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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硏靑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丑時(새벽 1시∼3시 사이)에 강원도 平昌郡 大和面 介水里全義洞에서 鳳西公(휘 禹善)과 陽川 許氏(휘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초명은 孟虎인데, 부친이 품으로 호랑이가 뛰어드는 태몽을 꾸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름하였다고 한다. 16세 되던 해에 冠名을 大泳으로 하고 字를 京化라 하였다. 호적에는 虎泳으로 되어 있기에 공문서에는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선생은 10세에 安夏景 선생의 문하에서 受業하였다. 물론 그 전부터 봉서공이 敎授하였지만, 祖母의 喪으로 안하경 선생 문하로 보낸 것이다. 11세에는 ≪小學≫을 공부하였는데, 봉서공이 ≪小學≫을 매우 중시하여 “≪小學≫에서 文理를 터득하지 못하면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小學≫에 정진하여 문리를 빨리 터득할 수 있었고, ≪孟子≫의 구두를 스스로 떼고 文意를 알 수 있게 되었다. 14세에 愚齋 李基周의 三女인 李氏(휘 秀鉉)와 혼인을 하였다. 선생이 스승 松窩 裵縉煥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8세 되던 1936년이다. 선생은 부친을 따라 강원도 橫城 栗里에서 松窩 선생을 배알하였고 20세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선생은 松窩 선생을 사사함으로써 李恒老로부터 金平默, 柳重敎, 柳麟錫으로 전해지는 학통의 정맥을 이어받게 된다. 22세 되던 해인 1940년에 尙州 壽春洞으로 이사하였으며 報恩의 大元里 德可山에서 독서에 정진하였다. 26세 되던 해인 1944년에는 일제의 강압으로부득이 평양에서 行役을 하였다. 이때 선생은三神炭鑛에서 行役을 하였는데, 매양 稱病하고협조하지 않았다. 선생이 급식감독이 되자 굶주린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어 그들을 돌보는 데에 노력하였다. 舍監이 되자, 귀향을 원하는 자들을 도왔기에 근 한 달 만에 선생이 관리하는 기숙사가 텅 빌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조국도 광복이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 온 선생은南山 鄭璨 선생에게 ≪周易≫을 배웠다.다음 해 봉서공이 보은향교의 講長에 임명되니이것이 인연이 되어 2년 뒤인 1948년에 報恩鳳坪으로 이주하였다.1949년 31세의 선생은 성균관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末端을 추구하는 대학의 풍토에크게 실망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49세 되던 해인 1967년 선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承政院日記≫를 脫草하는 校書官으로특채되어 서울로 移居하였다. 선생은 발군의능력으로 당초보다 상위의 직급에 특임되었다.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는 京鄕 각지에서 기라성 같은 한학자들이 모여들었으니 선생은 그들과 以文會友하였다. 1972년 54세 때 ≪承政院日記≫의 탈초 사업이 완료되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퇴직하였다. 1976년 58세에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6 전통문화 제26호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의 강사로 위촉되어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주로 ≪周易≫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68세에 연수원 강의를 고사하였으니, 이는 일흔 이후로는 강의를 하지 않겠다는 평소 신념을 지킨 것이다. 선생은 국역연수원에서 퇴임하였지만 講學까지 폐하지 않았다. 서울 남가좌동 자택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남가좌동 골목으로 漢籍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대개가 선생의 제자였다. 선생은 강학과 저술 외에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하는 國譯叢書와 韓國文集叢刊을 교열하였다. 선생은 80세에 부인이 타계하자 봉평으로 下鄕한 후 외부 출입을 끊고 독서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가 2007년 음력 10월19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은 89세이다.선생은 經學과 文學을 兼全하였는데, 특히 周易學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되었다. 그 정수는≪易象講義≫에 응축되어 있으니, 이 책은1983년에 초본이 완성된 후 여러 번의 수정을거쳐서 1997년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상 ․ 하 2책으로 출간되었다. ≪易象講義≫는 기존의 주요 이론을 토대로 하되 象數學的 관점에서 선생만의 독창적 이론을 개진한 勞作이다.선생은 ≪周易≫을 포함한 삼경을 모두 강의할 수있는 국내의 몇 안 되는 老士宿儒였다. 선생의 경전암송 속도는 전공자들이 눈으로 읽는 속도보다 빨랐다. 특히 선생의 誦讀은 경전의 특성을 잘 살려 내는것이었다. 따라서 경전마다 성독의 방법과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당시 성독을 구성지게 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 민족문화추진회의 요청으로 ≪大學≫․ ≪中庸≫․ ≪孟子≫를 녹음하였으니,이는 지금도 송독 학습의 필수적 교재로 사용되고있다. 선생의 문학 세계는 2002년에는 간행된 ≪硏靑集≫(뿌리문화사)에서 볼 수 있다. ≪硏靑集≫에는 다양한 형식의 운문과 산문이 수록되어 있으니, 여기에 선생의 문학적 성취가 녹아 있다. 故事를 남용하는 등 현학적이고 지루하며 내용이 부실한 문장을 극력배격하고 담박하고 평탄하면서도 진솔한 문장을 추구하였다.선생은 선비의 참모습을 후학에게 몸소 보여 주었다. 평생토록 생명과 힘의 약동성을 갈고 닦기를 염원하였기에 자호도 硏靑이라고 하였다. 선생의 한학적 지식은 재화로 환산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물질을 초개와 같이 여겼기에 평생을 淸貧하게 살았다. 온화한 성정의 선생이 평생 남에게 모진 이야기나 책망을 하는 법이 없었지만 선물이나 강의료 명목으로 봉투를 내밀면 “나는 지식을 파는 상인이 아니네.”라고 하며 엄하게 꾸지람을 하였다. 선생이 국역연수원에서 강의할 때의 일이다. 종강 후 학생들과 회식을 하였는데, 선생이 회식비를 모두 지불하였다. 민망해진 학생들이선생께 약간의 寸志를 드리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혼만 났다. 그러다가 선생이 버스를 타자 봉투를 억지로 밀어 넣었는데, 이를본 선생은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돈을 모두내던졌다고 한다. 선생은 자신에게는 작은 잘못이나 나태함도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은 말년에 기력이 없을 때에도 午睡를 취하지 않았다. 낮잠이 자고 싶을 때는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나가 밭을 일구었다. 宰予가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책망을 받았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을 교조적으로 추종하였던 學究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항상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삶의 일단이라고 하겠다.“군자는 밥을 먹을 때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공자의 말은 생활 규범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더욱 강하다. ≪論語≫의 이와 같은 특성때문에 공자의 가르침을 敎理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선생은 그것을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래서 평생 포만을 즐기려 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뒷바라지도 마다하였다. 선생이 손수 차린 밥상에는 언제나 밥 한 그릇과 나물 국 한 가지였다. 또 푹신한 베개 대신 목침을 베었고 푹신한 이불을 깔거나 덮지 않았다. 선생의 의복과 주변의 모든 집기들도 대부 7분 수십 년간 사용한 것들이었다. 선생은 평소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는데, 이와 같이 종교인들도 실천하기 어려운 절제된 생활을 하였기에, 그 누구도 편견이라고 할 수 없었다.반면 타인에게는 항상 온화하였으며 나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고 공경히 대하였다. 선생은 편지의 겉봉은 물로 불려서 떼어 냈으며 아무리 단단하게 묶인 포장의 끈이라 할지라도 일일이 풀어냈다. 그것이 편지나 선물을 보낸 상대에 대한 예라고 하였다. 또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심부름 시키는 법이없었고, 몸소 밥상을 차려내 대접하였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儒家의 가르침이 體化된 자연스러운 실천이었다.선생은 말년에 등이 많이 굽었다. 그런데 그런 선생의 굽은 등은 매우 자연스러워보였다. 평소 書案을 사용하지 않고 등을 구부리고 한 팔로 턱을 괴인 자세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그렇게 책을 읽다가 해가 져서 글자가 보일지 않게 되어서야 독서를 멈추었다.“어허! 오늘은 밭을 매느라 바빠서 한 권밖에 못 읽었네.”선생은 한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도 사전을 뒤져가며 몇 달을 씨름해도 완독할까말까 한 한문전적을 몇 시간 만에 독파하였다. 한적을 대각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속독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보다 한문으로 글을 짓고 읽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이 한글을 소홀히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다. 흥이 일면 우리말로도 이따금 시가를 지을 정도로 한글 창작에도 능하였다. 또 醫書 등을 탐독하여 藥劑를 손수 지을 정도로 한의학에도 조예가 있었으며 傳統 地理學 등에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은 “서울은 감옥살이, 보은은 귀양살이”라고 농담 삼아 말하였지만 그래도 보은에서의 귀양살이를 사랑하였다. 자택 뜰에는 온갖 나무를 심고 완상하였다. 송나라의 어떤 문인이 자신의 정원을 만들 때 “사철 꽃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게나”라고 정원사에게 요청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손수 가꾼 선생의 정원에는 항상 꽃이 피어 있게 하였다. 동네 안에서 꽃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선생의 자택이었다. 선생의 학문은 큰 자제인 吳圭根 선생에게 家學으로 전해졌으며, 鄭太鉉 전 국역연수원 교수는 선생의 高弟이다. 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한국학 동양학 연구자들이 선생에게 직간접으로 훈도를 받고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면서 선생의 선비 정신을 기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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