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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의 諱는 圭喆이고 字는 汝明이며 號는 于人으로 貫鄕은 昌寧이다. 1906년(丙午) 正月 14일 丑時에 慶北 永川邑 西門 밖 竹田洞에서 부친 曺臣煥公과 모친 昌寧成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특한 자질을 타고나 4세 때에 벌써 字句를 이해하였으며, 10세 때에 四書三經을 독파하였다. 1921년(辛酉) 16세 때에 鄕內의 큰 학자인 石谷 李圭晙 先生에게 受學하러 찾아가니 선생에게《易經》을 講讀해보라 하고는 該博한 識見에 놀라면서 “經傳에 대해서는 늙은 내가 더 나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1924년(甲子) 19세 때에 深齋 曺兢燮 先生을 師事하였는데 일반 사람들이 생각지 않고 있는 부분을 질문하니 심재선생이 칭찬하기를 “汝明은 後生 중에 秀才다.”라고 하였다. 1932년(壬申) 27세 때에 門中 父老의 명으로 昌寧曺氏 始祖의 齋室인 種德齋 重建 上樑文을 지었는데 심재선생이 보시고 극구 찬양하였다. 1934년(甲戌) 29세 때에 중국에 들어가서 上海, 南京과 蘇州, 杭州 등지를 관람하고 당시 중국의 大學者인 章炳麟을 찾아가 1년 동안 從遊하고 돌아왔다. 1937년(丁丑) 32세 때에 만주로 들어가서 땅을 빌려 營農을 하여 復國을 도모하는 자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事勢가 如意치 못하여 1년 후에 돌아왔다. 선생이 금강산에 갔을 때 萬物相을 읊은 시는 너무도 유명하여 世人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붉은 기운 떠오르고 푸른 기운 쌓인 곳에 視野가 멈추니 望斷蒸紅積翠間 어느 곳이 참 모습인지 알지 못하겠네 不知何處是眞顔 복잡하게 견주어 보려고 하면 도리어 일이 많아지니 紛紛擬比還多事 만 가지 형상도 한 가지 형상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네 萬相無如一相看 1956년(丙申) 51세 때에 東洋漢醫科大學에 出講하였고, 1968년(戊申) 63세 때에 民族文化推進會(현 한국고전번역원) 校閱委員으로 초빙되었으며 겸하여 國譯硏修院 敎授職을 맡았다. 비록 師道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斯學을 繼承시키는 것을 責任으로 여겼다. 1976년(丙辰) 從學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東仙學會를 結成하였는데 선생의 百歲 후에 遺稿 刊行과 墓碑 竪立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81년(辛酉)에 선생님의 著書인《夙夜齋叢稿》가 東仙學會 주선으로 刊行되었다. 1982년(壬戌) 음 8월 30일 享年 77세로 考終하여 同年 음 9월 초4일에 경기도 포천군 마명산 壬坐의 언덕에 安葬하였다. 이듬해인 1982년(癸亥)에 東仙學會에서 墓碑를 竪立하였다. 配位는 河陽許氏로 1男 2女를 두었다. 아들은 이름이 錫이고 딸은 徐吉洙와 韓錫範에게 각각 出嫁하였다. 錫의 아들은 永禹, 永成이고, 徐吉洙의 아들은 相珪이고, 韓錫範의 아들은 一冕, 宗冕이다. 학문으로 交遊한 분으로, 同門의 交友로는 濤山 成純永, 臨堂 河性在 같은 분들이 있고, 永川 鄕內로서는 中齋 李好大, 晦宇 辛檍, 愚坡 李宗基, 東洲 崔碩基, 東陵 鄭華植, 老田 鄭煥國, 龍州 曺逷 같은 분들이 있고, 기타 지역으로서는 山康 卞榮晩, 玄圃 李炳洪, 陶南 趙潤濟, 心齋 趙國元 같은 분들이 많으나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그리고 門下에 出入한 이로는 李翼成氏를 비롯하여 李漢祚, 曺永祿, 安秉直, 金晉均, 金泰永, 洪元植 等 수십 명에 이른다. 선생은 오직 학문에만 관심이 깊었을 뿐, 세상의 부귀영화라든가 재물의 이해관계라든가 인물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않았으며, 술은 매우 즐기셨으나 아무리 취하여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지식과 높은 학덕을 지니고서도 이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言行은 眞率하고 꾸밈이 없었으므로, 對面해 보고 對話해 본 분들은 그러한 인품에 感服하여 모두가 “于人 先生은 君子로서 손색이 없는 학자다.”라고 하였다. 다음 몇 분의 評을 살펴보면, 金喆熙 先生은 墓碣銘에서 “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여기며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긴다.’는 것을 그러하다는 말만 들었었지 그러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니 于人 先生 曺公이 바로 그러한 분이었다.”라고 하고, 또 山康 卞榮晩이 公에 대해 評하여 말하기를 “畿湖의 학자들이 자리 하나 양보해야 하겠다.”라고 했다하였으며, 李翼成 先生은 行狀에서 “후덕하신 기상에 인자한 품성으로 오만한 기색이 몸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저속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으셨으니 이는 아름다운 자질에 學力으로 윤택하게 해서이다.”라고 하고, 李鎭泳 先生은《夙夜齋叢稿》 跋文에서 “語訥한 듯하면서도 辨說은 곧 이치에 맞는 말이고,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취하시는데, 이런 것은 우리들이 배우고자해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나 백가지 중에 하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愚鈍한 자이다. 선생의 評傳을 쓸 만한 적임자가 못 되나 편집자의 요청에 의하여 주제넘게《夙夜齋叢稿》에 실린 家狀, 行狀, 墓碣, 跋文 등을 참고하고, 평소에 듣고 느낀 바를 약간 보태어 이상과 같이 대략 기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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