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박물관에서 만나는 실학 이야기2
송용진
2010.03.22 15:05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이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이수광은 이 책 서문에 “우리나라는 예의로써 중국에 알려진 선비가 많지만 전기가 없고 찾을 만한 문헌이 적은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평소에 기록하여 모은 것”이라고 했다.
여기엔 천문?지리 등 다양한 분야를 설명되어있고 그밖에 마테오 리치의〈천주실의〉를 이용하여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을 소개했으며 세계 지형과 풍물 문화 예를 들면 중국, 일본은 물론 베트남, 타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프랑스, 영국까지 소개했는데 영국에 대해서는 당시 함대가 최강이며 기계로 작동되는 철로 만든 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봉유설 소개된 대부분의 항목들에는 다양한 내용과 비평 또 관련된 사례나 증거등을 붙이고 있어 그의 실학사상이 모두 나타나있다. 책이 쓰여진 때가 지금으로부터 400년전이다. 중국 일본 외에는 세계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우물 안 조선에서 이런 내용의 책을 소개했다는 것은 실학서로서 그 선구적 매우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성호사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이 쓴 책이다. 여기서 성호는 이익의 호이고, '사설'의 '사'(僿)는 “자질구레하다”는 뜻으로 이익 자신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붙인 책이름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학문을 하면서 생각나고 의심 나는 것을 적어두었던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기록해둔 것들을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것이다. 성호사설은 총 5가지로 분류(문)되어 총 3,007항목의 글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첫번째 “천지문”이다. 천문과 지리에 관한 서술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천문지식을 바탕으로 해와 달, 별, 바람, 비, 조수 등에 대해서 논술하고 있다. 그가 특히 관심을 두었던 지리편은 우리나라 역사지리의 고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을 비롯하여 삼한.한사군등 우리나라 낙동강, 두만강등 강 주변과 관련되는 지리고증에 관한 많은 기술이 실려있어 조선의 민족주의가 잘 나타나있다.
두번째는 “만물문”으로 그가 사물에 대한 해박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생활에 직접,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을 대하면서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을 분류하지 않은 채로 수록했다. 주로 옷이나 음식, 농상, 가축 등에 관한 것들이며 이외에도 꽃, 새, 돈, 음악 등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세번째 “인사문”에는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사건 인물 그리고 혼인관계와 제례에 관련된 것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익은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전면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관련제도의 개편, 과거제도의 문제점, 서얼차별의 폐지(서얼: 본 부인이 아닌 딴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 노비신분 세습제의 폐지를 주장했고 경제적으로는 토지소유의 제한, 토지에 대한 정확한 측정 및 호구조사의 실시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불교, 도교 등 이단과 민간신앙 그리고 혼인, 상제에 대한 습속의 비판 등이 실려 있다.
네번째 경사문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대 경서(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 특히 역사 또 관련 인물 제도 등을 논평한 것이다. 그가 이처럼 옛 조상들의 글과 사사을 연구하는 것은 다른 것 보다는 어떻게 이를 활용해 실생활에 사용하느냐 였다. 마지막으로 “시문문”은 중국 문인과 우리나라 문인의 시와 문장에 대한 평이 실려있다
이 성호사설은 옛 조상들의 글을 읽고 연구하고 이를 실제로 사용한다는 실학의 대가 이익의 사상을 연구하는 기본적인 자료임과 동시에 고대에서 조선 후기까지 중국과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리, 풍속, 사상, 역사 및 당시 전래된 서학과 풍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어서 하나의 백과사전적 전서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택리지 1751년에 이중환(1690~1752)이 저술한 인문지리서이다. 이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이익이나 정약용 등의 실학자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아 잠깐 소개해 본다.
우선 그가 꿈꾸는 마을은 “농촌지역이면서 어촌과 상업이 지리적으로 교류 할 수 있는 곳, 그래서 그들 스스로 잘 먹고 잘입는 마을”이었다. 그는 이익의 사상을 이어받아 백성들의 처한 현실속의 실학을 추구했다.
그는 원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사대부와 양민의 차이는 단지벼슬을 한 사람과 못한 사람의 차이에 불과하고 또한 사대부 밑의 농민 공인 상인의 계급 역시 단지 직업의 차이일뿐이라 못박았다.
그리고 농업과 상업이 서로 협력해 백성들 스스로 생산활동을 통해 먹는 것과 입는 것을 해결해야 하고 이를 위해 지리적 환경과 운송수단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사대부집안 출신인 이중환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신분제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방안을 지리에서 찾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의 발달을 대표하는 실학적 사상의 지리서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는 총 4개의 총론(일반적 이론을 총괄하여 서술한 해설)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는 조선의 전통신분제인 사농공상(사대부 그 밑이 농민 공인 상인 순)의 유래,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등 국가를 구성하는 백성들의 역할, 그리고 살 만한 곳에 관한 내용을 기록했다.
둘째 팔도총론(八道總論) 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세와 위치, 8도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도별로 자연환경, 인물, 풍속, 도내 각 생활권을 파악하여 각 지역의 특색을 종합적으로 지적했다. 팔도총론과 함께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셋째 복거총론(卜居總論)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가옥과 거주지의 이상적인 조건 등을 조목별로 제시했다. 예를 들면 비옥한 토지만큼 교역 즉 상업을 할 수 있는 장소와 가까워야 하며 마을사람들은 풍속과 사상이 비슷해야 하며 또 마을 주변의 산세가 아름다운 곳이 이상적인 주거지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3가지 총론을 합친 총론으로 마무리했다.
이 책은 유통경제의 증진에 따라 사회적?경제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이에 따라 지역적 특화와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던 18세기 중엽의 조선의 국토와 사회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조망하여 오늘날까지도 당시 사회를 파악하는 자료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책이다. 책 내용 하나하나가 사로 협동하여 잘살자느니 하는 그런 원론적인 내용보다는 당시 현실속에서 백성들이 제일 필요한 것들을 요약 접목해 서술하였다.
발해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1749~?)이 쓴 발해의 역사책이다.
발해고란 책에 앞어 발해라는나라가 어떤 곳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해는698년부터 926년까지 약 220여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나라이다.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이 건국자인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면서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 데서 비롯했다.
[대조영: 고구려의 유민으로 “진”이란 나라를 세워 왕이 되고 713년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여 국호를 발해로 고친 발해를 세운 인물이다.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진국(震國)이라 칭했으며 일본과의 사절교환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로 칭하기도 했다]
발해고는 정조 8년인 1784년에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책으로 한국 최초의 발해역사서이다. 편찬동기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서문 중간중간에서 “발해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고, 선비들의 눈과 귀가 막히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발해의 땅은 부여?고구려로 이어진 우리의 영토였으며, 대조영은 고구려인이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는 한나라가 아닌 발해를 포함한 두 나라 즉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인 남북국시대이며, 고려는 마땅히 남북국사를 편찬해야 했는데, 한반도지역에만 집착해 북쪽 지역을 방치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그는 발해가 망한 후 이 지역에는 여진과 거란이 들어왔는데, 고려 정부가 급히 발해유민을 통해 발해사를 편찬해 이 지역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군사를 보냈다면 지금 조선의 영토는 훨씬 넓어졌을 거라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10만의 발해유민이 고려에 귀순했음에도 고려왕조가 발해의 자료를 보존하지 않아 결국 문헌이 없어졌음을 한탄하였다.
그가 발해사(史) 가 되어야 할 이 책에 발해考(고:생각 할 고)라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의 역사인 발해에 대한 역사자료가 충분히 못해 어쩔 수 없이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유득공의 말 처럼 지금도 발해사 연구는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련 자료로는 고려때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장수로 인식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 본 이래, 유득공, 한진서등 조선시대 역사학자들이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관점이 많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서는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제시했던 '남북국시대론'이 일반화되고 있다. 발해를 북국으로, 통일신라를 남국으로 설정하는 남북국시대론은 북한의 역사서에서는 수용되고 있으며, 남한의 주요역사서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대조영을 중국 말갈족의 인물로 보고, 주민의 다수가 말갈족임을 들어 발해를 만주인의 왕조로 본다.이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분리시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만주사로 정리하려 했던 “만선사관” 때문이다 [만선사는 중국의 만주에 대한 영향을 제한하였고,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와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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