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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광화문 현판 글씨

굴어당 2011. 1. 26. 20:32

중국 하남성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에는 권법(拳法) 말고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산문(山門) 정면에 걸려 있는 '少林寺'란 현판이다. 청나라 강희제 때 소림사에 큰 불이 나자 주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절을 복원했다. 현판을 만들려고 튼튼하고 빛깔도 좋은 자단목(紫檀木)까지 구해놨는데 글씨를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마침 황제가 숭산에 제사 지내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주지는 "옳거니" 했다.

▶주지는 황제가 오는 날 예닐곱 스님을 산 어귀에 내보내 글씨를 쓰게 했다. 강희제가 평소 습관대로 평민복 차림에 내시 하나 데리고 지나다 보니 스님들 글씨가 가관이었다. 가늘고 굵고, 삐뚤빼뚤한 데다 어떤 것은 까마귀를 그린 것 같고, 어떤 것은 검은 돼지를 그린 것 같았다.

▶"스님들, 예서 무얼 하고 있는 게요?" 강희제가 물었다. "주지 스님 지시로 산문에 붙일 현판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곤봉 휘두르는 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뜻대로 안 되는군요." 자금성 내 교태전 현판 글씨도 썼던 강희제였다. 그는 "붓 이리 줘 보시오" 하고 일필휘지로 '少林寺'라고 써 내려갔다. 스님들은 "만세"를 외쳤다. 강희제는 뒤늦게 스님들 꾀에 넘어간 것을 깨달았지만 탓하지 않았다. 옥새를 가져오게 해 가운데 '림(林)'자 위에 찍어주었다. 현판은 두고두고 소림사를 찾는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는 보물이 되었다(최종세 '중국 시·서·화 풍류담').

▶궁궐이나 대문 현판을 보면 건물의 격(格)과 그걸 만든 사람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북송(北宋)의 서예가 미불은 그래서 "현판 글씨는 한 자 한 자에 풍부한 근육과 단단한 뼈가 들어 있고,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려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문화재청이 짝 갈라진 광화문 현판을 다시 만들겠다고 그제 제작위원회 12명 명단을 발표했다. 그런데 글씨 전문가 이름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금 간 것만이 문제였다면 잘 마른 나무 골라 다시 만들면 되지 무엇 하러 위원회까지 만들며 요란 떠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의 광화문 현판 글씨는 컴퓨터로 복원한 디자인일 뿐이라는 게 서예계의 중론이다. 최고의 광화문 현판 글씨를 찾아내는 게 보통 어렵고 시끄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해도 광화문의 먼 훗날을 보지 않고 당장의 골치 아픈 일만 피하려 한다면 문화재청이 실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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