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가 흔히 한시(漢詩)라고 부르는 한자를 매체로 한 동아시아 고전시가는 고전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서 가장 많은 작품이 전승되고 있는 장르이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한시는 지식인으로서 의당 갖추어야 할 필수교양이었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사회에 이르러 한시는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일반 교양인들에게는 낯선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런 한시가 사실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단위로 하여 구성되어 있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 형식이었다. 이미지란 말에 상응하는 동아시아 고전비평 용어가 바로 '의상'(意象)이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를 현대 서구시학으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라고 알고 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이에 관한 사고는 동아시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상(象)을 세워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표현한다"(立象以盡意)란 사고로부터 비롯한 언어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형상표현의 가치에 대한 옹호가 그것이다. 중국 시가문학사에서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의상'의 창조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 책은 천즈어(陳植鍔, 1947~94)의 <중국시가의 이미지>를 완역한 것이다. 이 책은 중국사회과학원이 21세기 새로운 문예이론의 개척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획한 '문예신학문총서'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의상 방면의 최고 연구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서문
머리말
1. 의상의 연원
2. 의상의 정의
3. 의상과 기호
4. 의상의 조합(상)
5. 의상의 조합(하)
6. 의상의 분류
7. 의상의 첫 번째 예술적 특징: 주관적 비유
8. 의상의 두 번째 예술적 특징: 전대에서 후대로의 계승
9. 의상의 세 번째 예술적 특징: 다양한 의미와 해석의 개방성
10. 의상 통계 연구의 몇 가지 예
11. 의상을 중심으로 한 시 해석의 예들
12. 의상의 미학적 의미와 문화와의 정합성
13. 의상의 갱신과 시가의 발전(상)
14. 의상의 갱신과 시가의 발전(하)
역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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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상(象)을 세워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표현한다.”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마음속에 떠오른 대나무[胸中之竹]는 결코 눈에 보이는 대나무[眼中之竹]는 아니다.”
★ 정판교(鄭板橋), 「제화 죽」(題畵 竹)
“석양과 방초는 평범한 물상이나 능히 쓸 줄 알면 다 절묘한 말이 된다.”
★ 원매(袁枚), 「견흥」(遣興)
“시에는 세 가지 격(格)이 있다. 첫 번째를 생사(生思)라 한다. 오랫동안 정밀하게 생각하여도 의상(意象)과 맞지 않으면 힘은 다하고 지혜는 고갈되고 만다. 생각을 편안히 놓아두고 마음이 우연히 경계[境]에 조응되면 어느새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感思)라 하니, 옛말을 음미하고 옛 작품을 읊조려보면 이에 감동되어 생각이 나오게 된다. 세 번째는 취사(取思)라 하니, 물상[象]에서 찾아보고 마음이 경계[境]로 들어가 정신이 대상물을 만나면 마음으로부터 얻어지게 된다.”
★ 왕창령(王昌齡), 『시격』(詩格)
상(象)을 세워 뜻(意)을 표현한다
우리가 흔히 한시(漢詩)라고 부르는 한자를 매체로 한 동아시아 고전시가는 고전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서 가장 많은 작품이 전승되고 있는 장르이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한시는 지식인으로서 의당 갖추어야 할 필수교양이었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사회에 이르러 한시는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일반 교양인들에게는 낯선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런 한시가 사실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단위로 하여 구성되어 있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 형식이었다. 이미지란 말에 상응하는 동아시아 고전비평 용어가 바로 ‘의상’(意象)이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를 현대 서구시학으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라고 알고 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이에 관한 사고는 동아시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상(象)을 세워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표현한다”(立象以盡意)란 사고로부터 비롯한 언어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형상표현의 가치에 대한 옹호가 그것이다.
의상의 창조는 좋은 시의 필수 조건
중국 시가문학사에서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의상’의 창조를 매우 중요시했다. 당대(唐代) 사공도(司空圖)는 「여극포서」(與極浦書)에서 의상에 대한 탁견으로, ‘상 밖의 상’(象外之象)과 ‘경 밖의 경’(景外之景)이라 하여, 객관적 실상 외에 작품 안에 존재하면서 독자의 상상 속에 재현되는 허상을 말했다. 송대 소동파(蘇東坡)와 청대 정판교(鄭板橋)는 ‘보이는 대나무’ 이면의 ‘마음속의 대나무’(胸中之竹)를 말했다. 청대 시인이자 시론가인 원매(袁枚)는 「견흥」(遣興)이라는 시에서 “단지 즐겨 시를 구한다고 좋은 시가 나오랴, 영험한 무소뿔의 흰줄처럼 통하는 마음이 나의 스승이라네. 석양과 방초는 평범한 물상이나 능히 쓸 줄 알면 다 절묘한 말이 된다”라고 했다. 북송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은 당시의 형식주의적인 시풍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굴원(屈原)은 「이소」(離騷)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슬퍼했네. 세상에 분노하고 사특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초목과 벌레에 부쳐서 말했지.” 이것은 모두 의상을 염두에 둔 지적이며, 의상의 운용을 통하여 비로소 형태와 정신이 겸비된 예술의 절묘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학자 천즈어, 중국시가 의상에 관한 그의 선구적 저술
이 책은 천즈어(陳植鍔, 1947~94)의 『중국시가의 이미지』(원제: 詩歌意象論?微觀詩史初探)를 완역한 것이다. 이 책은 중국사회과학원이 21세기 새로운 문예이론의 개척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획한 ‘문예신학문총서’의 하나로 출판되었고,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의상 방면의 최고 연구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학계에서 의상 연구는 1980년 무렵 시작되어 90년대에 본격화되었고, 2000년대 이후엔 가히 열풍이라고 할 만한 연구 붐을 이루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가 의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무렵이었고, 이 책의 대강이 완성된 시기 역시 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는 첸중수(錢鍾書)의 제자인 민쩌(敏澤)나 현재 대륙학계 최고의 중국시가 연구자인 위안싱페이(袁行?;)보다 앞선 것이다.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저자의 생년이 이 두 대가보다 훨씬 뒤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 가진 선각적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더구나 민쩌나 위안싱페이의 글이 단편 논문인 반면, 이 책은 의상을 주제로 한 방대한 분량의 전문 저작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저명한 송사(宋史) 연구자인 쉬구이(徐規)는 저자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뜨자(46세) “근래 보기 드문 인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문학과 사학계에 큰 손실”이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500수 이상 방대한 작품 망라, 중국 고전시가 그 매혹적 이미지의 세계로
천즈어는 이 책에서 중국 고전시가가 의상을 기본단위로 이루어진 미적 구조물이란 독창적인 가설을 가지고 출발한다. 생명체가 세포로 구성된 유기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가는 의상을 기본단위로 만들어진 하나의 유기체적 존재란 관점에서 중국시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전까지의 작가를 단위로 한 문학사 서술과 달리, 특정 의상이 어떻게 계승·변주되는가를 중심으로 유구한 중국 시가문학의 발전과정을 통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의상이 시대별로 어떻게 새로운 의미망을 확보해서 문학적 가치를 획득하는가를 밝히고, 유기체적 관점에서 시가 의상의 생성·발전·소멸의 과정을 구명하고 있다. 단행서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많은 인용 작품과 비평문을 점점이 배치하고 있으며, 마치 책의 서술방식마저도 이미지적 글쓰기를 시도한 것같이 보일 정도다. 원서에는 구체적 설명 없이 저자 자신의 동서양을 넘나드는 광박한 지식과 고전시가 전반에 관한 폭넓은 식견이 종횡무진 펼쳐진다. 인용된 작품은 시가작품이 1,500수 이상이고 기타 예문도 200편 이상일 정도로 방대하다. 그야말로 중국 고전시가 전반을 텍스트로 하여, 그 매혹적 이미지들에 대한 과감한 모험을 시도한다.
충실한 역주, 철저한 교감, 친절한 시각자료 … 원서 이상의 번역서
역자의 노력으로 한국어판인 이 책은 더욱 가치를 발하고 있다. 인용시문을 옮기는 데 있어서도 독자가 번역서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총 2,000여 개의 상세한 역자주를 덧붙였다. 여기에는 시 내용에 대한 주석은 물론 원문에 대한 철저한 교감도 포함되었다. 방대한 분량의 인용문에 대한 오탈자 교정은 물론, 판본(版本) 혹은 초본(抄本)에 따라 달라지는 내용도 일일이 확인하여 주석을 달았다. 시를 단구(斷句)로 발췌 인용한 경우도 인용 부분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전문을 주석에 밝혀두었다. 또 한시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는, 문자적 설명만으로는 시각적 감각에 대한 갈증을 풀기 어렵다고 보아 시가 의상의 특성에 맞는 관련 도판을 역대의 화보(畵譜)와 시의도(詩意圖) 속에서 찾아 첨부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원서에 없는 자료까지 포괄한, 어쩌면 원서 이상의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옛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중국 고전시가의 전통
과거 시인들의 창작을 이끌어낸 문학관념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의 창작방식엔 총결할 만한 어떤 예술적 규칙과 특징이 있었던 것일까? 고대의 문예이론가들은 이미 이론적으로 이를 인식하고 개괄하였을까? 이와 같은 물음이 저자가 의상이론을 탐구하게 된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부단히 “속된 것으로써 우아한 것을 만들고”(以俗爲雅), “옛것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以故爲新)온 3천년 중국 고전시가의 의상 창조의 정신을 읽어내며, 그것의 변화?발전의 역사를 종관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풍이 장차 역사가 유구한 중국 고전시가 전통이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루어가기를 바라며, 청대 시인 조익(趙翼)의 「논시」(論詩)의 다음 구절처럼 오늘의 탁월한 시인의 출현을 바라마지 않는다.
“이백과 두보의 시편은 수많은 사람의 입에 전송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이미 신선하지 못하게 느껴지는구나. 세상엔 시대마다 재능 있는 시인 나와서, 저마다의 『시경』과 『초사』 써서 수백 년 이끌고 나간다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