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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山 鄭元泰 선생을 追慕하며

굴어당 2010. 12. 19. 22:18

제 목 桂山 鄭元泰 선생을 追慕하며
글쓴이 김재갑
글정보 Hit : 37, Date : 2010/12/15 09:55

어느 덧 日月이 흘러 선생께서 타계하신지도 16년이나 되었다. 선생에 대한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선생께서는 1913년 2월 3일 忠北 堤川郡 錦城面 月林里의 고택에서 태어 나셨다. 諱는 元泰(戶籍上에는 諱가 日泰로 되어 있음), 字는 致和, 號는 桂山, 昭岩이고 延日人이다. 名祖 文淸公  松江 鄭澈의 14代孫이며 文節公 鄭瀁의 12代 宗孫이시다.

선생께서는 겨우 다섯 살 때에 祖父이신 桂陵公(諱 雲灝)에게서 ≪童蒙先習≫, ≪擊蒙要訣≫을 배웠고 일곱 살에 ≪小學≫, ≪孟子≫를 읽었으며 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이미 文理가 틔어 文集을 탐독하게 되었다. 13歲에는 四書三經을 誦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어 陽庵 柳芝赫 선생에게 師事하여 周易을 배웠다. 선생의 祖父께서는 철저하게 經書工夫를 하도록 고집하여 經書 이외의 서책들을 雜書라 하여 文集 등의 책은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러나 호기심에 가득 차 있던 선생께서는 祖父께서 出他하시는 틈을 타서 수많은 선현들의 文集과 道家書인 ≪南華經≫등을 탐독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생 댁에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萬餘 卷의 藏書가 고루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의 出他는 지금의 교통이 발달된 상황과는 달라 한번 외출에 몇 주일 또는 달포가 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선생의 祖父께서는 華西學派의 淵源으로 救國義兵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잦아 더욱 많은 분량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이때 읽으신 文集 중에 ≪宋子大全≫같은 경우는 후일 民族文化推進會의 古典飜譯事業에 크게 기여를 하게 되었다. ≪宋子大全≫은 분량이 102책이나 되는 巨帙일뿐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이 不知其數이고 文集에 등장하는  분들의 字, 號를 한 자씩만 쓴 경우도 많으며 난해한 隱語, 시대배경 같은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이를 소상하게 일러 주신 것으로 전하여 온다.   

이후 선생께서는 60평생을 鄕里에서 대대로 물려오는 넉넉한 농토로 農業을 경영하면서 학문을 계속하였다. 특히 祖父께서 義兵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는 어린 나이에 家業을 맡아 경영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사변을 겪고 나서 사회가 안정되면서 堤川에 學校法人 桂林財團을 設立, 桂林中學校를 세워 경영하였다. 몇 해 후에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학교경영에서 손을 떼시고 1973년 서울로 이주하시게 되었다.

서울에서 동향 후배이신 尹南漢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어 尹先生이 創立한 韓國文獻硏究所의 顧問役으로 委囑되었다. 1977년 尹先生께서 民族文化推進會 常任編輯委員으로 취임하면서 선생께서도 함께 民族文化推進會 常任校閱委員으로 委囑받게 되었다. 이후 1992년 作故하실 때까지 인연을 이어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이루신 일을 열거하여 보면 ≪星湖僿說≫, ≪五洲衍文長箋散稿≫를 共譯하시고 ≪東史綱目≫, ≪經世遺表≫, ≪氣測體義≫, ≪朝鮮王朝實錄≫, ≪東國李相國集≫, ≪靑莊館全書≫, ≪茶山詩文集≫, ≪惺所覆瓿稿≫, ≪寒水齋集≫ 등을 교열하시어 총 20종 150여 책이 된다. ≪韓國文集總刊≫刊行事業에서는 文集 73종을 標點·監修를 하셨다. 後學指導로는 1984년부터 國譯硏修院에서 ≪四禮便覽≫講讀, 性理學講讀, 古文書讀解, 詩歌講讀, 草簡選講讀 등을 강의하셨다. 그 밖의 사회활동으로 1986년에 靑丘詩友會가 창립되면서 선생께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漢詩를 지도하셨고, 1990년 초에는 老村 李九榮 선생과 함께 以文學會를 설립하여 後學指導에 힘쓰셨다. 1988년 二樂會라는 詩會가 창립되면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내가 선생을 뵌 것은 1979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晩學이었지만 漢學工夫의 뜻을 말씀드리자 鈍才인 나에게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을 허락하여 주셨다. 이래 1993년 4월 5일 考終하실 때까지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仁寺洞 한 모서리에 好古堂이라는 간판의 古書店을 갖게 된 것도 선생을 모시고 배움을 받을 자리를 마련하려는 뜻에서였다.  

好古堂은 협소하지만 仁寺洞의 선생님 사무실이요 勉學處였으며, 나 이외에 많은 漢學徒와 학자들이 와서 지도를 받았다. 선생께서는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禮遇의 厚薄, 年齡의 高下, 社會的 地位의 高下를 막론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성의껏 대하셨다. 선생께서는 漢學에 깊은 造詣가 있을 뿐만이 아니고 歷史, 특히 黨爭史와 譜學에 밝으셨는데,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찾아와 질의문답을 하였다. 선생께서는 언제나 질문을 받는 즉석에서 거침없이 소상하게 답변을 하셨는데, 이런 경지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릴 때 읽으셨던 經書 이외의 文集등의 많은 서적과, 사랑방에서 선생의 祖父님과 손님들 간의 國朝關係 대화를 익혀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重厚하신 풍채에다 마음은 疎脫하셨고, 風流를 즐기셨으며, 술은 斗酒도 不辭하셨는데, 전날에 아무리 대취하였어도 다음날엔 언제나 깨끗한 모습으로 나오시는 모습을 뵐 수가 있었다. 고령의 연세이지만 언제나 건장하신 모습으로 활동하시어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모시고 배움의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께서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심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여 며칠간 치료를 받고 퇴원하셨다. 두세 달이 지나 다시 경희의료원에 입원하시더니 끝내 회복하시지 못하고 타계하시고 말았다.

선생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古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계속 勉學하여 韓國古書協會의 책임을 맡았으며 傳統文化硏究會와 因緣을 맺게 되었다. 또한 그 덕분으로 공부를 계속하여 博士學位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스승님을 평일에 제대로 뫼시지 못해 송구한 마음 가누지 못하였다. 그 후 여러 제자들과 함께 追慕碑를 세워 조금이나마 그 큰 恩德에 보답하고 있다.

다시 한번 선생의 冥福을 忠心으로 빕니다.

3120  靑溟 任昌淳 선생에 대하여 성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