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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溟 任昌淳 선생에 대하여

굴어당 2010. 12. 19. 22:19

제 목 靑溟 任昌淳 선생에 대하여
글쓴이 성태용
글정보 Hit : 574, Date : 2010/07/19 14:41
漢學者라는 말로 靑溟 任昌淳(1914~1999)선생을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일상의 느낌에 와 닿는 한학자라는 말과는 가장 먼 분이 임창순 선생이 아닐까? 선생님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처음 뵈었을 때의 당혹스러웠던 느낌이 생생하다. 그러니까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낙원빌딩의 다방에서 뵈었을 때였다. “담배들 피는가?”하시더니 담배를 권하시던 선생님. 너무도 어려워 몸을 외로꼬고 바로꼬고 하는 젊은 제자에게, “담배는 단지 嗜好品인데, 이거 때문에 내 앞에서 계속 불편하게 지낼 필요 없네. 어른 앞에서 담배 못 피우게 하는건 우리나라 밖에 없어….”하시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권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리며 받아 피웠다. 그 뒤로는 선생님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지만. 아마도 다른 漢學者 門中에서는 참 콩가루 집안이라고 흉볼만한 풍경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이 청명 문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해인가는 “이제부터는 내 앞에서 절하지 말게. 세상이 달라졌는데 그냥 서서 공손히 인사하면 됐지, 번거롭게 머리 처박지 말게”하시곤 정말 일체 절을 받지 않으셨다. 어느 제자인가, 그래도 굳이 절을 드렸더니 아주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치셨다. “왜 내가 싫다는 것을 그렇게 하는가?”하고. 한학자라고 불리우시면서도 선생님은 과거의 인습에 얽매이는 일이 없으셨다. 또한 그것이 괜히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셨고 好惡가 분명하셨다. 한글 專用에 대한 선생님의 확고한 신념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학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문을 깊이 있게 배운 사람들을 양성해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되도록 한자를 쓰지 말고 우리말을 아름답게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꼭 追越이라고 해야 하나? 앞지른다고 하면 될 것을…. 人權을 蹂躪한다고 할 필요 없지. 짓밟는다고 하면 되지 않아?”하셨던 말씀은 이제 내가 종종 써먹는다. 이젠 나도 선생노릇을 해야 할 때가 있고,제자들 한문번역 시키다 어색한 국한문 혼용의 표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선생님 말씀을 표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직도 내 한문번역은 선생님께 혼날 만한 수준이 아닐까 겸연쩍기도 하다.

“한문은 외국어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한학자로 불리는 분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임창순 선생은 분명히 ‘외국어’라는 쪽이셨다. 그렇기에 한문에 토를 붙여 읽은것을 반대하셨다. 영어의 경우엔 “I는 am a boy이다”라고 하지 않으면서 왜 한문에는 토를 붙여 읽느냐는 말씀이셨다. 토를 붙여 읽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두고 故 成樂熏 선생과 임창순선생이 갈등을 빚었고, 결국은 웃지 못할 사건에까지 이른 이야기는 꽤 알려져 있다. 술자리에서 술기가 오르신성낙훈 선생(선생은 애주가이셨다)이 임창순 선생에게 토를 붙여 읽지 않는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맨 정신의 임창순 선생(선생은 거의 술을 못하셨다)은 심기가 상해 성낙훈 선생에게 “老而不死”라고 쏘아 붙이셨다. 불끈한 성낙훈 선생의 손이 올라갔고, 그래서 한동한 두 분이 냉전상태…. 마지막엔 성낙훈 선생이 한 잔 걸치신 상태에서 임창순 선생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다. 한학자로 불려지면서도 한문을 외국어라고 단언하신 데는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사랑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 ‘민족’이야말로, 선생님이 거창하게 내세우지는 않으셨지만, 선생님 평생의 話頭였다고 생각된다.

선생님은 생신상을 받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한번 생신잔치 치러드리려 여러 번 청을 드렸으나 한사코 거절하셨다. 어느 해인가 너무도 섭섭하여 강청을 드렸더니 매우 노여워하시면서 “나는 진심으로 사양하는데 자네들이 자꾸 이러면 내가 마치 위선적으로 사양하는 사람으로 되는 거 아닌가?”하고 야단을 치셨다. 그런데 이렇게 생신상을 받지 않으시는 까닭인 즉 “이렇게 민족을 분단에 이르게 한 세대의 한 사람이 무슨 廉恥로 생신상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얼핏 생각에는 “그게 이유가 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진심이었다.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민족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인 분단이라는 비극을 아프게 품고 있었으며, 그런 현실을 만든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학력이라고는 서당의 給費生이었던 육년의 한학교육이 전부인 임창순 선생님의 인생역정은 참으로 파란만장이다. 그러한 굴곡 속에 일관된 모습으로, 아니 점점 확고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은 치열한 행동력을 지닌 비판적 지성의 모습이었다. 漢學者이고 金石學者였으나 과거지향적이고 퇴영적인 모습을 보인 적 없었으며, 언제나 현실에 굳게 발을 디디고, 올바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다. 그러하기에 격변하는 민족의 역사 속에 4 ․19 교수시위에 앞장을 서시는 모습,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으시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그것이 바로 임창순 선생님의 정신과 삶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마지막 회양으로 더더욱 뚜렷하고도 큰 모습으로 승화되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몇년 전 당신이 사시던 집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出捐하여 청명문화재단을 세우셨다. 평생의 뜻인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달, 그리고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해결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 모든 것을 회향하신 것이다. 그 뜻을 받들어 청명문화재단은 ‘임창순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며, 고전의 연구와 번역을 지원하는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청명 임창순 선생은 1914년 5월 충북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에서 출생하셨다. 14세 되시던 1927년 충북 보은군 서당 觀善亭에 급비생으로 입교, 兼山 洪致裕 선생에게 6년간 수학하셨는데, 이것이 선생님의 유일한 학력이다. 당시 겸산 선생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던 치암 신석호 선생에게, “저기 천재 한명이 있다”고 하셨다 한다.

일제 때는 막노동까지 하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필자가 들었던 사모님 말씀. “아 글쎄 하루 종일 노동해서 좁쌀 한됫박 사서 멀건죽 쑤어먹던 시절인데… 하루 종일 일해서 피곤해 누어 자는데 윗목에서 웅얼웅얼 글을 읽어대니 얼마나 지긋지긋해?… 그래서 지금도 글 읽는 소리가 싫어….”해방되던 해, 교사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경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대구 사범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셨고, 1952년 동양의약대학 전임강사, 성균관대, 고려대 시간강사를 거치셨으며, 1954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셨다.

1960년 4.25 교수 데모 때 이승만 대통령 下野를 주장하셨고, 趙潤濟선생이 착안하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를 플래카드 글씨로 쓰셨다. 1963년에는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강좌를 개설하셨다. 1964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으셨는데, 필자가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뽑혔던 1977년 당시에도 선생님은 요주의 A급 인물로, 매주 형사가 들려 조사를 하고 동태를 보고하던 형편이었다. 1976년 선경(현 SK) 故 崔鍾賢 회장과의 유대를 해 선경에서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태동고전연구소 제 1기 한학자양성 장학생을 선발, 한학의 집중연수를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에 芝谷書堂 건물을 신축하여, 이곳이 한학연수의 중심이 었다.

1985년에는 문화재위원장에 취임하셨다. 당시 한림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윤덕선씨와 약정을 통해, 서당과 관계된 재산을 한림대학에 기증하고 서당은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로 되었다.1999년 4월 12일에 별세하셨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모든 재산을 ‘청명문화재단’ 설립에 출연하셨다. 아드님 임세권(안동대 교수)교수에게는 廣開土大王碑 拓本 하나를 주시면서 “이건 네가 가져라”하셨다 한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우선은 그 소탈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제자들과 허물없이 마작을 하기도 하고 바둑을 두시기도 하고,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는 재미있고 야한 민요를 구성지게 부르시기도 하던 모습…. 그러나 그분의 치열했던 삶, 마지막까지 당신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회향한 큰 모습을 보면 조금은 엄숙하게 지금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선생님께 배운 학문적 지식보다도 그분의 삶 전체가 너무도 소중한 귀감이다, 이런 어른을 뵙고 배웠다는 것이 참으로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교수 자리가 목숨 줄인 것처럼 매달려 비겁하게 살지는 말게” 하시던 말씀…. 새삼 그 말씀을 되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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