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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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대한 소고 -성균관

굴어당 2011. 1. 16. 18:38

 

* 복잡하다고 생각 되시는 분은 1번과 2번을 읽으신 후 곧바로 끝 부분의 결론을 가서 읽어보시고, 중간 번호들은 참고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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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目 : 禮書로 考察한 바른 절에 關한  調査 件.  2010年 2月 11日  報告者 : 房東珉 企劃出版部長

바른 절이란 무엇인가?

현재 행해지는 절에 대한 교육과 설명, 용어의 정의 등이 선현들의 학설과 많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이 되어 후학들에게 혼동만 가중시키고 있다. 

이에 문헌을 통해서 선현들의 절에 대한 정의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절에 대해 정립하여 보급하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선현들의 학설을 학자별로 구별하여 서술하고, 필자가 약간의 설명을 더하고자 한다. 

1.『주자대전』의 궤좌배설(跪坐拜說)

옛사람들의 좌(坐)는 두 무릎을 꿇고 땅에 댄 다음 그 발바닥을 뒤집고 그 위에 앉으니, 바로 지금의 호궤(胡跪)와 같다. 숙배는 양손을 공수하여 내려서 지면에 이르게 한다. 돈수는 머리를 손 위에 조아리는 것이다. 계수는 공수하여 땅에 짚은 손을 치우고 머리를 지면에 대는 것이니 또한 오늘날의 예배(禮拜)와 같은 것이다. 모두 무릎을 꿇고 하기 때문에 더욱 공손함이 극진하게 된다.

(古人之坐者, 兩膝著地, 因反其蹠而坐於其上, 正如今之胡跪者. 其爲肅拜, 則又拱兩手而下之至地也. 其爲頓首, 則又以頭頓于手上也. 其爲稽首, 則又却其手而以頭著地, 亦如今之禮拜者. 皆因跪而益致其恭也.)

2. 사계전서 24권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번역 : 고전번역원 인용

○ 《사림광기(事林廣記)》에 이르기를, “무릇 읍(揖)을 할 적에는 다리를 조금 넓게 벌려서 섰을 경우 편안하게 한다. 읍을 할 때에는 모름지기 무릎을 곧게 펴고 몸을 약간 구부리며, 머리를 낮추고 눈은 자기의 신발 끝을 보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읍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된다. 그리고 손은 단지 무릎 가에만 이르게 하고, 무릎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존장(尊長) 앞에서 읍을 할 적에는 손이 모름지기 무릎 아래로 내려가게 해야 한다. 읍을 마치고서는 손을 적당한 때에 끌어 올려서 가슴 앞에서 교차시킨다. 읍을 할 적에는 모름지기 손을 다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엄지손가락만 옷소매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을 선례(鮮禮)라고 하는데, 이는 존장을 뵐 적에 하는 예가 아니다.” 하였다.

○ 무릇 아랫사람이 절을 하는 예는, 먼저 한 번 읍을 하고 조금 물러나서 다시 한 번 읍을 하고, 이어서 부복(俯伏)하되, 양쪽 손을 나란히 하여 땅에 대고 먼저 왼쪽 다리를 꿇은 다음 오른쪽 다리를 꿇는다. 그러고는 약간 왼쪽으로 몸을 틀고서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한 다음 곧바로 일어나는데, 먼저 오른쪽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서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댄 다음 왼쪽 다리를 일으켜 세운다. 이렇게 잇달아 두 번 절하고 일어나 앞으로 다가가서 날씨에 대한 안부를 여쭙고 조금 물러나서 읍을 하며, 다시 두 차례 절을 하고 앞으로 다가가서 다시 그동안의 안부를 여쭙고 경하하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처음에 잇달아 사배(四拜)를 한 다음에 안부를 여쭈어도 된다.

주) 『사림광기』 : 일용백과전서 형태의 고대 민간 유서(類書)로 저자는 남송(南宋)말기의 진원정(陳元靚). 원명대를 거치면서 증보 보완하였고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됨. 명나라 때 편찬한 [삼재도회]와 청나라 때 편찬한 [고금도서집성]의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

 

3. 鶴峯先生文集卷之六 雜著 風俗考異

우리나라의 부인은 숙배의 예를 차린다. 양 무릎을 땅에 꿇고 머리는 들고 허리는 펴고서, 양 손을 땅에 대고 절한다. 남자는 재배를 하고 부인은 사배를 한다.
(我國婦人。有肅拜之禮。兩膝跪地。擧首伸腰。兩手至地而拜。男子再拜。則婦人四拜。)

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 퇴계 이황(李滉)의 고제(高弟) 

4.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五十四 雜著 編錄 隨筆錄
배례에 대해서는 일찍이 주자의 설로서 헤아려보건대 이미 무릎 꿇고[跪]나서, 다시 앉은[坐] 후에 거듭 이어서 절[拜]하는 것이니 세 가지가 늘 서로 연결된다. 이제 다시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면 두 손을 공수하여 땅에 이르는 것을 절이라 하고, 두 손을 공수하여 내리는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국궁(鞠躬)이라고 하고, 아직 지면에 닿기 전에 가지런히 두 무릎을 굽히는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궤(跪)라고 한다. 대개 두 손을 공수하여 지면에 이르는 사이에 반드시 국궁과 궤의 두 가지 절도를 갖추어야 예가 이루어질 수 있고 앉는 법도에 문제될 것이 없다. 참으로 국궁이란 것은 옛날의 읍이 조금 변한 것으로 지금도 매우 중요하니 그 형세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손이 땅에 닿은 후의 모든 절의 절도는 이미 주자의 구배설(九拜說)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
(拜禮嘗以朱子說度之。謂旣跪復坐而仍拜。三節常相仍也。今更詳之。其以兩手拱至地者。所謂拜也。其拱兩手而下之。今人謂之鞠躬。其未至地之前齊屈兩膝。今人謂之跪。蓋於兩手拱至地之間。必有鞠躬跪二節。可以成禮而無事於坐法。誠以鞠躬, 是古揖之小變者。而今世所重。其勢不得不如此矣。其至地之後。諸拜節度已具朱子九拜說中。) 

주) 박세채(朴世采 :1631~1695) : 조선 효종(孝宗)에서 숙종(肅宗) 때의 문신·성리학자.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에게 수학하고,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배향을 주장함. 예송논쟁(禮訟論爭) 때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고 많은 저서를 남김. 

5. 鹿門先生文集卷之六 書 答金伯高 五月
『가례집람』의 도설에서 『사림광기』를 인용하여 배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절하는 의식은 주자의 궤(跪), 좌(坐), 배(拜)에 대한 학설에서 또한 그 대략을 상고해 볼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무릇 절이란 모두 마땅히 두 무릎을 가지런히 굽혀야 한다. 마치 오늘날의 예배(禮拜)와 같은 것이다. 또 말했다. ‘숙배, 돈수, 계수는 모두 무릎을 꿇고 하기 때문에 더욱 공손함이 극진하게 된다.’ 또한 <주자께서 말씀하신대로> ‘一坐再至(한번 앉고 다시 이르는 것)’를 인용하여 증명한다면, 곧 절할 때는 먼저 가지런히 두 무릎을 꿇은 연후에 두 손을 맞잡고 땅에 대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림광기』는 어느 때의 책인지 알 수 없다. 그 책에서 이른바 ‘부복(俯伏)이란 양손으로 가지런히 땅을 짚고 먼저 왼 발을 꿇고.....’라고 한 것은 주자의 설과는 정확하게 상반된다. 주자께서 이른바 ‘어느 때부터 변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 것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것을 지칭한 것인 ! 듯한데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겠다.

(家禮輯覽圖說。引事林廣記拜禮云云。拜儀。朱先生跪坐拜說。亦可考其大槩矣。其曰凡拜皆當齊屈兩膝。如今之禮拜曰。肅拜頓首稽首。皆因跪而益致其恭。又引一坐再至爲證。則拜時先齊跪兩膝。然後乃以兩手拱至地可知。事林廣記不知何時書。而其所謂卽俯伏。以兩手齊按地。先跪左足云云者。與朱子說正相反。朱子所謂不知自何時而變。而今人有不察云云者。似指此耳。未知如何。)

주) 임성주(任聖周 :1711~1788) : 조선 영조(英祖)에서 정조(正祖) 때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율곡(栗谷)을 사숙(私淑)하였으며,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지만 중년 이후에는 낙론(洛論)의 입장을 벗어나 호락(湖洛)의 양론(兩論)을 모두 비판하면서 기일원론(氣一元論)적 입장에서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여 성리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음. 

주) 사림광기는 남송말기의 책으로 시대에 따라 여러 판본이 있으며, 명나라의 『삼재도회』 등의 참고가 되는 책으로 임성주 선생이 모른다는 것은 이상함.

6. 勉菴先生文集卷之十三 書 答李昌輅 殷相

자식이 부모에게 절하는 것과 젊은이가 어른에게 절할 때의 무릎 꿇고 엎드리는 절도가 사람마다 모두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먼저 두 무릎을 굽히고 절하는 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먼저 두 손을 내리고 절하는 자도 있다. 대개 먼저 두 무릎을 굽히는 것은 숙배에 가깝다. 숙배는 군중(軍中)에서의 절과 부인의 절이므로 절 가운데 가장 가벼운 절이다. 부모와 어른의 앞에서 감히 군중에서 하는 절로써 뵐 수는 없다. 먼저 두 손을 내리는 것은 계수(稽首)에 가깝다. 계수는 임금을 배알하는 절이니 절 가운데는 가장 중대한 절이다. 부모와 어른의 앞에서 감히 임금을 배알하는 절로 뵐 수는 없다. 혹시 따로 부모와 어른에 대한 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배례에서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리는 것에 대한 선후(先後)와 가부(可否)를 감히 단정하여 결론짓지 못하겠다. 어떤 사람은 교궁(校宮)의 예를 차릴 장소에서는 앞의 학설을 적용하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과 어른에게는 뒤의 학설을 적용하니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 싶다.
(子拜父母。少拜尊長。跪伏之節。人皆不同。或有先屈兩膝而拜者。或有先下兩手而拜者。蓋先屈兩膝則近於肅拜。肅拜是軍中之拜與婦人之拜。而拜中最輕之拜。則父母尊長之前。不敢以軍中之拜見之也。先下兩手。則近於稽首。稽首是拜君之拜。而拜中最重之拜。則父母尊長之前。不敢以拜君之拜見之也。恐不知又有拜父母尊長之拜耶。拜禮屈膝下手先後當否。不敢斷案。或於校宮禮場。用前說。君父師長。用後說。不至大悖也歟。)

주) 최익현(崔益鉉 : 1833~1906) : 조선 철종(哲宗)에서 근대의 문신·학자.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을 비판하여 실각시켰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펼치며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서 순절함. 

7. 俛宇先生文集卷之百十九 書 答李輔卿 鉉郁
배례하는 의식에서 계수와 돈수는 마땅히 고례와 같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에 넓은 갓을 쓰고 있어 부복(俯伏)할 때에 갓이 비스듬히 땅을 받치고 있으므로 머리를 다시 낮출 수가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수(空首)를 하니 이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이지 고의로 거만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절하면서 손을 맞잡지 않는 것은 시골의 풍속이 간혹 그러하다. 그러므로 두 손을 교차하여 포개고, 두 무릎을 가지런히 꿇어야 바야흐로 절하는 의식이 완성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두 손을 옆으로 공수하여 먼저 가슴위에 댄 연후에야 바야흐로 몸을 굽혀 땅에 엎드린다. <일부러> 모양을 만드는 것이 심히 아름답지 못한데 그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읍이란 반드시 허리를 굽히고 손을 눕히니 이른바 형절(磬折 : 경쇠의 모양처럼 굽힌다는 뜻으로 선채로 상체를 깊게 숙여서 하는 절. 磬屈이라고도 한다.)이란 것이 그러하다. 다만 허리를 굽히면 윗옷의 앞섶이 늘어지고 뒷태는 곧추서서 흡사 가지런하지 못한 것이 요즘의 ‘첨여(襜如)’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다면첨은 가지런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첨유[襜帷:수레 위에서 사방으로 덮는 휘장]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인가?

수레의 첨유는 사방이 넓게 트이고, 사람이 그 가운데에서 우뚝 서있는 것이 나무를 심은 것 같다. 읍할 때에 옷의 앞뒤가 모두 몸에 붙어있지 않아 둥글게 주위가 비어있고 몸이 그 안에 있으니 단정하게 우뚝 서 있는 것인 듯하다. 항상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다.

<지위가> 낮고 어린사람이 어른에게 읍하는 것은 고서에 적확한 증거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송나라 때에 처음으로 이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의 아래에서 절하는 것과 문 밖에서의 배욕(拜辱)과 배송(拜送)은 마땅히 계수해야 할 때는 계수를 하고, 마땅히 돈수할 때는 돈수를 해야 한다. 어찌 반드시 숙배를 하는 것인가? 이것은 모두 억측이다. 바라건대 반복해 보기 바란다.

拜儀之稽首頓首。當如古禮。而東人頭戴濶笠。俯伏之際。笠匡拄地而頭不能更低。遂成空首。此其勢然也。非故作倨傲也。拜而不拱。鄕俗或然。然兩手交加。兩膝齊跪。方成拜儀。今或有兩手橫拱。先着在胷膛上。然後方屈身而伏地者。做貌做樣。似甚不雅。未知其有據否。

揖必折腰俯手。所謂磬折者然也。但折腰則衣前嚲下。衣後揵上。似不齊整。而今曰襜如也。誠若可疑。抑襜非整意。而只是如襜帷之謂耶。

車之襜帷。四周空濶。而人在其中。特立若植。當其揖時。衣前後皆不貼身而虛圓周圍。身在其中。端直特立歟。尋常致訝而未得也。卑幼之揖尊長。古無的證。抑宋時始有此儀否。堂下之拜及門外之拜辱拜送。當稽首則稽首。當頓首則頓首。豈必以肅拜爲也。此皆臆見。幸垂反覆。)

* 면우 선생의 글은 본 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절의 전체를 파악하고 요즘도 시속에서 잘못 알고 있는 절의 전반을 알 수 있기에 추가한다.

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1864~1919) : 유석(幼石) 이진상(李震相)의 문인(門人).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상해로 보내어 유림대표 137인이 서명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발송하도록 함.

8.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二十二 書 答洪明甫
주자가 말했다. “궤(跪)와 좌(坐)는 조금 다르다. 두 무릎을 지면에 붙이고, 허리와 넓적다리를 곧게 펴서 자세를 세우는 것을 궤(跪)라 하며, 두 무릎을 지면에 붙이고, 궁둥이를 바짝 붙여서 조금 편안하게 하는 것을 좌(坐)라 한다. 궤와 좌 두 가지는 서로 닮았으나 다만 하나는 세우고 하나는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같지 않을 뿐이다. 이것으로써 판단해 볼 때, 요즘의 이른바 궤라는 것은 옛날의 좌(坐)와 같다. 옛날 사람들은 평상시 거처함에 반드시 좌를 하고 있다가 공경할 일이 있으면 몸을 끌어당겨 허리와 넓적다리를 곧게 펴서 예의를 다하였으니 이것을 이른바 궤라 하며, 또는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기(跽)라고도 하였다. 『범휴전』에서 ‘秦王跽而請(진왕이 무릎 꿇고 간청하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양효왕세가』에서 ‘太后有言。帝跪席擧身曰諾(태후가 말하자 임금이 궤(跪)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대답했다.)。’라고 한 것이 또한 이것이다. 불가에서의 가부좌는 무릎을 눕혀 서로 향! 하게 하되 한 다리는 무릎의 아래에 두고 한 다리는 무릎의 위에 겹치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반좌(盤坐)라는 것은 가부좌와 대략 같으나 다만 두 다리를 교차하여 무릎 밑에 두는 것이 조금 다르다.”

퇴계가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소학에서부터[어려서 배울때부터] 우좌(隅坐)를 익혀 능히 편안해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미 옛날 사람처럼 편안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자가 ‘반좌가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대개 몸과 마음을 수렴하고 재계하고 씩씩하며 가지런하게 하면 때때로 반좌를 할 수 있으니, 위좌(危坐)의 엄숙함만은 못하지만 스스로 의리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좌와 단좌를 함께 말할 수 있고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朱子曰 跪與坐小異。兩膝着地。伸腰及股而勢危者爲跪。兩膝着地。以尻着蹠而稍安者爲坐。兩事相似。但一危一安少不同耳。以此觀之則今之所謂跪者。卽古之坐也。古人常居必坐。有敬事則引身而伸腰股以致禮。是之謂跪。亦謂之危坐。亦謂之跽。范睢傳秦王跽而請是也。梁孝王世家太后有言。帝跪席擧身曰諾。亦是也。佛之跏趺坐則偃膝相向。而一足藏於膝底。一足加於膝上者是也。所謂盤坐者。與跏趺略同。而但兩足交藏於膝底爲少異。

退溪曰 古人自小學隅坐習熟而能安。今人旣不能如古之習安。故朱子有盤坐何害之說。盖能收斂身心。齊莊整齊。則有時盤坐。不如危坐之嚴肅。自不害義理。故通謂之正坐端坐而可行也。)

 

9. 屛溪先生集卷之二十六 書 答李泰以 庚辰
재배하는 법이 사람마다 다른 것이 많은데 고인들께서 행한 바는 과연 어떠했을까? 『사림광기』에 절하는 법이 실려 있다. 한번 절하는데 두 번 읍한다. 먼저 한번 읍하고 조금 물러나서 또 한 번 읍하고 부복한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먼저 왼 발을 꿇고, 다음에 오른 발은 펴고 계수하여 지면에 댄다. (일어날 때는) 곧 먼저 오른 발을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를 짚은 다음 왼 발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두 번하면 재배가 된다. 만약 4배라면 이와 같이 네 번한다.

이러한 법은 한번 절하고 두 번 읍하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절하기 전에 두 번 읍하고 절한 후에 읍이 없는 것은 미비한 점이 있는 듯하다. 장차 먼저 한번 읍하고 조금 물러나서 다시 한 번 읍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어쩌면 당시의 중국 풍속이 이와 같은 것을 숭상하였는가? 작년에 여러 벗과 함께 절에 대해 강론 할 때, 이에 대하여 한 번 읍하고 이어서 부복하는 것으로 조금 고쳤다. 이러한 법칙에 의거하여 일어나고, 평신한 후에 다시 한 번 읍한다. 대체는 이와 다름이 없으나 절하기 전에 조금 물러나서 한 번 읍하는 것을 없애고, 평신한 후로 이 읍을 옮겨서 하도록 했다. 나는 곧 평일의 배례를 이와 같이 하는데 과연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계수는 뒤로 오면서 이러한 법이 없어졌으니, 오른 발을 펴는 것은 장차 계수를 하고자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계수의 제도가 없으니 오른쪽 다리도 마땅히 꿇어야 한다.!

(再拜之法。人多不同。古人所行。果何如也。事林廣記。有作拜之法。一拜再揖。先一揖少退。又一揖。卽俯伏。以兩手按地。先跪左足。次伸右足。稽首至地。卽先起右足。以雙手齊按膝上。次起左足。如是者再則爲再拜。若四拜則如是者四矣。

○此法一拜兩揖則好矣。而拜前兩揖。拜後無揖。似未備。且先一揖少退。又一揖。全無意味。或當時中國俗尙如此耶。昔秊與諸士友講此時。於此而少改先一揖。仍俯伏。依此法而興。平身後更一揖。大體與此無異。而拜前無少退一揖。平身後移此揖而爲之。鄙則平日拜禮如此。果未知如何。稽首則後來無此法。而伸右足者。將欲稽首故也。今無稽首之節。則右足亦宜跪之也。)

주) 윤봉구(尹鳳九 : 1681~1767) : 조선 숙종(肅宗)에서 영조(英祖) 때의 학자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시문집인 병계집은 60권 30책. 

10.星湖先生全集卷之三十六 書 答秉休問目
주자가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좌(坐)는 두 무릎을 땅에 대고, 그 발바닥을 뒤집어서 그 위에 앉는다. 숙배란 또한 두 손을 맞잡아 내려서 지면에 이르고, 돈수란 또한 머리를 손 위에 조아리며, 계수란 또한 그 손을 치우고 머리를 지면에 대는데, 또한 오늘날의 예배와 같은 것이다. 모두 궤(跪)를 근본으로 하여 더욱 공손함에 이른다.”라고 운운했다. 이에 근거하면 무릇 예배(禮拜)는 반드시 먼저 무릎을 꿇은 다음에 공수하여 땅에 이르는 것이다. 일찍이 여러 집안의 배례하는 것을 살펴보니 먼저 무릎 꿇는 절목을 빼먹는데 또한 근거하는 바가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배궤(拜跪)함에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과 구별이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현재의 예를 들면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먼저 무릎 꿇는 의식이 없다. 『사림광기』에 이르기를 “절하는 예법에 한 번 읍하고 조금 물러나고 다시 한 번 읍하고 곧 부복한다. 두 손으로 가지런히 땅을 짚고 먼저 왼 발을 꿇고 다음에는 오른쪽 발을 편다. 약간 왼쪽으로 몸을 틀고서[略蟠還左畔]계수하여 땅에 이른다. 곧 일어날 때는 먼저 오른 발을 일으키고 두 손으로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고 다음에는 왼 발을 일으킨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중국에서 평상시 행하는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니 그것을 따르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朱子曰 古人之坐者兩膝著地。因反其蹠而坐於其上。肅拜則又拱兩手而下之至地。頓首則又以頭頓于手上。稽首則又卻其手而以頭著地。亦如今之禮拜者。皆因跪而益致其恭云云。据此則凡禮拜必將先跪。然後拱手至地也。嘗見家間拜禮。闕先跪之節。未知亦有所据耶。

拜跪不宜與事生者有別。今例事生無先跪之儀。事林廣記云下拜之禮。一揖少退。再一揖卽俯伏。以兩手齊按地。先跪左足。次伸右足。略蟠還左畔。稽首至地。卽起先起右足。以雙手齊按膝上。次起左足。此乃中國常行之禮如此。遵之無礙。)

주) 이익(李瀷 : 1681~1763) : 조선 숙종(肅宗)에서 영조(英祖) 때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중농사상(中農思想)에 기반을 두고, 한전론(限田論)·사농합일론(士農合一論) 등의 사회 개혁론을 주장함. 천문·지리·율산(律算)·의학 등에 능통하고, 저서로 『성호사설(星湖僿說)』·『곽우록(藿憂錄)』등이 있음.

11. 硏經齋全集卷之二十八 禮論七 拜揖說
『주례』의 9배에 배읍에 대한 설이 갖추어져 있다. 가규의 소에서 말하기를 ‘9배 가운데 계수(稽首), 돈수(頓首), 공수(空首), 숙배(肅拜)의 네 종류는 바른 절이고, 진동(振動), 길배(吉拜), 흉배(凶拜), 포배(褒拜), 기배(奇拜)의 다섯 가지는 일에 따라서 이름을 만들었으니 네 종류의 정배에 의거해서 만든 것이다. 대개 계수, 돈수, 공수, 숙배의 4종류는 서로 유래가 되어 만든 것이다. 계수가 가장 중하고 돈수가 그 다음이고 공수가 그 다음이고 숙배가 또한 가장 가벼운 것이다. 진동 및 흉배, 포배는 계수에서 근본 했고, 또한 길배는 돈수에서 근본 했고 기배는 공수에서 근본 하였다. 또한 고금의 풍속이 다르니 예도 혹은 따라서 변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주자향약』에서 말했다. 어린 사람이 절하면 궤(跪)하면서 부축해주고, 젊은 사람이 절하면 궤(跪)하면서 부축하고 반절로 답한다. 이는 곧 지금의 어른이 지위가 낮거나 어린 사람에게 답하는 의식인데, 다만 궤(跪)와 부(扶)의 의식을 행하는 사람이 드물다. 도사의 절에 이르러서는 두 무릎을 가지런히 굽혀서 함께 내린다. 대저 두 무릎을 함께 굽히는 것은 예배의 유풍이다. 중의 절은 두 손을 합장하여 이마를 받드니 이것이 이른바 막배(膜拜)라는 것이다. 동방의 절은 궤(跪)하여 절하고 한쪽다리를 끌었으니 이것은 고구려의 풍속이었다. 고례를 상고해보면 먼저 한 다리를 내리는 것을 당인들은 ‘아배(雅拜)’라고 했는데 어찌 이제도가 남아있는 것인가? 또한 요즘의 천한 노예들의 절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면서 손은 당에 대지 않거나, 혹은 부복하여서 손으로 또한 땅을 짚으니 곧 당하에서의 절로 그 의식은 같지 않다. 내가 『주례』의 구배법을 상고하고, 『주소』, 『서의』, 『가례』 및 제가의 학설을 절충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꾸고 변화된 것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 뒤바뀌고 사라진 것을 정돈하노라.

(周禮九拜。具有其說。賈䟽云九拜之中。稽首頓首空首肅拜四種。是正拜。振動吉拜凶拜褒拜奇拜五者。逐事生名。依四種正拜而爲之也。盖稽首頓首空首肅拜四者。相因而爲之。稽首最重。頓首次之。空首又次之。肅拜又最輕者。若振動及凶拜褒拜附稽首。又吉拜附頓首。又奇拜附空首。又古今殊俗而禮或從而變焉。

朱子鄕約曰 幼者拜則跪而扶之。少者拜則跪扶而答其半。此乃今人尊者。答卑幼之儀也。但跪扶之儀。鮮有行者。至若道士之拜。兩膝齊屈而俱下。夫兩膝齊屈者。乃禮拜之遺也。僧之拜。兩手合掌以受顙。此所謂膜拜也。東方之拜。跪拜曳一脚。此高句麗之俗也。考之古禮。先下一脚者。唐人謂之雅拜。豈此制之遺也歟。又今時賤隷之拜。俯而折腰。手不着地。或俯伏而手亦着地。乃堂下之拜也。其儀不同。余爲考周禮九拜法而折衷於注䟽書儀家禮及諸家說。以定其因革變除云。)

주) 성해응(成海應 :1760년~1839년) : 호 연경재(硏經齋), 난실(蘭室). 1788년 정조에 의해 奎章閣 檢書官으로 발탁되어, 규장각에서 왕명에 의해 각종 편찬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때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李書九 등의 北學派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經書 등을 토론하고 또한 각종 서적을 섭렵하며 학문적 소양을 쌓았다.

12. 硏經齋全集卷之二十八 禮論七 婦人拜解

『예기』소에 이르기를 “부인은 숙배를 바른 절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소의』에 이르기를 “부인은 길사에서는 비록 임금께서 내린 것에도 숙배한다. 시동이 되어 앉더라도 수배하지 않고 숙배한다.”라고 하였다. 무릇 숙배란 것은 절할 때 머리를 낮추는 것이다. 수배란 것은 손이 땅에 닿고 머리가 손 위에 있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 하사한 중한 것에도 다만 숙배하여 받는다. 비록 우제에 조고의 시동이 되어 앉아서 그 답배할 때에도 또한 수배하지 않고 다만 숙배하니 곧 부인의 절은 오직 숙배가 있을 따름이다. 다만, 지아비와 장자의 상을 당하여 손님에게 절할 때는 계상을 한다.

(禮䟽云 婦人以肅拜爲正。少儀云 婦人吉事。雖有君賜肅拜。爲尸坐則不手拜。肅拜。夫肅拜者。拜低頭也。手拜者。手至地而頭在手上。雖君賜之重。亦但肅拜而受之。雖爲虞祭祖姑之尸而坐。其答拜時。亦不手拜而但肅拜。則婦人之拜。唯有肅拜而已。但爲夫與長子之喪。拜賓則稽顙焉。) 

또한 혼례에서 신부가 시부모를 뵐 적에는 땅에 손을 짚고 절한다. 대저 부인은 가채가 넓고 귀걸이와 비녀 등이 많아서 만약 남자의 계수배나 돈수배를 본받아 신부로 하여금 땅에 부복하게 한다면 반드시 머리에 불안함이 있어서 의식을 망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숙배로써 행한다. 대저 숙배란 머리를 낮추되 땅에 닿지 않는 것이다. 만약 지아비와 장자의 상을 당하면 마땅히 머리를 들어내어 북상투를 할 것이다. 머리에 꾸미는 것이 없으므로 비록 계상을 하더라도 편리할 것이다.

(又昏禮新婦見舅姑則拜扱地。夫婦人髢䯻脩廣珥簪盛多。若効男子稽首之拜頓首之拜。使之俯伏于地。則必有不安於首而喪儀者矣。是故行之以肅拜。夫肅拜則頭低而不至地矣。至若爲夫與長子之喪則當露䯻而髽。頭無所餙。故雖稽顙而亦便矣。) 

(중략) 지금 우리나라 부녀의 절은 서서 두 손을 맞잡고 앉아 허리를 숙이되 머리는 손에 이르지 않는 것이 예배(禮拜)이다. 두 손을 나누고, 허리를 꺾고 머리를 숙이되 지면에 이르지 않는 것은 평배(平拜)이다.

(중략)今東方婦女之拜。立而拱兩手而坐。屈腰而首不至手者。禮拜也。分開兩手。折腰而俯首不至地者。平拜也。 

13. 愚伏先生別集卷之二 養正篇跋見原集 拜

무릇 절이란 한번 읍하고 조금 물러난 후, 먼저 왼 발을 꿇고 다음에 오른 발을 꿇어 머리를 숙여 땅에 이르면 일어난다. 먼저 오른 발을 일으키고 두 손을 가지런히 오른쪽 무릎에 놓고 다음 왼발을 일으킨다. 다시 한 번 읍한 후에 절한다. 그 의식의 법도는 자세하고 천천히 하는 것에 힘쓰며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凡拜。一揖少退。先跪左足。次跪右足。俯首至地而起。先起右足。以兩手齊按右膝。次起左足。再一揖而後拜。其儀度務爲詳緩。不可急迫。) 

주)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 조선 선조(宣祖)에서 인조(仁祖) 때의 문신·학자.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냄.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

14.霞谷集卷十九 經儀 拜揖

남자의 절은 왼손을 숭상하여 공수하되 왼손을 위에 둔다. ○ 차수는 왼손을 위에 둔다. 만약 상중이라면 오른 손을 위로 한다. ○ 절을 할 때는 가지런히 두 무릎을 꿇는다.

(중략) 여자의 절은 오른손을 숭상하여, 여자의 손은 오른쪽을 높다고 여긴다. 모든 절은 4로써 절도를 삼는다. 만약 시부모를 뵈면 삽지(扱地 : 땅에 손을 짚음)한다. 상주가 되면 계수하는데 남자의 절과 같다. <상사(喪事)에>상주가 되지 않았을 때는 수배한다. 손이 땅에 닿고 머리가 손에 있는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앉을 때 무릎을 꿇었다. 그러므로 절하기가 용이했다.”라고 하였다.

(男拜尙左手。 拱手而左手在上也。○叉手以左手在上。若喪則尙右。○拜齊屈兩膝 (중략)○女拜尙右手。 女手以右爲尙。每拜以四爲節。若見舅姑則扱地。爲喪主則稽首。 同男拜 不爲喪主則手拜。 手至地而頭在手也。朱子曰 古人坐也是跪。故其拜容易。)

 
주)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년~1736년) :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등과 교유. 양명학자로서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시조.  

15. 鶴庵集卷之三 華陽聞見錄 語錄

물었다. “부인의 절에서 그 의식이 어떠한 것입니까? 『구씨의절』에 숙배에 대한 설이 있는데, 머리가 땅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의 풍속에서 부인의 절은 모두 다만 앉기만 하고 엎드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숙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선생이 말했다. “아니다. 어찌 앉기만 하고 엎드리지 않는 절이 있겠는가? 숙배란 것은 부복하여 계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인의 절은 무릎 꿇고 엎드리기만 할 뿐이며, 단지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 것이다.” 물었다. “옛날에 부인은 무릎 꿇지 않는다는 글이 있는데 부인은 절할 때 또한 무릎을 꿇지 않는 것입니까?” 대답했다.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은 평상시의 절이다. 어찌 예배(禮拜)에 무릎 꿇지 않는 의식이 있겠는가? 부인의 예배는 넓게 맞잡아서 마땅히 가슴에 활처럼 되게 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완만하게 하여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머리를 두 손 위에 올린다.”

(問。婦人之拜其儀。何如丘儀有肅拜之說。而不以首至地云。則今俗婦人之拜。皆但坐而不伏。此可以肅拜言耶。先生曰。非也。豈有坐而不伏之拜乎。肅拜者。是俯伏而不稽首之義也。婦人之拜跪而俯伏而已。特不以首至地也。曰 古有婦人不跪之文。婦人拜時。亦不跪耶。曰。不跪是平常時之拜也。豈有禮拜而不跪之儀乎。婦人禮拜。張拱當心玄。從容舒緩屈膝而坐。以首加於兩手之上也)。

주) 최신(崔愼 : 1642년~1708년) : 宋時烈의 門人  

결론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절에 대한 이론을 대별(大別)하면 위에서 인용한 1.『주자대전』의 궤좌배설(跪坐拜說)과 2.『사림광기(事林廣記)』를 인용한 사계전서 24권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2가지 학설로 집약된다.

주자께서는 궤(跪) 한 후에, 좌(坐)하고, 배(拜)하는 것으로 예배(禮拜)를 설명한 것에 반하여, 사계선생은 『사림광기(事林廣記)』를 인용하여 부복(俯伏)하되, 양쪽 손을 나란히 하여 땅에 대고 먼저 왼쪽 다리를 꿇은 다음 오른쪽 다리를 꿇는다. 그러고는 약간 왼쪽으로 몸을 틀고서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한 다음 곧바로 일어나는데, 먼저 오른쪽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서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댄 다음 왼쪽 다리를 일으켜 세우는 순서로 절을 설명하고 있다.

사계선생과 대체로 궤(軌)를 같이 하는 예학자로는 우복 정경세 선생 및 병계 윤봉구 선생인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사계 김 선생과 우복 정 선생, 두 분의 공통점은 본 글에서 인용한 국내 예학자 가운데 가장 연대! 가 앞선다는 점이며, 병계 윤 선생은 사계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면암 최 선생의 학설은 2가지 학설을 모두 소개하면서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듯하며, 숙배가 무릎을 꿇는 가벼운 절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 주자의 ‘지금의 예배라는 것은 모두 궤(跪)로 인하여 더욱 그 공손함이 이루어진다.(如今之禮拜者. 皆因跪而益致其恭也.)’는 말씀에 소홀한 듯하다.

대부분의 예학자들은 그 당시 무릎을 꿇는 것과 공수한 손을 짚는 것의 선후가 실재로는 혼재(混在)함을 인정하면서도, 정배(正拜)인 계수, 돈수, 공수, 숙배 등은 반드시 무릎을 꿇고 양 손을 공수한 상태로 땅에 짚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일은 국내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조사한 명문가의 절인데, 그 조사에 의하면 7개 명문가의 숙배(肅拜)를 조사한 바, 6개 가문은 앉은 상태에서 절을 하였고, 1개 가문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절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성균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숙배는 무릎을 꿇고 하는 절을 바른 절로 규정하여 현장에서 지도하고 있고, 남자의 바른 절은 [사림광기]에 근원을 둔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설에 의하여 지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숙배는 많은 가문에서 실제 행하는 것과 반대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남자의 절은 많은 선현들께서 주장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명제에 반한 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다. 

이상으로 절의 대강을 살펴본 본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남자의 절>

주자와 많은 선현들이 주장한대로 ‘정배는 모두 궤(跪) -> 좌(坐) -> 배(拜)의 순으로 바로잡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호 이익 선생님께서 언급한 아래의 두 가지 말씀은 이율배반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궤(拜跪)함에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과 구별이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현재의 예를 들면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먼저 무릎 꿇는 의식이 없다. (拜跪不宜與事生者有別。今例事生無先跪之儀。)’

㉯‘『사림광기』에 이르기를 “절하는 예법에 한 번 읍하고 조금 물러나고 다시 한 번 읍하고 곧 부복한다. 두 손으로 가지런히 땅을 짚고 먼저 왼 발을 꿇고 다음에는 오른쪽 발을 편다. 약간 왼쪽으로 몸을 틀고서[略蟠還左畔]계수하여 땅에 이른다. 곧 일어날 때는 먼저 오른 발을 일으키고 두 손으로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고 다음에는 왼 발을 일으킨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중국에서 평상시 행하는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니 그것을 따르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즉, 중국에서 평상시 행하는 예절도 그러하고, 우리나라도 또한 『사림광기』에 준한 사계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손으로 먼저 지면을 짚고 좌우 무릎을 꿇는 순으로 절을 행하는 것이 또한 현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자의 절>

모든 현대의 예절서에는 숙배를 ‘큰절’로 소개하고 가르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예서의 어디에도 숙배를 큰절이라고 소개한 글은 없다. 오히려 제일 가벼운 절, 또는 군중[軍隊 禮節]에서 행하는 절이라는 소개가 있을 뿐이다. 가령 백보 양보하여, 숙배를 큰절이라고 인정한다면 현구고례(見舅姑禮) 때에 행하는 예배(禮拜)나, 남편이나 장자가 사망했을 때에 올리는 계상(稽顙)은 부득불 ‘큰큰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예서에서의 숙배는 양손을 공수하여 땅을 짚는데 비해, 요즘 교육하고 있는 숙배는 양손을 이마 부분에 올리고 절을 한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른 절은 예서 및 학설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바른절’ 또는 ‘예배(禮拜)’로 교육시키고, 현실에서 뿌리 깊게 존재하여 내려온 절 또한 이미 습관이 오히려 풍속이 되어 이제 갑자기 개혁할 수는 없으니 ‘일반 절’로 가르치면서 시간을 두고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사족이지만 위의 내용가운데 절할 때 공수하지 않고 땅을 짚는 것은 시골의 풍습이라고 한 점, 양 손을 가슴에 포갠 후에 땅에 엎드리는 것의 괴이함을 지적한 점 등등은 당시 조선의 절의 실정(實情)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많은 가정에서 잘못 시행하고 있는 예절을 바꿀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번역하다보니 번역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제현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