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굴어당의 한시.논어.맹자

http:··blog.daum.net·k2gim·

龍田 金喆熙 先生을 追慕함

굴어당 2010. 12. 19. 22:22

제 목 龍田 金喆熙 先生을 追慕함
글쓴이 오재석
글정보 Hit : 324, Date : 2010/07/19 11:13
 嗚呼痛哉라!
 漢學의 큰 별이 떨어졌도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鷄初鳴이면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고 외우며 수신에 힘쓰셨으니, 끝내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셨다. 고향 친구였던 李淵民 家源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罔談彼短 靡恃己長’이라는 문장을 보면 선생의 性品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나 光復과 戰亂 등 나라의 격동기를 지내며 앞길이 막히는 때를 여러 번 만나 고초를 겪던 선생께서는, 先祖들이 10대를 이으며 뿌리를 내렸던 고향 안동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으셨다. 이후 선생께서는 國史編纂委員會와 民族文化推進會에서 ‘各司謄錄’ ‘備邊司謄錄’ ‘承政院日記’ ‘星湖僿說’ ‘三峯集’ ‘谿谷謾筆’ 등의 번역 사업에 관여하여 평생을 바치셨다.
 
 선생께서는 草書 讀解에 一家見이 있으셨다. 1993년부터 國史編纂委員會가 草書 解讀 능력을 가진 漢學者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만든 연수과정에서 초서를 가르쳐 후학자 양성에도 一助하셨다. 龍田 선생께서는 1915년 1월 21일 寅時에 慶北 安東市 禮安西面 沙川坊에서 탄생하셨다. 성품이 온화하시고 外柔內剛으로 일생동안 학문에 전념하신 한문학의 大家셨다.6세에 처음으로 祖父님께 童蒙先習을 배우며 兼해서 字畫을 익히고, 8세에 小學을 堂叔父님께 배우고 날마다 배운 것을 외우며, 13세에 通史(通鑑ㆍ史記)와 四子二經(四書ㆍ詩經ㆍ書經)을 모두 읽고 아울러 註解까지 외우고, 여름에는 詩文과 詞賦를 익히셨다.14세에 결혼하여 3남3녀를 키우며 多福하게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며 자녀를 가르치고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18세에 權省齋 相翊 선생을 모시고 慕蘭山齋에서 親友들과 같이 大學과 中庸을 배우셨다. 1934년에 姜檜山 信赫과 李荷汀 鍾國과 族大夫 萬愚 悳淵 諸公과 山水契를 淸凉山에서 결성하여 학우끼리 서로 도와 學德을 닦으셨다. 1935년에 酉谷 大酉館에 가서 省齋集 淨本之役을 도우셨다. 1937년에 權錫叜 鎬胤과 李淵民 家源과 李仲由 轍和 등 여러 친우가 靈芝山 精舍에 모여 古文辭를 익히니, 그때 李愛𧯑 和聖 선생이 考監을 맡으셨다. 이 해 가을에 曉庵集 淨本의 일에 초대되어 數旬을 돕고 돌아오셨다. 1941년 봄에 李淵民과 더불어 서울에 와서 卞山康 榮晩 선생을 臥牛山 寓舍에 방문하여 歷代古文辭 및 여러 가지 학업을 마치자, 선생에게 歐陽詢 筆帖을 주면서 말하기를 “유려한 草書이니 아낄만하다.” 하였다. 1946년에 成均館司成 明巢雲 義喆이 초청하여 古書籍의 句讀作業을 부탁받아 수년간 句讀作業을 하셨다. 1950년에 庄土를 팔고 湖西의 大德郡 杞城面 龍沼里로 이사하여 田畓과 林野를 매입하여 다시 농업을 시작하셨으나 국가의 軍用地로 빼앗기고 6 ․ 25사변이 일어났다. 1960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승정원일기’의 교열과 句讀의 일을 맡아 13년에 마치셨다. 이어서 各司謄錄 교열과 句讀의 일과 ‘備邊司謄錄’ 국역교열과 ‘광해군일기’ 句讀의 일을 20년간 맡으셨다.

 1975년 民族文化推進會 國譯硏修院 강사와 古典國譯校閱과 韓國文集叢刊 句讀와 監修의 일을 18년간 맡으셨다. 그리고 이해 가을에 成均館 釋奠 執禮를 맡으셨다. 1984년 봄에 同聲會 여러 친우와 더불어 힘을 합하여 聽源亭 一棟을 陜川 伽倻山 紅流洞에 지어서 늘그막에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하게 정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그 산이 너무 높지도 않고 平順했기 때문이었다. 1987년에《天海亭文稿》1책 18권이 간행되어 辭 ․ 賦 ․ 詩 ․ 書牘 ․ 記 ․ 識 ․ 跋 ․ 祝文 ․祭文 ․ 上梁文 ․ 傳 ․ 行狀 등 주옥 같은 글이 수록되었다. 1991년 孟夏에 觀水會 여러 친우와 더불어 中國旅行을 떠나셨다. 처음 上海로부터 浙江省과 吉林省을 지나 비틀거리며 長白山의 정상에 올라 天池를 굽어보고 한 번 휘파람을 불고 돌아오니,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의 슬픔을 禁할 수 없었다. 다시 山東의 泰山과 陝西의 萬里長城에 올라 天下를 굽어보고 감탄하셨다. 중국 여행 중에 많은 詩를 지으셨으나 한 수만 소개하겠다. 咸言香港最繁華 모두 香港이 가장 번화하다고 말하나 萬國通商此一涯 온 나라의 통상 이 한 곳에서 다하네勿太逐風貪寶玉 너무 풍속을 따라 보옥을 탐하지 말라 古來殃禍摠由奢 옛날부터 재앙이 모두 사치함에 달렸도다. 紙面 관계로 많은 詩를 모두 소개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1992年에《天海亭續稿》1책 18권이 간행되었다. 1999年에《天海亭再續稿》1책 11권에 續稿와 같은 내용이 간행되었다.《天海亭三續稿》1책 7권의 遺稿가 明年 내로 간행될 계획이니, 모두 4책 54권이다. 선생께서는 많은 遺稿와 漢文學에 업적을 남기시고 2008년 11월 5일 酉時에 別世하셨다. 선생은 學德이 높았으나 겸손하여 자랑하지 않았다. 특히 저술은 양적ㆍ질적으로 현대에 독보적이라고 하겠으나, 詩보다 文에서 더욱 높게 칭송되고 있다. 思想的으로는 孔子를 가장 높였으며 韓退之ㆍ陸象山을 옹호하고, 孟子 그리고 程子ㆍ朱子는 덜 옹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程朱를 옹호하는 이들의 비평이 있었으나 끝내 儒學의 宗旨를 굳게 지킨 儒學者였다. 文體는 卞山康의 자기 의견의 글을 쓰라는 지도를 받아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草書 讀解에는 神功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선생께서는 성품이 인자하고 자상하며 弟子들을 일생동안 不撤晝夜 정성으로 가르쳐주고 인도하였으며 자식같이 사랑해 주셨건만 저희는 어버이처럼 받들지 못하여 悔恨을 금할 수 없다. 이제 선생께서는 94세로 영영 가셨으니 어디에서 낭랑한 玉音을 듣겠는가? 慶北 安東市 綠轉面 西三里 南山 甲坐에 모셨으니 언제나 뵐 수 있겠는가?아! 哀痛하도다.

문하생 吳在錫 삼가 씀.

: 天海亭學會는 용전 선생 문하생 모임. 천해정은 용전 선생님 別號.
1749  于人 曺圭喆 先生을 回顧하며 장재한
3115  참선비 硏靑 吳大泳 선생의 생애와 학문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