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100년 기초학문책 지킴이
130년전 문익점 18대손 터잡은 세거지
‘수봉’ 문영박 1910년 나라 잃은 뒤
팔도·중국 산재한 역사서·문집 20년간 모아
후손들 20세기 한국학 더해 2만5000권 빼곡
안과 밖 / 달성 인흥마을 남평 문씨 문중문고
택시기사는 마을을 등지고 사진을 찍어달랬다. 천내천 길에서 굽돌이 길 끝 한옥촌이 조춘 매화향 가운데 고즈넉했다. 행정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402번지. 비슬산 북편자락 서남향의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다.
문익점의 18대손이자 대구 입향조 문세근의 9대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74)가 61살(1872년)에 집을 짓기 시작했으니 130년쯤 된 마을이다. 그 후손 수봉 문영박(1880~1930) 아들들이 분가해 한 동네를 이루면서 1만평에 아홉 살림집과 두 재실(수봉정사, 광거당)이 들어섰다. 키를 넘는 흙담 뒤로 살림집들은 문을 잠갔고 남정네 서넛이 겨우내 약해진 토담을 고치고 있었다.
“72년 전 1935년에 ‘장안 3재’ 중 한명인 김태준이 여기를 다녀가서 기행문을 쓴 적이 있어요. 영남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문집류가 그 목록에 실은 것만 193종이니 기호 본위로 모은 규장각도서관, 이왕직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 목록에서 보지 못한 것이 상당수 있다고.”
인터넷 시대에 이곳까지 찾아온 젊은이(?)가 대견해서일까, 이곳 문중문고 지킴이인 문태갑(78)씨가 선뜻 ‘인수문고’ 문을 열었다. 겨우내 고인 찬기운이 후르륵 빠져나갔다.
문고의 규모는 1095종 6948책. 경(經) 536책, 사(史) 1813책, 자(子) 588책, 집(集) 4011책이다. 개인 문집인 집부(60%)가 가장 많고 사, 자, 경 순이다.(1975년 조사 결과) 근자에 나온 문집, 전적류 1000책과 집안의 개인 장서 600책을 더해 모두 8500책 정도로 추정된다.
갈색 오동나무 상자가 서가에 가지런하고 개개 뚜껑에는 속에 든 책이름과 책수가 적혔다. 뚜껑을 열자 좀약 냄새. 한적이 두 줄로 차곡차곡 가로 뉘어 있다. 두께에 따라 30~40책이 들어간다. 76책인 <강목(綱目)>은 두 상자에 나뉘어 담겼다. 어떤 책은 방금 인출해 묶어내 먹이 묻어날 듯하고 어떤 책은 몇 손을 거친 듯 낭창낭창하다. 책밑에 서목과 권수를 적어두었고 미처 그렇지 못한 것은 한지 꼬리표를 달아 서로 구분했다.
100년 전 수봉 선생이 지은 광거당의 전경.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
이 책들은 누가, 왜, 어떻게 해서 달성군의 한 동네에 모셔지게 된 걸까.
독립운동 혐의로 잡혀가 고초도
문고를 만든 이는 문영박. 호는 수봉(壽峰) 또는 수백당(守白堂), 자는 장지(章之)다. 서른 즈음인 1910년부터 타계한 30년 직전까지 20여년에 걸쳐 모아들인 것이다. 수봉은 허미수를 이은 남인 계열로 치주 손정은, 만구 이종기한테 배우고, 심재 조긍섭, 근재 정지순, 다곡 이기로, 백괴 우하구, 소암 김현동 등 거유들과 어울렸다. 일찌기 국토를 순례하며 견문을 넓히고 1910년 따로 광거당을 지어 만권당을 두었다. 그곳에서 매일 5~6명의 유림이 모여 필요한 책 목록을 만들고 하나하나 사들였다. 대구시내는 물론 서울을 수시로 다니며 직접 책을 구입하고 중국 쪽에서는 창강 김택영(1850~1927)의 도움을 받았다. 사학자인 창강은 당시 중국에 망명해 양쯔강 하류 난퉁에서 출판소 일을 거들고 있었다. 배로 목포까지 실어온 책은 다시 달구지로 여러 차례 인흥으로 끄들였다.
거질의 <이십오사>, <강목>, <십삼경주소> 등이 낙질없고 <성호집>, <면암집>, <매헌집>, <학호집> 등 개인문집 사이에 <임충민공실기>도 끼어 있다.
그는 <약산만고>, <대산실기>, <결송장보>, <만성집> 등을 협찬 간행했다. 서고 한켠에는 금세 찍고 꽂은 듯 잔먹이 흔연한 목판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남긴 글모음 <수봉유고>를 보면, 그는 29년 봄 옛 것을 지키고 집안에 먼뎃손님이 드나듦이 많은 까닭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구금돼 신문을 받은 적이 있으며 대구시의 한 서점에서 서점주인과 식사 중 검사국에 소환돼 조사받기도 했다. 또 서른살이나 차이가 나는 창강과 망년지교로 창강이 중국에서 간행한 <열하일기>의 발(跋)을 썼다. 비밀문서라고 내놓으며 상해 임정을 빙자해 겁박하려는 자를 물린 사례가 있어 수봉은 임정 사정을 잘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행장’ ‘가전’). <독립유공자공훈록>은 그가 19년 임정수립부터 31년 만주사변 한 해 전 별세하기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임정에 군자금을 전해 주었다고 적었다.
국권 회복 대비해 사 모은 듯
1930년 당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수봉이 타계하자 군자금 지원 등 독립운동 공로를 기려 보내준 ‘특발문’ |
“귀중한 것 하나 보여줄까요?” 문태갑씨는 비닐봉지에서 액자를 꺼냈다. 비단에 인쇄한 ‘추조문’과 ‘특발문’. 임시정부가 30년 12월 그가 죽자 임정 경상도 책임자 이교재를 통해 보낸 것이다. 이교재는 이를 전달하지 못한 채 체포돼 옥사했으나 50년 집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돼 후손에게 전달됐다. 수봉을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 기리고 ‘임정에 의연금을 보내주어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임정이 이토록 기린 것은 군자금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았겠는가. 문씨의 추측이다.
‘무엇’이란 다름 아닌 역사의식이 아닐까. 희귀 진귀본이 아닌 역사서와 문집을 사모아 길이 전한 것은 국망산하재 하니 언젠가 회복할 나라에 다시 필요할 터, 이에 이바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가 문고를 직접 언급한 적이 없어 추정할 따름이다.
‘횡령한 후손은 출입금지’ 규약
‘광거당 전수규약’을 보면 △독서와 학문을 하루도 폐하지 말 것 △책을 열람할 제 더럽히거나 찢지 말 것 △가벼이 빌려주지 말며 빌려줄 때는 반드시 적어둬 돌려받을 것 △7월 초에 한차례 햇볕을 쬐어 좀과 습기를 막을 것 등을 지시하여 세전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자손 중 한 권 책, 한 뼘 땅, 푼돈, 한 말 곡이라도 공물을 횡령한 자는 본당 출입을 금한다며 공사를 분명히하고 있다.
이 책들은 광거당 다락에서 10월 대구폭동과 한국전쟁을 온전히 버텼다. 그 와중에 백여점의 서화는 흩어졌다. 문씨는 가는 새끼로 친친 동여매 우물에 넣어 보관했다가 두어 달 뒤에 꺼낸 화첩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물먹은 먹그림은 그대로인데 낙관은 겹친 종이에 번졌더란다. 후손들은 82년 정부 보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고를 따로 짓고 인수문고 현판을 달아, 70년부터 광거당과 수봉정사의 책을 합쳐 존안각에 보관해 오던 것을 옮겨왔다. 몇해 전에는 경인문화사에서 내려와 석 달간 머물며 문집 100여종과 상당량의 문헌을 영인해 갔다. 책에 손상이 가지만 나눔으로써 이바지한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응했다.
“인수문고의 정신 그대로 기초학문에 꼭 필요한 20세기 책들을 모았어요.” 93년 5천여권의 ‘중곡서고’를 인수문고에 이어붙인 문태갑씨는 수봉의 둘째아들 진채(1906~90)의 둘째. 인수문고를 바탕으로 학자가 되려했으나 여의치 않아 언론계, 정관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와중에 “인수문고를 보첨할” 한국학 기본자료를 모았다. 한국사 네질(조선총독부, 진단학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길사), 각종 지리지, 유명인사 자서전, <역사학보>, <과학사상>, <한국학보> 등 주요잡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사대계> 등 백과사전류, 한국문학·예술·역사 연구서.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주요서적들이다. 홍명희-홍기문-홍석중 3대의 책, 북한판 <조선통사>(국내인쇄본)가 눈에 띈다.
중곡서고 건물은 인수문고 왼편에 그보다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 읍하듯이 서 있다. 인수문고 책들이 오동상자에 누운 반면 중곡서고 책들은 유리장 안에 세로로 꽂혔다.
이상이 19세기 서책이 흠없이 보관돼 온데다 20세기 책을 더해 기적처럼 명맥을 이어온 문씨네 문중문고의 소종래(내력)와 소이연(까닭)이다.
혹여 좀약이 책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대학 한문학과와 결연해 한 해 한 차례 포쇄를 하려고 했어요. 학생들이 원본을 만져보는 기회도 될 것이라며 좋다고 하고는 연락이 없더군요.” 문씨는 또 “구경 온 전공자 가운데 원본을 들춰보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늙은 회화나무를 에돌아 수봉정사 뒷길로 빠지면 광거당. 본디 만권서가 있던 자리다. 유자들의 두런거림 대신 울처럼 두른 대숲에서 쏴아, 바람이 일었다. 엄습하는 쓸쓸함. 이곳에서 사극을 찍었다던가. 경사자집은 위패처럼 모셔지고 현금 한국학 책은 트로피처럼 갇혀 예와 지금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닌지….
다시 마을 앞 소나무군락과 조산무더기, 애잔한 신라 고탑. 3대 100년에 걸쳐 장관을 이룬 문중문고는 매향에 잠기고 또 한 명의 나그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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