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뒤덮인 항저우 서호. 호수 위 단교(사진 가운데)에서 눈이 녹아 내리는 ‘단교잔설’은 ‘서호 10경’ 중 하나다. photo 신화통신 |
중국인들이 항저우(杭州)를 가리킬 때 항상 언급하는 말이다.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 항저우(인구 810만명)는 장쑤성(江蘇省)의 쑤저우(蘇州)와 함께 수려한 풍광으로 1, 2위를 다투는 도시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 때 중국 각지를 여행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도시”라고 항저우를 격찬했다.
지난해 12월 31일 항저우역에 들어온 고속열차의 문이 열리자 기차역 승강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역 대합실은 관광상품과 호텔을 선전하는 호객꾼들로 넘쳐났다. 지난해 10월 시속 350㎞의 후항(?杭·상하이~항저우)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200㎞ 떨어진 양 도시는 45분 거리로 좁혀졌다. 신설된 상하이 훙차오(虹橋)역에서는 항저우행 열차가 20분에 한 대꼴로 출발했다.
항저우역을 빠져나온 관광객들이 직행하는 곳은 서호(西湖)다. 항저우 한가운데 있는 서호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겨울철 눈으로 뒤덮인 서호를 호숫가 옆 뇌봉탑(雷峰塔)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뱃사공들이 노를 젓는 서호 주변에는 결혼 사진을 찍으려는 신혼부부들로 가득했다. 항저우는 중국 신혼부부들이 즐겨찾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호 옆 레스토랑들이 밀집한 ‘서호천지(西湖天地)’는 연말과 1월 1일 원단(元旦)을 맞이해 가족 친지들과 함께 외식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주로 시키는 요리는 ‘동파육’과 ‘거지닭’ ‘시후추위(西湖醋魚)’다. 시후에서 잡아올린 초어(草魚)를 새콤달콤하게 쪄낸 ‘시후추위’와 연꽃잎에 진흙을 발라 구워낸 닭인 ‘거지닭’은 항저우를 대표하는 요리다.
항저우의 또 다른 대표요리인 ‘동파육’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소식(蘇軾)이 만들어낸 요리다. 항저우 지방관으로 좌천된 소식이 바둑을 두다 찜통 위에 올려둔 돼지고기를 그만 깜박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쪄낸 돼지고기 특유의 묵직하고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동파육이란 말도 소식의 호인 ‘동파(東坡)’에서 비롯됐다.
동파육 외에도 항저우 곳곳에는 소식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호를 가로지르는 제방의 이름도 ‘소식이 쌓은 제방’이란 뜻의 ‘소제(蘇堤)’다. 서호도 ‘호수의 아름다움이 서시(西施)의 미모에 비견된다’하여 소식이 붙인 이름이다. 오(吳)나라를 망하게 한 서시는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이다. 연중 물을 머금고 있는 서호로 인해 항저우는 피부미녀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중국 10대 명차 ‘용정차’ 주산지
항저우에는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巖)의 옛 집도 남아있다. 호설암은 청(淸)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혼란을 틈타 군상(軍商)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거상(巨商)이다. 호설암은 본래 안후이(安徽)성 츠지(績溪) 출신의 휘상(徽商·안후이성 상인)이지만 항저우와 상하이 등지에서 전장(錢莊·금융기관의 일종)을 운영하며 무역업에 종사해 거부(巨富)를 축적했다.
호설암의 뒤를 잇는 중국 최대의 갑부도 항저우 사람이다. 항저우 출신의 쭝칭허우(宗慶後) 와하하(娃哈哈) 회장은 물과 음료수 배달로 시작해 13억 중국의 드링크 시장을 평정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전형적인 저장상인인 쭝칭허우 회장은 지난해 개인재산 800억위안(약 14조4000억원)으로 후룬리포트가 선정한 중국 최고의 부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의 부동산 가격을 밀어올리는 것도 저장상인의 힘이다. 특히 저장성 남부에 있는 원저우(溫州) 상인들은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중국 전역을 누비며 아파트와 빌딩을 매입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또 항저우 바로 남쪽의 이우(義烏)는 ‘소(小)상품의 천국’으로 불리는 곳이다. 라이터, 단추, 바늘, 액세서리 등 각종 상품을 전세계로 공급한다.
오늘날 상하이(上海)를 금융중심지로 만든 사람들도 저장재벌들이다. 하지만 저장재벌들의 전성기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집권기였다. 항저우 인근 닝보(寧波) 출신인 장제스는 장(蔣), 쑹(宋), 쿵(孔), 천(陳)씨의 ‘4대 가족’들을 중심으로 권력과 재력을 결합시켜 저장재벌 전성시대를 열었다. 결국 오늘날 대만의 경제력도 저장재벌들이 만들어낸 셈이다.
시진핑도 저장성 당서기 출신
한편 최근에는 IT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중국 최대의 B2B사이트 알리바바(阿里巴巴)와 인터넷 오픈마켓 타오바오왕(淘?網)을 이끄는 알리바바그룹 마윈(馬云) 회장 역시 저장상인이다. 알리바바그룹의 본사는 저장성 항저우다. 항저우 출신의 마윈 회장은 한때 항저우 서호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통역과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마윈은 항저우 서호변에서 ‘서호논검(西湖論劍·서호에서 검을 논한다)’이란 IT 포럼도 개최한다. 서호논검은 신필(神筆) 김용(金庸)의 무협소설 ‘화산논검’에서 차용한 말이다. 마윈은 김용의 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용의 무협소설에는 항저우가 종종 배경으로 등장한다. 김용의 베스트셀러인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한편 저장성 전성시대는 또 한번 열릴 예정이다. 차기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로 유력시되는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저장성 당서기 출신이다. 시진핑 부주석은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항저우에서 저장성장, 저장성 당서기로 근무했다. 항저우에서 경력을 쌓은 시 부주석은 이후 상하이 당서기를 거쳐 이너서클인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시진핑 부주석은 항저우 당서기 시절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을 승인한 바 있다. 서호변에는 한때 김구 선생이 머물던 임정청사가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현 루쉰공원) 의거 직후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정 요인들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머물던 곳이다. 항저우 임정청사는 2007년 복원돼 한국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악비 금과의 결전 주장하다 옥사한 남송의 장군 항저우의 옛 이름은 임안(臨安)이다. 부유했지만 문약했던 남송(南宋)은 항저우를 수도로 삼았다.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만주족으로 개명)의 금(金)나라에 의해 황허(黃河) 유역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밀려난 남송은 장강(長江) 이남의 항저우로 수도를 옮겼다. “위에 천당이 있다면 아래에 쑤·항이 있다”고 처음 읊은 사람도 남송 때의 시인 범성대(范成大)다. 항저우를 찾는 중국인들은 서호 옆에 있는 악비(岳飛)의 무덤 ‘악왕묘’에서 ‘진충보국(盡忠報國·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함)’이란 말을 되새긴다. 등에 ‘진충보국’이란 문신을 새긴 채 전장(戰場)에 나섰다는 악비는 중국의 이순신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금나라에 맞서 싸울 것을 주창한 악비는 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간신 진회(秦檜)에 의해 옥사당한다. 악비의 무덤 앞에는 쇠창살에 갇힌 채 무릎을 꿇고 결박당한 진회의 동상이 놓여있다. 악왕묘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진회의 동상에 가래침을 뱉고 지나간다. 하지만 풍광이 수려한 항저우에 수도를 둔 남송은 일찍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후 남송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은 중국 역대 정권은 북방 이민족과 대치한 만리장성 이남의 베이징에 수도를 두는 전통을 확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