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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학박물관에서 만나는 실학 이야기1

굴어당 2010. 8. 13. 13:44

숭실대학교 박물관은 엄밀히 말해서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이다. 이곳 박물관에는 아주 작은 십자가 모양의 돌이 한나 전시되어있다. 이 돌은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형태의 돌인데 불국사는 신라시대의 절이니 그럼 신라사람들도 기독교란 종교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흥미로운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럼 조선시대 천주교는 어떠했을까? 우리가 천주교를 접한 건 명나라를 통해서이다. 1600년대 사신들이 중국에서 망원경 자명종 같은 신기한 서양 문물들과 천주교의 교리인 천주실의 같은 책을 들여오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천주교라는 종교보다는 서양의 학문이라 해서 서학이라 불렀다.
 
숭실대학교에는 천주교의 전래과정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이 있다. 물론 단지 종교의 전래역사만이라면 이곳을 소개하진 않았을 것이다. 숭실대 박물관에는 이외에도 너무나 볼 것이 많은 곳이다.

기사 이미지 신라시대의 돌십자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 3.1운동에 사용했던 태극기

박물관은 총 3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방금 언급한 1500여년 전 신라시대 돌 십자각을 볼 수 있는 곳인 한국기독교역사실이다. 그리고 박물관 3층은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고고미술실이며, 2층 “근대화와 민족운동사” 실이 오늘 우리가 만나볼 유물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2층 전시실에는 서학과 실학, “서학의 수용과 실학의 전개” “천문학과 지도” 그리고 “일제식민지와 민족운동”, 이렇게 3개의 테마로 다시 나뉘어진다. 워낙 중요한 유물들이 많아 일일이 소개하려면 책한권이지만 몇가지만 소개해본다. 이곳 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판목이 있다.

인쇄된 대동여지도가 성신여대 박물관에 있다면 이곳에는 김정호가 인쇄하기 위해 목판에 세긴 판목이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양의현람도”이다. 1603년 중국에서 할약하던 마테오리치라는 선교사가 그린 세계지도인데 400년 제작된 지도로는 보기 드물게 정확하게 묘사되어있다. 이 지도는 1604년 조선 사신이 가지고 온것인데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희귀종이라 한다.

400년전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그렸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다른 그림으로는 1883년 지금으로부터 근 120년전 한국과 일본이 한일통상조약을 체결되었을 때 체결 후 연회장을 그린 그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양식 상차림에 나이프도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은 우리날에서 서양식 상차림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이곳 박물관에는 안중근의사께서 직접 쓰신 서예작품들(유목)과 1919년 3.1독립운동 때 숭실대학교 교정에 게양했던 태극기등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 소중한 유물들이 많다. 꼭 하나씩 시간을 내어 감상을 했으면 한다.


숭실대박물관에서 실학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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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오늘 이곳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되돌아볼 역사는 실학이다. 우리는 조선왕조를 봉건사회라고 부른다. 봉건 사회란 지배 이념. 상위에 있는 자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하위에 있는 자를 종속시켜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런 봉건주의식 조선사회가 근대사회로 되는 과정은 순탄치 많은 않았다.

무력에 의해 수동적인 개방을 당하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면서 근대사회로 넘거가게되었다. 근대화를 준비 못하고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조선왕조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물론 우리에게 기회는 있었다. 1700년대에 들어서며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수작업의 가내수공업이 아닌 공장에서 대량생산을 하게 되는 산업혁명과 자본이 있는 사람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도록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자본주의가 꽃피기 시작했다. 이런 유럽의 변화는 중국으로 넘어갔고 조선도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 실학을 내세운 실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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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중국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했고 (당시 중국은 이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서양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을 허락했다) 명분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현실적으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이들의 기본 사상이었다.

백성들에게는 쌀한톨 더 생산하게 해주고 고기 한 마리 더 잡게 해주는 그러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제도들이 진정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었던 사람들이 바로 실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으로 위축되고 우리는 근대화의 거대한 흐름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어째던 1700년대부터 펴진 실학사상은 여전히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기득권층의 눈에는 잊을 수 없는 파격 그 자체였다. 실학자들에게 중국은 이미 세상의 중심이 아니였다. 그들은 세계 각 민족들은 독자적인 고유의 문화가 있고 독립된 역사가 있다. 조선 역시 예외는 아니다라고 인식했다.


이에 안정복 유득공 이긍익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조선사를 연구했고 특히 정약용, 이익 등은 과거시험과목에 조선의 역사를 시험과목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민족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정호등은 조선의 지리연구에 대동여지도라는 역작을 만들기도 했다.

신경준, 유희 같은 인물은 조선의 글인 한글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는 불경이나 석재등 고대부터 전해지는 우리 문화재에 새겨진 언어와 문자를 연구했고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은 한반도내의 동물을 정리했으며 홍만선 박세당등은 신토불이 조선농업연구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런 백성들을 위한 실학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통치사상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