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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은 휘가 樂熏이고 호적 휘는 庚祚이며 자는 子沐이고 자호는 放隱이며 본관은 昌寧이다. 1910년(庚戌) 음력 12월 1일 慶尙南道 咸安郡 山仁面 釜峰里 三足洞에서 부친 成晩永公과 모친 載寧李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생후 1주년도 못 되어 모친을 여의고 조모 玄風郭氏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先生은 어릴 때부터 재질이 영특하여 3세 때 조모의 등에서 千字文을 외워 ‘成才童’이라 이름이 났다. 5세 때 서당에 들어갔는데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梅月堂 金時習에 견줄 神童이라 칭송을 받았고 서당에서 배운 문장은 모두 줄줄 외워 13세에 이미 七書를 독파했다. 주위에서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권고로 1925년 15세 때 大邱의 大倫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그만두었고 1928년 18세 때 廣州安氏 春和公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1929년 19세 때 강원도 金剛山의 楡岾寺에 들어가 方漢巖禪師에게서 佛經을 공부하고 바로 佛經院講師로 채용되었으나 부친의 訃音을 받고 곧 귀향하여 喪葬을 禮制로 거행하였다. 1930년 20세 때 신간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면서 爲堂 鄭寅普 선생을 만나 교유하였다. 나라가 광복된 뒤 1947년 37세 때 서울대학교 文理科大學 中文科 助敎로 근무하며 漢文實力이 탁월하니 敎授들이 感服하면서도 忌諱했다. 先生은 이때부터 高麗大學校 成均館大學校 梨花女子大學校 등에 출강하였고 1952년 42세 때부터 1953년 10월까지 全北大學校 文理科大學 史學科 專任講師로 재직하였다. 43세 때인 1953년 11월부터 1964년 4월까지 慶北大學校 文理科大學 哲學科 敎授를 역임하였고 1955년 문교부에서 실시한 敎授資格試驗에 합격하였다. 1964년 54세 때 成均館大學校 文理科大學 東洋哲學科 교수로 부임하여 1969년 3월까지 재직하였다. 1965년 55세 때에 民族文化推進會(이하 민추) 설립에 진력하고 韓國古典 번역을 주관하였다. 특히 번역과 강의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漢學者를 발굴하여 國譯 참여를 권장하고 강의까지 맡겼는데 대표적인 분이 河性在 선생이다. 또 東國譯經院의 佛經飜譯과 교열을 주관하고 世宗大王紀念事業會의 朝鮮王朝實錄의 국역, 편집과 감수를 맡았으며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家庭儀禮準則’ 審議委員을 겸임하였다. 1969년 59세 때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흥국탄광 채현국 사장의 한옥에서 東邦古典硏究院을 개설하여 漢文經典을 강의하였고 1974년 64세 때 政府로부터 銀冠文化勳章을 받았다. 1977년 1월 1일(陰, 丙辰 12월 1일)에 졸하니 향년 67세이고 京畿道 廣州郡 廣州公園墓地에 안장되었다. 論著로 <韓國儒敎史><韓國儒敎思想史><朝鮮時代性理學의 發達><儒學思想의 近代的 轉換><韓國黨爭史><東洋哲學의 硏究方法><老子의 道德經><孟子의 性善說과 荀子의 性惡說의 比較硏究><荀子의 心學》등이 있고,《燃黎室記述》등 韓國古典과 元曉의《大乘起信論疏》등 많은 飜譯書가 있으며,《東文選》《新增東國輿地勝覽》《萬機要覽》《霞谷集》등의 校閱, 編纂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평소 先生의 뜻에 따라 門生들의 公議로 私諡하니 ‘博學多聞曰 文이요 敎誨不倦曰 長이라’ ‘文長’의 시호를 올렸다. 1979년 5월 5일에 先生의 문집《韓國思想論稿》를 발간하였고 동년 6월 30일에 門生들이 鷺山 李殷相이 짓고 時菴 裵吉基가 쓴 墓碑를 세웠다. 2008년 8월 20일 문생들이 回想記와 論文을 모아《放隱成樂熏先生三十周忌追慕文集》을 발간하였다. 先生의 고향인 慶尙南道 咸安郡의 남방에 艅航山 五峯山 防禦山의 三山이 우뚝 솟아있고 그 여맥이 북쪽으로 흘러 先生의 출생지 부봉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지방 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이 三山의 精氣로 인하여 이 지방에 儒佛道를 겸한 위대한 인물이 출현한다.’고 하였다니 아마도 이 예언의 주인공이 先生이 아니겠는가? 先生은 특출한 재능으로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儒敎 佛敎 道敎 諸子百家 漢文小說 등에 박통하였고 특히 典故에는 누구도 추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강의할 때 韓國 中國 日本 등에서 간행된 여러 漢文字典에도 없는 難解한 語句나 文章을 질문해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였고 그 出典까지 밝히니 당시 수강하거나 국역작업을 함께 하던 후배들이 모두 놀라 감복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컴퓨터’ 또는 ‘걸어 다니는 사전(walking dictionary)’이란 별명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전 학술원 회장 斗溪 李丙燾 선생이 放隱 선생의 회갑연 축사 중에 선생을 가리켜 ‘漢文의 鬼神’이라 칭하였을 정도로 博覽强記하였다. 8세의 연장인 鷺山 李殷相도 항상 난해한 漢文은 先生에게 문의하여 해결하였고 先生의 碑文에서 “患難의 逆境에 處하여서도 民族의 志操를 굳게 지켜 淸貧의 生活을 달게 여겼고 西歐文化가 氾濫하는 世代에 東洋의 學問을 깊이 硏究하여 이 方面의 權威가 되었으며 傳統文化의 참된 길을 밝혀 後進養成에 一生을 獻身한 분이니……分明 우리들의 國寶였다.”고 기술하였다. 성품은 소탈하고 외모는 神童이라 불리던 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奇人 스타일의 복장에 金弘道의 풍속화에 나오는 村老와 같았다. 솔직하고 가식 없이 순수했으나, 글에 대해서만은 무자비할 만큼 엄격했던 분이다. 淵民 李家源 선생이 《熱河日記》를 번역할 때 원고를 교열하던 선생이 새빨갛게 고치는 바람에 어리둥절 하여 무안해 하였고, 无涯 梁柱東 선생도 漢文에 있어서는 넓죽 절할 만큼 존경하였다고 李啓晃 회장 등은 선생에 대한 일화를 회상하였다. 先生은 생존 시 항상 “漢文의 종자가 떨어지게 되었다.”고 걱정하였다. 광복 이후 편협한 국수주의적인 국어학자들로 말미암아 나라의 語文政策을 ‘한글전용’이라는 목표를 내세워 학교에서 漢文敎育을 추방하고 50년이 지나온 오늘날 국민들은 文盲 아닌 漢盲이 되었고 傳統文化는 단절의 위기를 맞았으며 人性敎育의 不在로 패륜아가 매일 속출하고 있으니 국민들에게 끼친 그들의 죄과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시기에 기존의 漢文學者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에서 사라지고 후진에게는 가르치지 않으니 漢文의 종자가 떨어져가고 있음을 先生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에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에서 左傳, 史記, 唐宋八家文, 通鑑節要, 東門選, 국역연습 등을 강의하여 한문 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漢文敎育에 진력하였으므로 당시 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한 많은 문생들이 그 뒤 전국의 各 大學과 中․高等學校 또는 직장 등에서 漢文敎育을 담당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니 先生의 ‘漢文의 種子가 떨어지겠다.’고 하던 염려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다. 國譯硏修院에서 수강한 학도와 先生의 自宅이나 東邦古典硏究院 등에서 수강하여 大學이나 관계기관에 진출한 전문가들이 수백 명에 이르고 있다. 선생이 평생 학문적으로 교유한 분은 淵民 李家源, 无涯 梁柱東, 于人 曺圭喆, 雨田 辛鎬烈, 心齋 趙國元, 東樵 李鎭泳, 河性在 등의 원로 한학자와 趙芝薰, 李熙昇, 李相殷, 金斗鍾, 朴鍾鴻 등의 기라성 같은 현대 문인과 학자 분들이었으며 이들과 고전 국역을 함께 할 때도 항상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先生은 평생 술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술은 막걸리, 소주, 맥주, 정종 등 淸濁을 가리지 않았고, 안주는 김치 한 가지면 족해 하였으며 때로는 소금으로 하였다. 그리고 술집에서는 곧잘 酌婦와도 희롱할 정도로 가식없이 솔직하고 순수한 분이었다. 선생은 講義時間에도 항상 얼굴에 酒氣가 띄어 있었고 어쩌다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강의의 열의가 저조했다. 그런 날에는 강의가 끝나면 “柳君 술 안 살래?” 하므로 필자는 자주 술을 대접하는 처지였는데 이렇게 즐긴 술로 인하여 先生이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통하고 송구할 뿐이다. 필자는 선생의 문하에서 정확히 6년 반 동안 受學하였으나 昇堂도 못한 처지여서 감히 評傳을 쓸 적격자가 못 되지만 편집자의 청탁으로 이상과 같이 先生의 행적을 약술하였다. (필자 소개) 柳豊淵 한자한문교육학회 고문, 성균관 유교학술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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