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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왕(李太王).
낯선 이름이다. ‘이태왕’은 누굴까? 우리 역사에서 이씨 성으로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인물은 단 한 사람, 고종(1852~1919)이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그렇다면 이태왕이라는 호칭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는 당시 조선의 황제를 폄하하려는 일본의 의도와 관련된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일본은 순종을 황제가 아닌 ‘이왕’(李王)으로 불렀다. 또 상왕인 고종은 ‘이태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약국의 설움을 고스란히 겪던 고종이 이태왕이라는 이름으로 1919년 세상을 떴다. 그리고 9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라를 뺏긴 임금의 왕관과 갑옷, 투구, 옷, 신발 등이 남아날 리 없었다. 그 유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도쿄로 수렴됐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종의 유품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관·투구·갑옷 등 고종 유품 7점 확인
이태왕소용품(李太王所用品). 고종의 유품이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있음을 입증하는 문헌이 발견됐다.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라는 책자다. 일제시대 일본인 문화재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5)가 자신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 1144점의 목록을 적어둔 92쪽의 필사본 책으로, 목차는 선사, 낙랑,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 이조, 불상·불화, 회화, 일본 등 11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책은 이 가운데 일곱 가지의 유물이 고종의 물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구라 컬렉션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전시됐지만, 각 문화재의 구체적 명칭과 입수 경위 등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이번 <오구라 컬렉션 목록>의 발견으로 그 비밀의 막이 한꺼풀 벗겨진 것이다.
오구라는 1945년 일제 패망 뒤 1000점 이상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했고, 1964년 이를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 목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오구라 컬렉션은 그 규모가 방대해 개인이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결국 1982년 오구라의 후손이 설립한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가 도쿄국립박물관에 이 수집품들을 기증했다. 당시 건네진 문화재 전체의 수는 1030점. 하지만 함께 건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구라 컬렉션 목록>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아왔다. 오구라 컬렉션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전시됐지만, 각 문화재의 구체적 명칭과 입수 경위 등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이번 <오구라 컬렉션 목록>의 발견으로 그 비밀의 막이 한꺼풀 벗겨진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정작 문화재의 원소유주나 입수경위 등 결정적인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다. 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반환을 요구하기는 힘들었다.
<한겨레21>은 문화재 반환운동 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 스님)로부터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하 오구라 목록)을 단독 입수해, 그 안에 담긴 유물 1144점의 특징(수치나 재료 등)과 출토지, 원소유자, 유통 경로 등을 확인했다. 목록에는 지금까지 ‘왕실의 물품’이라고만 알려진 9점의 문화재가 실은 고종과 명성황후, 영친왕비 등의 소유물이었다고 지목하고 있다. 우선 고종의 유품으로 오구라 목록에 드러난 것은 장의(갑옷 안에 입는 긴 두루마기 종류), 상의(두루마기 종류), 장의부적지진전뉴(천 장식), 자지견관(왕이 쓰는 관모), 심답(신발), 금은장갑주(갑옷과 투구) 2구 등 총 7점이다. 현재 이 유품들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오구라 목록의 이조시대 열두번째 항목(74쪽)에서 ‘장의’로 소개된 물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동다리’라고 부르는 옷으로, 임금이 전복(갑옷)을 입을 때 속에 입었던 의복이다. 오구라 목록에는 황색직물천에 구름을 타는 용 무늬와 쌍룡 무늬가 있다고 적혀 있고 설명 끝에 ‘이태왕소용품’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쪽의 13번 항목인 자주색 비단으로 된 상의도 이태왕소용품으로 기록돼 있다. 문화재 연구소 관계자는 이를 두고 “직령이라고 부르는 왕의 옷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역시 이태왕소용품으로 심답이라고 이름붙인 신발도 등장한다.
“국가가 사라졌어도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물건”
고종의 유품으로 기록된 문화재 가운데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익선관과 투구·갑옷이다. 목록에서 이조시대 18번 항목에 ‘자지견관’(자주색 직물의 관)이라고 표현돼 있는 익선관은 말하자면 왕이 쓰는 관이다. 고종의 황사손으로 현재 종묘 등의 제사를 주관하는 이원씨는 “익선관은 국가를 상징하던 왕관과 같은 것”이라며 “국가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찾아와야 하는 자존심과 같은 물건이다. 하물며 지금과 같이 일본에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반환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익선관은 왕이 평상시 쓰던 관모로, 세종대왕상 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왕의 투구와 갑옷이 남아있는 게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구라 목록에는 ‘금은장신갑주 2구’로 기록돼 있다. 또 ‘이왕가 전래’라는 기록도 보인다. 왕실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황사손 이원씨는 “예부터 적국이 패망했을 때 적국 원수의 목을 참수하고 그의 투구와 갑옷을 가져갔다”며 “투구와 갑옷이 고종 황제의 것임을 알면서도 반환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우리를 패전국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적 자존심 차원에서도 이는 꼭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목록에는 고종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문화재만 있는 게 아니다. “건청궁에서 일본인 지사(자객)가 민비(명성황후)를 암살한 뒤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오구라 목록 118번의 주칠12각상에 붙은 설명이다. 8면에 방형, 원형, 만자, 여의두문 등을 투각해 손을 넣어 잡을 수 있도록 한 궁중용 상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객들은 나머지 손으로 왕실의 상을 챙긴 것이다. 지금까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진 이 문화재들을 우리는 왜 20년 넘게 방치하고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재 반환에 대해 반일 ‘감정’만 높았지 사실상 실익 있는 연구는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일본 쪽과 함께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였다. 우리 쪽에서 도쿄국립박물관에 학술조사를 제안해 이뤄진 것으로, 우리 쪽 대표단이 일본에 머물면서 전체 목록 작성과 사진촬영을 실시했다. 하지만 공동연구에서 정작 문화재의 원소유주나 입수경위 등 결정적인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연구에 참가한 한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연구는 일방적으로 일본이 제공하는 자료만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며 “우리가 요구했던 자료 가운데 특히 문화재의 반출 경로에 관한 자료들은 공개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쪽 연구자가 발견해 공개
결국 누구 소유의 물건이었으며 어떻게 반출됐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반환을 요구하기는 힘들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담긴 <오구라 컬렉션 목록> 책자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공동연구 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도록에 이 목록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도록 서문에 전 도쿄국립박물관 학예부장이 1982년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인용돼 있다. “오구라씨는 이에 대하여 자신이 편집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쇼와 39년, 1964년) 머리말 안에, ‘나는 사학, 고고학에 관해서는 일개 문외한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흥미나 취향이 가는 대로 수시로 여기저기에서 수집했다’고 쓰고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문화재 당국이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 목록은 한국이 아닌 일본 쪽 오구라 컬렉션 연구자를 통해 빛을 보게 됐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한 일본인 연구자가 목록을 이소령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에게 건넸고,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이 이를 재입수한 것이다. 이소령 이사는 “신변보호를 위해 당사자 신원을 밝힐 수 없다”며 “입수경위를 떠나 이제 오구라 컬렉션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할 만큼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말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쪽은 “문화재 당국이 일본 도쿄 등에서 이 문헌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제라도 우리 정부가 나서서 목록 연구 등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반출의 불법성을 자인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정 10년(1921년)에 경주에서 일대 발굴이 행해져서 금왕관 이하 대량의 고미술품이 출토됐는데….” 이는 일본 총독부와 민간이 대대적으로 유물을 발굴했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것이 고종의 유품만일까. <오구라 컬렉션 목록>에는 ‘충청남도 부여 출토’ ‘금관총 출토’ 등 여러 문화재의 출토지가 언급돼 있다. 출토지가 있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해당 지역의 불법 발굴을 입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목록에는 백제 유물인 금동미륵반가상의 경우처럼 “공주에서 2리 정도 되는 부근에 있는 석탑 안에 있었던 것을 OO씨가 구입해서 일본 내지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구체적인 구입 경로를 밝힌 것도 있다. 이는 발굴이나 유통의 불법성을 입증해 반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시대 ‘철삼족화발’처럼 “평양을 떠나 이허보통학교를 건설할 때 발굴”처럼 구체적으로 발굴 경로를 언급한 것도 있다. 반출의 불법성을 자인하는 대목도 보인다. “대정 10년(1921년)에 경주에서 일대 발굴이 행해져서 금왕관 이하 대량의 고미술품이 출토됐는데… 그 후 발굴법이 달라져서 경상남북도를 시작으로 조선 각지에서 잇따라 (물품 등을) 출토하는 데 이르러….” 이는 일본 총독부와 민간이 대대적으로 유물을 발굴했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으로, 이 과정에서 오구라가 문화재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도쿄박물관의 1030점 모두 반환 받아야”
이미 유실된 문화재가 있다는 안타까운 기록도 보인다. 서문에서 오구라는 “일본의 고대사를 선명하게 해주고 극동 문화 연구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 수집하게 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홀한 사이 수집품들을 수속할 겨를이 없어 그 ‘대부분’을 유실한 것은 이해를 떠나 진실로 유감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1144점을 목록으로 남기면서 ‘대부분’을 유실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오구라의 보유 문화재 규모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실제로 1945년 일제 패망 뒤 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문화재를 반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65년 그가 살던 대구의 집 앞마당에서 150여 점의 문화재가 발견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그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문화재 상당수를 내다 판 것으로 추정한다. 곽동해 동국대 교수(불교예술문화학)는 “개인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한 일본인의 경우 반출한 지 50년이 넘어서면서 보관상의 어려움이나 보안 등의 문제로 일본 정부에 문화재를 기증하거나 한국 쪽으로 반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며 “우리가 반출 문화재 연구를 더욱 활발하게 해야 할 이유”라고 말했다. 이소령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는 “<오구라 컬렉션 목록>은 문화재 반출의 불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입수 경위 등 면밀한 검토를 통해 고종의 유품뿐만 아니라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 컬렉션 1030점 모두 반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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