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 사학자 와코대 명예교수 임나일본부설 뒤흔든 발표로 한일 사학계 논쟁 일으켜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 교수는 메이지(明治)대 사학부를 졸업하고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대학에서 한일 고대사를 연구·강의하는 한편 계간 ‘삼천리’ 편집장으로서 한국의 문화·역사를 알리고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상을 고발했다.
이 교수는 특히 일본 메이지시대 육참본부 사코 가네노부 대위가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한 뒤 입수했다는 탁본과 그 후에 나온 수십종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비교·대조해 일본 군부가 광개토대왕비 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한일 사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일제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훼손된 부분에 석회를 바르고 새로운 글자를 새겨 넣어 비문을 변조했으며, 일본 사학계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도 역사를 왜곡했다는 내용이었다.
1972년 이 같은 주장을 담은 그의 논문 ‘광개토왕릉 비문의 수수께끼’가 발표되자 한일 사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 교수는 또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검증을 통해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서기 4세기 후반 한반도를 공격해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고 2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뿌리째 뒤흔들어 이후 한일 사학계에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이 교수는 부인과 함께 조총련계로 출발했다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학자로도 잘 알려졌다. 이 교수는 조총련계 학교인 조선고등학교와 조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71년 조선대학을 사직했다. 첫 저술인 ‘조선문화와 일본’을 두고, 조총련계가 무자비한 ‘사상비판’은 물론 출판을 저지하려고 나섰던 것. 시달리던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조총련과도 결별한 후,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재일교포 2세로 8세 연하인 그의 부인 오문자씨도 조총련계로 출발했다. 조총련 간부로 활동하다 북한 방문 후 환멸을 느껴 북한 체제를 고발하는 책을 출판한 아버지와 10년간 연락도 끊고 지낼 만큼 오씨 역시 사상성이 투철했던 인물. 그러나 남편과 함께 사상적으로 전향한 그녀는 훗날 ‘아버님, 죄송합니다’라는 자전 에세이를 펴내기도 했다. 이 교수는 저서로 ‘조선 문화와 일본’ ‘광개토왕릉비의 연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와 자신의 삶과 한일 현대사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해협’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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