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릉(敬陵) 추존왕 덕종(세조 맏아들 의경세자)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경릉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와 그의 소혜왕후 한씨의 쌍릉이다.
후일 그의 둘째아들(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서오릉에 처음 들어선 릉으로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세조가 직접 찾아나선 자리라고 한다.
ㅇ 서오릉(西五陵)
서오릉(사적 제198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이다.
서오릉 지역이 무덤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1457) 의경세자(추존옹 덕종)와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등 5개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모두 5릉 10위의 왕과 왕후릉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무덤 대빈묘가 있으며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수경원이 있다.
<서오릉.... 5개릉에 10위의 왕과 왕후를 모셨으며,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가 있다.>
1.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경릉(敬陵)
2.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창릉(昌陵)
3. 19대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명릉(明陵)
4.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익릉(翼陵)
5.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홍릉(弘陵)
A.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대빈묘
B.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
C.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수경원
돌아보는 순서는 3-C,4-B-1-A-5-2 順을 권장한다.
ㅇ 수양대군 세조의 업보
수양대군(세조)은 형님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승하하고 그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린 조카를 부탁한다는 형님을 외면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고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이후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나이 스물에 요절하고 그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된 동생 해양대군(예종)의 세자빈(한명회의 딸)이 역시 요절하였으며 해양대군도 왕위에 오른지 14개월 만에 요절하니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이 세조의 업보요 조카 단종의 생모(세조의 형수, 문종 비) 현덕왕후의 저주라고 수근거렸다.
야사에 보면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분노한 얼굴로 세조를 꾸짖으며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에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1457년 9월 2일, 단종은 10월 21일로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으니, 단종을 죽이자 의경세자를 데려갔다는 말은 그야말로 전설 차원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심은 세조를 미워하여 큰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차남 해양대군도 왕이 된지 14개월만인 20세로 단명하였으며 의숙공주도 시아버지 정인지보다 일찍 죽는 등 정실 소생들 모두가 단명하였지만 백성들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외면하였다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손자 월산대군은 35세로, 차손인 성종은 소갈증을 앓다가 38세로 죽었고, 큰 며느리 인수대비 (의경세자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는 손자 연산군을 나무라다가 머리에 받혀 사경을 헤매다 죽었다거나, 증손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에서 유배중 31세로 죽었으니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 때문이련가? 수양대군이 지은 죄의 업보련가? 직계자손들의 불행이 이어진다.
ㅇ 의경세자 덕종
경릉의 주인공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 1) 7월 26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1457년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지만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세자에 오른지 2년만인 2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아버지 세조가 직접 나서서 묘자리를 찾았으며 원래 정역의 묘가 있던 이곳에 터를 잡고 아들을 묻은 후 대군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 이후 동생(예종)의 뒤를 이어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왕위(성종)에 오른 후 덕종으로 추대되었다.
의경세자 덕종은 (이성계의 조상 4대를 제외하고 역대 계보중) 조선왕실 최초의 추존왕이다.
ㅇ 조선시대 추존(追尊) 왕 : 9명
실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훙서(薨逝)후에 묘호(廟號)가 올려 진 조선의 추존(追尊) 왕은 모두 9명이다.
추존 왕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의 4대 선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태묘(太廟)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왕릉의 능제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서오릉 경릉(敬陵)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가 스물의 나이로 요절 후 동생이 왕위에 올랐지만 역시 요절하여 의경세자의 작은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9대 왕 성종이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였다.
김포 장릉(章陵)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다. 능양군은 왕위에 오르자 4년전 죽은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하였다가 9년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였다.
파주 삼릉 영릉(永陵)
진종(眞宗)은 영조의 맏아들로 세자가 되었으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효장세자로 봉해졌다.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유언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1899년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 1대 황제로 등극하면서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수원 융건릉 융릉(隆陵)
정조의 친아버지 사도세자는 이복형 효장세자가 죽자 세자로 책봉된 후 대리청정을 하는 등 활발한 정치를 하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28세의 나이에 뒤주에서 8일 만에 죽었다.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莊獻)세자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 1대 황제로 등극하면서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었다.
동구릉 수릉(綏陵)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3살 때 책봉 된 후 순조대신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으나 아버지 순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효명세자로 추존 되었다. 그후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면서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 1대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이상의 5명이 조선왕 27명외에 사후 추존된 왕이며 나머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4명은 모두 이성계의 5대조까지 조상을 추존한것이다. 조상들 陵은 모두 이북 지역에 있다.
ㅇ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소혜왕후 한씨는 좌의정 한확의 딸로 한확은 여동생을 세종의 서자 계양군과 혼인시켰고, 둘째 여동생은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소혜왕후는 1455년 18살에 한 살 아래인 의경세자에게 시집 가 세자빈이 되었으나 1457년 세자가 요절하자 월산대군과 자을산군 두 아들과 함께 궐을 나와 경운궁에 거처하며 당대의 실세 한명회와 손을 잡고 그의 넷째 딸을 자신의 둘째아들 자을산군과 정략적으로 혼인시켜 후일을 기약하던 중 남편대신 왕위에 오른 시동생 해양대군(예종)이 14개월만에 요절하자 둘째 아들을 왕위에 밀어 올리니 그가 9대왕 성종이며, 한씨 본인은 대왕대비가 되니 그가 바로 인수대비이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 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하려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힌 얼마 후 승하하였다.
ㅇ 부인이 상석(上席)인 왕릉
아버지 세조가 직접 찾아낸 의경세자의 묘자리는 원래 정역의 묘가 있던 곳이었다.
정역은 태종 이방원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친밀한 사이며 효령대군의 부인이 그의 딸이고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나 왕릉에는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으니 세조는 이곳에 터를 잡고 아들을 묻은 후 대군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
이후 소혜왕후 한씨가 죽어 오른쪽에 묻히니 동원이강릉이다.
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즉, 부인이 남편보다 높은 자리에 모셔져 있다.
이는 덕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죽어 대군의 예로써 장사 지냈기 때문이며, 한씨는 아들이 왕에 올라 왕비로 모셔지고 대왕대비로 죽었기에 생긴 현상으로 조선왕릉중 유일하다.
뿐만아니라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며,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경릉... 서오릉에 처음 들어선 릉이다. 세조가 아들을 위하여 직접 잡았다는 명당이다.>
<동원이강릉...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을 모신 형태를 말한다. 앞서의 세조 광릉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러나 이곳 경릉은 부인이 더 높은곳에 모셔졌다. 왼쪽의 왕비릉>
<오른쪽 낮은자리가 왕릉인데 한눈에 보아도 허술해보인다.>
<왕릉에서 바라 본 왕비릉과 정자각>
<왕릉 전경....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도 없어 사대부 묘와 다를바 없어 보인다.>
<왕릉의 상징 무석인은 없이 문석인만 서 있다.>
<혼유석.... 고석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다.>
<능침 주변의 석양, 석호도 1쌍, 2마리씩뿐이라 휑- 해보인다.>
<왕릉에 비하여 난간석은 물론 무석인, 문석인을 모두 세운 왕비릉... 왕릉의 형식을 모두 갖추었다.>
<왕릉에는 없던 망주석이 왕비릉에는 세워져 있다.>
<문석인, 무석인이 위엄있게 지켜 서 있다.>
<능침 주변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도 각각 2쌍, 4마리씩 제대로 갖추었다.>
<왕비 릉 뒷편 잉에 올라 바라 본 모습.... 왕릉의 전형을 제대로 갖추었다. 과연 인수대비 답다.>
<정자각 왼편의 예감, 옆에 있는것은 뚜껑인지? 다른 용도인지?>
<정자각 오른편의 비각....>
<정자각 오른편 앞쪽으로 있는 수복방.... 수라간은 볼 수 없었다.>
형님의 아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자신은 꿈마다 형수(단종 생모)에게 시달리며 악몽을 꾸다가 마침내 큰아들 의경세자를 단종에 앞세워 보냈다.
스스로 자식의 묘자리를 찾아 다닌 세조... 그도 여늬 부모들처럼 자식을 가슴에 묻었을까?
그러나 세조 자식들의 불행은 의경세자(덕종)에게서만 그치지 않는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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