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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원나라 공주 80년간의 ‘통혼 정치’<최영창 기자의 역사속으로>

굴어당 2011. 1. 15. 18:39

고려 충렬왕이 세자시절이던 1274년 원나라에서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쿠투루칼리미쉬에게 장가든 이래 고려의 왕위계승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중의 하나는 몽골(원) 황실 공주와의 결혼이었습니다. 물론 각각 12세와 15세의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충목왕과 충정왕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공민왕이 1356년 반원정책을 펴기 전까지 고려 왕들은 세자시절 또는 즉위 직후 어김없이 원 황실의 공주들과 결혼을 했지요.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부마국체제’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고려와 원이 대대로 통혼(通婚)관계를 맺은 것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몽골 황실은 칭기즈칸 선조 또는 칭기즈칸대(代)부터 옹기라트와 오이라트, 옹구트, 위구르 등의 특정 부족과 대대로 통혼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신분이나 정치적 위상이 높은 몽골 공주의 하가(下嫁)는 솔선해서 귀부한 공로에 대한 포상의 의미와 함께 이들을 확실한 자기세력으로 편입시키는 효과가 있었지요.

구체적으로 무신정권을 청산하고 왕정복고를 이뤄내려는 고려 왕실의 입장과 남송(南宋)과 고려의 연합을 방지하고 고려를 일본정벌의 선봉에 세우고자 하는 원 황실의 입장이 일치해 양국의 통혼은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충렬왕은 원 제국의 부마가 됨으로써 국내 신료들과 원나라 사신과의 관계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된 반면, 중국 황제의 친딸인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에 압도당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지요. 공주의 동침 요구에 충실히 응했지만 간혹 욕설과 함께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은 위상의 차이가 확연해 양보와 타협으로 그런 대로 결혼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난 충선왕은 원나라 진왕(晋王) 카마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 부다시린과 결혼했는데 각각 당시 황제였던 성종의 고종사촌이자 조카로 서로 위상도 비슷하고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계국대장공주와 고려출신 조비(趙妃)와의 불화가 정치적 분란으로 확산되면서 충선왕의 폐위와 함께 이혼 직전까지 갔었지요.

고려 왕과 결혼한 원나라 공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제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종왕가(宗王家)의 공주 등으로 격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고려 왕과 결혼 당시 원나라 황제와의 친족관계를 촌수로 따져보면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촌,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3촌, 충숙왕비 복국장공주 5촌·조국장공주 4촌, 충혜왕비 덕녕공주 7촌, 공민왕비 휘의노국대장공주 5촌 등이지요. 이 가운데 위상이 가장 약했던 덕녕공주가 충혜왕 사후 원나라 공주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충목왕과 충정왕대(代) 섭정의 자격으로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것도 특징입니다.

ycchoi@munhwa.com

<고정물>최영창 기자의 역사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