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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학박물관에서 만나는 실학 이야기3

굴어당 2010. 8. 13. 13:47

숭실대학박물관에서 만나는 실학 이야기3

송용진

2010.03.22 15:18

연암 박지원 과 연암집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렇게 말했다.

“글을 읽고서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 학문이 아니다.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 어쩌고 떠들어대고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함에 있어 가장 유해한 것이다. 학문의 최종목적은 자고로 백성들을 편히해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고 이를 위해 모르면 배워야 한다. 그것이 비록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 없이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열가지를 배울 때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의 실천 실학사상이 그대로 들어난 말이다. 연암 박지원의 집안은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노론계였지만 매우 가난했다. 그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고 이를 위해 실용학문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껴 3년을 문을 걸어 잠그고 실학을 공부를 했다고 한다. 1768년 서울의 지금의 파고다 공원 부근으로 이사온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등 실학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연암그룹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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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실학자들이 박지원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학풍인 북학실학파를 형성하였다. 1780년 그는 청나라 북경을 다녀오면서 많은 청의 문물을 접했고 여기서 그는 진정 국민이 배불리 먹고 그들이 넉넉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실질적인 것을 도와야 한다는 이용후생 사상을 확고히 하게 된다. 그는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호질, 허생전 등의 풍자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다양한 문물에 대한 소개와 비판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그는 진보적 사상과 풍부한 견문을 바탕으로 그만의 참신한 문체를 이용해 양반 기득권 사회에 대한 파격적 비평했다. 이를 집권층에서는 독설로 간주하고 왕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열하일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펴져 백성들에게는 읽고난후엔 속이 뻥 뚫리는 필독서가되기도 했다. 이를 바라본 양반집권층은 속이 타 들어 갔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면 200년이 지난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정치경제문화계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현실은 늘 역사에 그 답이 있기 때문이다. 어째던 박지원은 지방 군수를 지내며 정조임금의 명으로 농업관련책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정조가 승하한 후 곧 사직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그가 생전에 저술한 다양한 문집을 편집하여 필사본으로 전해 오다가 1901년에 김택영에 의해 다시 정리해 증편본이 나왔다. 이것이 연암집이다.

북학의

1778년, 정조 2년 되던 해 박제가가 문물제도에 관한 자신의 소견을 적은 책이다. 내편은 주로 중국에서 보고 배운 편리한 문물에 대한 내용으로 다양한 종류의 수레와 그 이로움, 유용하게 이용되는 배와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의 실정, 만들고 사용하기 편한 벽돌과 그 견고함, 정교하게 만든 기와와 도자기, 일상생활에 다양하게 이용되는 대자리 등에 대해 소개했다.

또한 궁실, 도로, 교량의 제도, 나귀, 말, 소 등 가축의 이용
은이나 돈을 이용한 상업의 성행
의복, 약, 도장, 담요, 종이 등 문방구의 발달
골동, 서화에 대한 관심 등 다방면에 걸쳐 중국의 우수한 면을 소개했다.

외편은 주로 제도에 관한 내용으로 농업정책에 관한 것으로, 거름의 활용 등 농업의 개선점을 제시했다. 또한 우리나라 과거제도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중국의 경우와 같이 공정한 방법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재물을 늘리고 기술을 익혀야 하며, 중국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 중국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철저히 배워야 함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들어 있다. 우수한 문물제도를 일으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우수한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함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사대주의적 명분론에 반대하면서, 사회경제가 발전하는 현실 속에서 거대한 문명대국인 청조의 실체를 인정하고 적극 배울 것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저술이다.

정약용의 사상과 저서

기사 이미지 기기도설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이며 사상가로 알려진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의 전부이다 할 정도로 많은 저서와 사상을 남겼다. 그는 단순히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그걸 이용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근본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조선의 기본인 유교정신에 입각해 지도층이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 각종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릴수 있고 그래야 그것이 조선의 경제적 토대가 되어 농촌 농민이 잘살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수용보다는 수용할 자세와 그 힘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그의 생각은 요즘 우리들이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상인 듯 싶다.

다산 정약용의 또 하나의 위대함은 다산의 포용력에도 있다.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는 퇴계 이론을 따르면서도 능동적 실천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율곡의 입장도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당파 논리에 의하여 자신들의 이론 사상과 반대되는 사상은 무조건 거부하던 당시의 흑백사고와는 분명 달랐다. 부디 지금 국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한번만 다산의 사상을 쳐다 봤으면 한다. 요즘도 민생정치니 애민정치라는 말을 쓰지만 정약용은 사상의 가장 깊은 뿌리는 “애민정신”에 있었다.

근 20년을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들 한가운데에서 싹 틔운 그는 그의 애민주의 사상에서 조선농업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사회 지도층이 농민의 입장에서 보지 못해서였다고 비판한다. 백성의 다수가 농민이었고 농업으로 국가 전체가 운영되던 조선이란 나라에선 오직 농민의 입장에서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요 사상이었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 사회를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해 가차없이 공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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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책인 “기기도설”과 “민보의”란 책은 살펴보자. 기기도설은 원래 명나라 때에 기계를 그림으로 그려 풀이한 책이다. 이를 정약용은 우리의 실정에 맞는 기계를 고안하여 설계하였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거중기이다. 거중기는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임금이 중국에서 들여온 이 기기도설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고 이 기계를 이용해 조선건축의 한 획을 그은 수원 화성을 완성하였다.
 
또한 “민보의”는 그가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중일 때 지은 국방체제에 관한 책이다. 당시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군제가 다소 정비되긴 했으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상민의 군역부담이 커지고 차츰 고역화됨에 따라, 국가방위체제의 문제점이 점점 심각해 졌다.

실제 평안도 농민전쟁의 소문과 왜국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유언비어가 남해안지방에 퍼지자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는 사태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이러한 사태를 보고서 민간 자위체제를 구상했다. 지금으로 보면 향토예비군 같은 제도이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해보면 우선 “ 전쟁이 나면 모든 마을사람들은 자신의 재물과 가족을 가지고 각 지역의 요충지로가서 일단 인명과 재산을 확보하고 적이 이용할수 없게 마을의 모든 시설을 없애버림으로써 적의 보급원을 봉쇄한 후 적과 유격전을 벌인다라는 전략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각종방어도구를 소개하는 등 전쟁에 대비한 구체적인 항목을 정리했으며 무엇보다 전쟁 중 공동체생활을 통제하는 엄격한 자체 규율을 정해두고 있는데, 이는 민보운영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식량, 노동편성, 남녀별거숙식생활에 대한 규정까지도 정리되어있다.

기사 이미지 홍대영(1731~1783)과 천문학

북학파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인 그는 1700년대 민중의 생활안정과 번영을 추상적인 도덕론보다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혁신을 통해 이룩하자는 북학파의 효시를 이루었다.  당시 천문학, 수학, 의학 등 자연과학은 신분상 특수 계층이 담당하는 낮은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그는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보아 중시했다.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특히 천문학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북경에서 천주교 신부와 중국 천문관계자들을 만나는 내용이 자세히 수록되어있는 “을행연행록”과 귀국 후에도 그들과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던 담헌서철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문학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지 않수있다. 또 그가 중국에서 본 모든 것을 조선실정에 맞춰 비교하며 실익을 취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또한 홍대용은 그의 저서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돈다는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했다. 이 책에서 "땅덩어리는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 땅의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간이다. 9만 리의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라고 하여 지구자전을 주장하고 있다.

이어 지표에 살고 있는 물체가 그렇게 빠른 회전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땅이 빨리 돌아 하늘의 기와 심하게 부딪히면, 이것이 허공에 쌓여 땅에 모이게 되고, 이것은 상하로 세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면의 세력이다"라고 하여 중력의 개념과 비슷한 기를 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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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구보다 훨씬 큰 하늘이 운행하는 것보다 작은 땅덩어리가 하루에 한 바퀴 도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보았다. 또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했으며, 태양이나 오행성도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별들은 모두 회전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홍대용의 지전설은 독창성의 문제로 일찍부터 학계에 의견이 분분했다. 지전설이 홍대용의 독창적인 학설이라는 의견, 중국이나 서양의 학설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 선배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 등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저서에 지구자전설과 자전의 속도를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만해도 역사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숭실대학교 박물관에는 서유구의 실학농서인 경계책, 홍만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농림교본인 산림경제 등 실학관련 많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잠깐 언급했듯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터닝포인트쯤에는 개혁군주 정조와 그의 측은 실학자들이 있었다.

이런 그들의 생각이 계속 발전해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시골의 가난한 백성에게까지 미쳤다면 분명 조선의 역사, 현 대한민국의 역사는 틀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조의 죽음으로 수구보수세력이니 노론이 집권하고 그들은 빠르게 변하는 근대화의 흐름을 외면한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400년 봉건조선의 질서을 고집했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슬픈역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본 실학사상과 그들의 역할에 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