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말,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테러 집단이 인도 뭄바이의 여러 호텔과 카페, 병원 등을 동시 공격해서 이틀간 무려 173명을 살해했을 때, 10명의 범인이 교신(交信)용으로 쓴 휴대폰은 블랙베리였다. 블랙베리는 캐나다의 리서치인모션(RIM)사가 개발한 스마트폰이다.
작년 1월엔 UAE 두바이의 한 호텔 방에서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무장 정파인 하마스의 주요 책임자인 마무드 알 마부가 독살됐다. UAE 정부는 나중에 배후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지목했다. 모사드 요원 20여명이 UAE 체류 중에 쓴 휴대폰도 블랙베리였다. 남미의 마약 공급조직들이 즐겨 쓰는 통신수단이기도 하다.
왜 유독 블랙베리가 선호되는 것일까. 블랙베리에서 발신된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는 캐나다와 미국·영국에 있는 RIM사의 전용(專用)서버 네트워크를 거쳐 수신되기까지 외부의 해킹이 어렵게 정보가 전송 중에 자동으로 암호화(encryption)된다. RIM사의 이 암호 체계는 미국 정부에서도 라이선스를 받아 사용한다. RIM사도 그동안 "정보가 암호화돼 전달돼 기업으로선 비밀 유지를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국내에서도 포스코와 대한항공, 대상 등 기업 고객 위주로, 이미 4만여대의 블랙베리폰이 사용된다.
그러나 RIM사의 암호체계를 해독할 능력도 없고, 자국 내에 RIM사 서버가 있지도 않은 나라에게 블랙베리는 골칫거리다. 끊임없이 이슬람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인도와, 우리와 달리 통신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할 준비가 안 된 중동의 UAE·사우디아라비아, 심지어 독일·프랑스 정부까지 블랙베리의 사용을 규제하고 나선 것도 이 탓이다. 인도 정부는 12일, RIM사의 암호체계에 대한 접근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음 달부터 블랙베리의 이메일·문자 메시지 송수신을 금하겠다고 발표했다. UAE도 RIM사에 비슷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독일 정부는 블랙베리 이메일 전송이 영국과 캐나다의 RIM사 서버를 거친다는 점에서, 보안상의 이유로 고위관리들에게 블랙베리의 사용을 금지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아예 RIM사와의 비공개 협약을 맺고, 제한적인 사용을 허용했다.
미 국무부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옹호한다며 이런 움직임에 반대하지만, 사실 내막은 다르다. RIM사의 서버 상당수는 미국에 있다. 미 정보기관들은 법원 영장만 있으면 수시로 이들 서버를 뒤지고 정보를 요구할 수 있고, 또 감청 기술을 갖고 있다.
만약 국내에서 블랙베리를 이용한 테러 첩보가 있을 때에, 국내에 RIM사의 서버가 전혀 없는 우리는 어떨까. 아일랜드 경찰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아일랜드 경찰이 아동 성매매 조직 간에 오간 이메일을 확보하려고 국제적 절차를 밟아 해외의 구글 메일(Gmail) 서버에 접근할 수 있기까지 통상 3~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때쯤이면 범인들은 사라진 뒤다. 계속 진화하는 정보통신 기술로 무장한 인터넷 기업들 앞에서, 전통적 개념인 '주권(主權)'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헌법에 보장된 '통신의 자유'만을 위해, 인터넷상의 위협 요소를 차단해야 하는 정부의 '인터넷 주권'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각국의 블랙베리 문제가 국내에선 진지한 논의 없이 마치 강 건너 불처럼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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