거재(分番居齋)의 유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지방 분설의 의미를 담았다는 설이 있다. 임란 이전 경주에 사마소가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었다. 임란 이후 사마방에 오른 선비들은 향풍(鄕風)에 힘을 쓰며 유식(遊息)할 데가 없어서 아쉬워했었다. 영조 17년(1741) 마침내 진사 이덕록(李德祿)과 손경걸(孫景杰) 등의 노력에 의해 사마소를 중건하였다. 기문은 영조 43년(1767) 류의 건이 지었다.
1930년대에 출간된 『경주읍지』. 『동경통지』, 『금오승람』등 3종의 지리서가 있다. 이들 책에 실린 연계안의 명안을 보면 인원의 수가 조금씩 다르다. 현종 10년(1669)에 편찬한 『동경잡기』에는 문과 15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30년에 펴 낸 기록을 보면 『경주읍지』66명,『동경통지』72명, 『금오승람』64명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74명이지만, 3종 지리서 모두 수록된 사람은 63명이다. 또한 사마시에 오른 사람은 240명이다. 물론 이 숫자는 소과대과에 모두 합격했을 경우 한 사람만 계산한 것이다. 대과 합격자 74명 중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15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유학(幼學)으로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5백 년간 실시한 과거 시험에서 경주지역 인사들의 합격자이다.
현종 10년(1669) 편찬된 『동경잡기』를 보면 태조 2년(1393) 경주의 최초문과 합격자 최예(崔芮)에서부터 효종 8년(1658) 이구징(李耉徵)에 이르기까지 264년 간 급제자는 15명에 불과하였다. 숙종 25년(1699)에 임화세(任華世)가 문과에 급제한 후 42년이 지난 영조 17년(1741)에 남만제(南萬濟)와 박두상(朴斗相)이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대를 내려올수록 점차 인원이 늘어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배출자를 탄생시켰고 갑오년(1984)에는 진사 15명을 한꺼번에 배출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사마시 합격자의 240명을 연대별로 분석하면 1400년대 14명, 1500년대 43명, 1600년대 34명, 1700년대 55명, 1800년대 94명이 합격하였다. 문과 합격자 74명을 성씨별로 보면 여주이씨 21명, 경주이씨 8명, 경주손씨와 경주최씨가 각각 7명, 경주김씨 6명, 영양남씨 4명, 안동권씨와 밀양박씨가 각각 3명 등이다. 조선 전기에는 다양한 성씨에서 급제자가 나왔으나 후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문벌 중심으로 배출되었음이 특징이다.
사마소는 반월성 서쪽 월정교 북단에 있었다. 향교와 계림을 지척의 거리를 두고 있는 사마소는 풍광이 뛰어났다. 과거의 동방(同榜) 급제자들은 흔히 망년(忘年)이라 불렀다. 곧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교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마소의 좁은 공간에 노소가 한데 어울러 지내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마침내 순조 32년(1832) 이정기(李鼎基)등이 중심이 되어서 사마소 경내 서편에 작은 별옥(別屋)을 지어서 병촉헌(炳燭軒)이라 하고, 급제자 가운데 노유(老儒)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이때 최기영(崔祈永)이 내남에서 교촌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만석의 부를 지녔고 뒷날 이른바 9대 진사를 배출하는 터전을 닦았다. 따라서 사마소와 병촉헌에는 최씨들의 출입이 잦았고, 또한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건물을 관리하였다. 병촉헌은 고종 27년(1890) 최기영의 손자 최만선(崔晩善)이 중건하고 기문을 지었다. 1933년 최준(崔浚)이 다시 보수하고 최현필이 중수기를 남겼는데, 당시 사마소와 경주향교는 최씨 집안에서 전액 부담하여 중수하였던 것이다.
사마소의 편액 ‘사마소(司馬所)’는 영조 38년(1762) 부윤 홍양호(洪良浩)가 쓴 글씨다. 1925년 진사 손진섭(孫晉燮)이 주간하여 사마소의 남은 자산으로 노후된 건물을 중수하고, 최현필이 중수기문을 지었다. 1961년 최숙이 사마소 유지회를 조직하여 연계안 문중별로 모금된 헌성금으로 건물을 다시 보수하였다. 1975년 오양, 이인식, 손국호, 김형진 등의 고을 선비들이 인륜 도덕을 세우기 위해 『규약십칙(規約十則)』을 제시하고 정풍회(整風會)를 조직하였다. 1980년 경주시에서 다시 보수하였다. 사마소는 본래 교동 48번에 있었으나, 1984년 월정교발굴과 반월성공원화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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