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굴어당의 한시.논어.맹자

http:··blog.daum.net·k2gim·

선정의 상징 성균관의 팥배나무 역사에서 사라지다

굴어당 2010. 6. 23. 01:00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 = img_resize; function img_resize(){ // 이미지 사이즈 조절. if (document.attach_img1.width > document.target_img.width) { document.attach_img1.width = document.target_img.width; } }
   
 

 

<사진: 유교신문 김치윤 기자>

명륜당 팥배나무에 대한 감상

 

蔽芾甘棠을 勿翦勿伐하라 召伯所茇이니라

蔽芾甘棠을 勿翦勿敗하라 召伯所憩니라

蔽芾甘棠을 勿翦勿拜하라 召伯所說[세]니라

무성한 팥배나무[甘棠]를 자르지도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지내셨던 곳이니라.

무성한 팥배나무[甘棠]를 자르지도 꺾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셨던 곳이니라.

무성한 팥배나무[甘棠]를 자르지도 휘지도 말라. 소백께서 머무셨던 곳이니라.

위의 시는 『시경』소남에 나오는 팥배나무[甘棠]라는 시로 소백(召伯)이 남국을 순행하면서 선정을 펼 적에 혹 감당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베풀고 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아껴서 차마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주나라를 둘로 나눠 동쪽을 주공이 다스리고> 소공이 서쪽을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매우 화목하게 되었다.

소공이 향촌과 고을을 순시할 때에 팥배나무를 심어놓고 그 나무 아래서 송사를 판결하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후()와 백()에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적재적소에 일을 맡겨서 실직자가 없었다. 소공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소공의 정치를 생각하여 팥배나무를 사모하며 감히 베지 못하도록 하고 노래하여 읊고 감당의 시를 지었다.” (『사기』 《燕召公世家》)

(중략 召公之治西方,甚得兆民和。召公巡行鄉邑,有棠樹,決獄政事其下,自侯伯至庶人各得其所,無失職者。召公卒,而民人思召公之政,懷棠樹不敢伐,哥詠之,作甘棠之詩。) 

소공은 성(姓)은 희(姬), 이름은 석(奭)으로 주공(周公)과 함께 주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고, 연(燕)나라에 봉해진 연나라의 시조이다. 특히 주문왕(周文王) 때부터 강왕(康王) 때까지 4대에 걸쳐 선정을 베풀어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유명하며, 돌아가신 후에 그의 선정을 기려 팥배나무를 심었으며, 이후로 어진 정치를 한 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지애(甘棠之愛)또는 감당유애(甘棠遺愛)라고 한다. 

선현들께서 위와 같은 전거에 의하여 심어놓은 팥배나무가 이달 28일 잘려 나갔다. 2008년까지도 봄에는 하얀 꽃과 가을에는 붉은 열매로 많은 벌 나비와 새들이 노닐었던 수세(樹勢) 왕성하던 나무였다. 명륜당 은행나무 앞에 자리했던 이 나무가 갑자기 말라죽은 것은 대성전 내에 방범장치 및 소화 장치 등을 설치하면서 나무 밑을 무분별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선정(善政)을 상징하며 300여년의 성상을 문묘와 함께했던 팥배나무는 후손들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로 인하여 마침내 문묘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문묘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후손의 손길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