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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술연구원이 지난 4월 8일 ‘동아시아 민족주의와 영토분쟁’을 주제로 개최한 코리아포럼. photo 권연주 인턴기자 |
20세기 역사에서 확인되듯 영토분쟁은 민족주의와 밀접하다. 민족주의는 영토 문제의 유발과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영토분쟁 자체가 갖는 문제의 심각성에 더하여 민족주의가 개입하면 그 문제는 타협이 불가능하게 된다.
- ▲ 박상은 이사장
세계의 도서(島嶼)분쟁 사례를 보면 이것이 증명된다.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는 시기를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일방의 도서 점유가 일어난 직후에는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유 이후 수년간 또는 수십 년(길게는 몇백 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상대국에 의해서 영유권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사례가 빈번하다. 바로 자원 발견 시기 등 경제적 실리 때문이든지 민족 국가의 독립시기 및 정권교체기에 국민의 민족적 감정을 의식한 경우들이다.
오래 지속된 냉전 당시 안보 위협은 동북아 지역 내 민족주의의 발흥을 억제했다. 냉전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동아시아 3국을 보면 한국·중국·일본 3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공통적인 흐름이 나타났다. 우선 중국의 경우를 보자. 중국 교육부는 1993년부터 학생들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94년에는 이를 간부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정치교육으로 발전시켰다. ‘국가 주도의 애국주의’ 운동이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보수화 경향은 냉전 국제질서의 종식과 함께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1995년 사회당 소멸, 2000년경의 자유주의 사관, 2006년 교육기본법 등 최근 일본 내 민족주의 경향은 뚜렷하다. 이는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보다는 정부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의 주요 인사들과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문화적 세속화 과정을 거친 만큼 민족주의가 쇠퇴 단계에 접어들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민족자결주의가 국제사회에서 기본질서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1차대전 이후에도 일본은 만주와 중국, 동남아 지역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청산했어야 할 침략 전쟁의 과오를 정리하지 못한 채 냉전의 이념 대립기를 지나왔다. 서구사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을 최대의 목표로 삼은 전전(戰前)세대의 유산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0년대에 싹이 트기 시작한 보수주의 경향은 탈냉전을 기하여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 접어들어 꽃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권위주의 시대 때 국가는 민족주의 활용에 소극적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운동 수단이자 목표가 되면서 정부와는 긴장관계에 서게 됐다. 탈냉전기에 있어 민족주의 운동은 진보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 시기 민족주의는 반미운동이나 통일운동, 그리고 반일운동 이외에 두 가지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하나는 바로 중국의 부상과 그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반감과 우려로 나타났으며 또 하나는 경제성장의 결과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표출되었다.
최근 동아시아에서의 영토분쟁은 냉전기부터 존재해 온 동일한 분쟁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동력을 가진 분쟁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의 지지를 받는 이상 그 영토분쟁은 민감성과 폭발력에 있어서 기존의 분쟁과는 다른 차원의 갈등이다.
그러면 영토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그 폭발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공통의 동맹국의 존재 △각국 정치 과정의 민주화 △존재론적 위협의 자제를 들 수 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분쟁의 양 당사국이 제3국과 공통의 안보 협력 관계를 맺을 때 분쟁 발발이 억제될 수 있다. 국제정치이론으로는 이를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한·일 간에는 한·미 관계와 미·일 관계처럼 ‘한국’과 ‘일본’이 공통으로 미국과 안보관계를 갖고 있어 한·일 간 분쟁 발발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분쟁의 양 당사국이 모두 ‘민주국가’일 경우 분쟁 발발이 억제될 수 있다. 국제정치이론에서는 이를 ‘민주적 평화론(democratic peace)’이라고 한다. 상대방 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할 정도의 도발을 자제함으로써 분쟁 발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