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오락에 빠진 외출병들을 보며 걱정이 앞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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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도의 촌락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수이터우(水頭) 마을의 전경. 요즘은 어디를 가도 대륙의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
사실은, 우리 일행이 탑승한 UNI(立榮항공) 비행기도 날씨 탓에 예정보다 30분이나 늦게 이륙한 것이었다. 그나마 직전에 출발하려던 Mandarine Airlines(華信항공)의 금문도행 비행기가 취소된 직후였다는 점에서 그날의 운세는 그쯤이면 괜찮은 편이었다고나 할까.
새벽에 타이중 시내의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오는 중에도 가는 빗방울이 여간 신경 쓰인 게 아니었다.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대만 행정원의 신문국 여직원은 잠깐 스쳐가는 빗방울(陣雨)이거나 가는 비(小雨) 정도여서 본격적인 우기 날씨(雨天)와는 또 다르다며 애써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날씨 때문에 결국 금문도 일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심 조마조마하던 내 표정을 살펴본 눈치다. 더구나 그 전날 저녁에도 티켓을 끊어놓고 30여 분이나 기다린 끝에 짙은 안개로 이륙이 취소되었던 터여서 이날의 아침 비행도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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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일정에 없던 금문도 방문 추가
건국 100년을 맞는 준비상황을 보여주겠다는 대만 정부의 초청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금문도는 방문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기왕에 초청할 것이라면 금문도를 포함시켜 달라는 요청에 스케줄이 크게 바뀌면서 뒤늦게 일정에 포함된 것이었다. 지난해 11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사태를 굳이 감안하지 않더라도 과거 대만과 중국 사이에 첨예하게 부딪혔던 역사의 현장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타이베이에서 출발한 우리의 일정은 자동차로 서북지역의 신주(新竹)와 먀오리(苗栗), 루강(鹿港), 타이중을 거쳐 마지막 목적지가 금문도로 잡혀 있었다. 동행한 일행은 미국인 기자 1명과 캐나다 기자 2명, 그리고 필자 등 4명. 안내를 맡은 신문국 여직원 조우론디(左龍?)는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경력답게 영어가 유창했다. 한때 독일 공관에서도 근무한 덕분에 영어보다 독일어가 더 능숙하다니 대단한 외국어 실력이다. 몇 년 전에는 친구와 함께 서울을 방문해 설악산을 구경한 적도 있어서 한국에 대해서는 매우 좋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과 기대감 속에 내린 곳이 바로 금문도 중심부의 샹이(尙義) 공항이었다. 항공편 편도 요금이 1990NT(타이완 달러)이니 우리 돈으로 대략 8만원 정도. 비행시간과 비교하면 우리 국내선 요금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타이중 외에도 타이베이, 가오슝(高雄), 타이난(臺南) 등 여러 도시로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공항 전광판에 표시된 현지의 기온은 섭씨 13도. 아무리 2월의 아침녘이라지만, 북위 24도의 아열대 기후치고는 생각보다 서늘한 편이다. 승객들의 옷차림도 대체로 두꺼운 복장이다. 대륙에 맞붙은 접경 지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략 80여 명의 탑승객 가운데 절반 정도는 군인이었다. 대부분 방한복 차림에 집에서 챙겨준 선물인 듯한 꾸러미를 든 앳된 얼굴의 군인들은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기다리던 현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일단 시내의 금문현 청사부터 방문했다. 일요일인데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리워스(李沃士) 현장이 집무실에서 직접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외국 언론인들이 방문할 것이라는 신문국의 연락을 미리 받았을 터이다. 그는 악수를 건네고는 금문도가 양안 사이에 극한적으로 대립하던 모습에서 지금은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며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중국, 20년 동안 빼앗으려 집요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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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금문도 일정에 동행했던 미국과 캐나다의 언론사 소속 기자들.(가운데가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았던 신문국 여직원이다.) |
집무실 벽에는 지난날 중국 인민해방군의 포격을 받아 폐허가 되어버린 촌락의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커다랗게 붙어 있다. 1958년 8월 23일부터 44일 동안 금문도와 그 주변 섬들에 무려 47만 발의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을 때의 모습이다. 이 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618명이 사망하고 2600여 명이 부상했지만, 대만 정부는 금문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만 본섬에서 190km나 떨어져 있는 금문도의 지하 전체를 그물망같이 요새화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버텼다.
대륙의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 항구와 불과 2~3km밖에 떨어지지 않아 그야말로 헤엄을 쳐서도 건널 만큼 가까운 거리였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해방군으로서는 변죽만 울린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1949년 금문도를 점령하려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도 막대한 희생만 치르고는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인민해방군의 연이은 굴욕이었다. 1만명의 병력이 금문도 구닝터우(古寧頭) 해변에 기습 상륙했으나 사흘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3000명이 전사하고 7000명이 포로로 잡혔다니 말이다.
그 뒤에도 인민해방군의 금문도 포격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끝에 서로 수교하게 되는 1979년 1월 1일을 기해서야 중단됐으니 20년 동안이나 포격이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이끌던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에 패퇴하여 대만으로 쫓겨간 1949년 이래 중국과 가장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던 역사의 무대가 바로 금문도라는 얘기다. 리워스 현장은 상황판의 숫자를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히 한국의 입장으로서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태로 4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마을이 파괴됐다는 점에서 금문도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5도를 요새화하겠다는 방안도 금문도의 사례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 합동참모본부와 국회 시찰단이 직접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동행한 미국과 캐나다 기자들도 그런 상황을 이해했는지 나를 일부러 현장의 옆자리에 앉히면서 질문의 우선권을 선뜻 양보했다. 전적으로 한국 언론인인 나의 요구로 인해 자기들도 덩달아 금문도를 방문하게 됐다는 사실에 대한 나름 관심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대만 안보의 최전방이었던 금문도에 지금은 대륙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2008년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다시 들어서면서 양안관계는 더욱 활기를 띠는 모습이다. 지난 1년간만 해도 무려 32만명의 본토인들이 샤먼에서 뱃길로 금문도를 방문했다니 결코 만만한 규모가 아니다.
전체 인구가 6만5000명에 이르는 금문도에서 대부분 주민들이 관광산업에 매달리게 된 것도 그런 영향일 것이다. 현청 집무실의 다른 쪽 벽에 걸려 있는 샤먼 항구의 지도가 새삼 돋보인다. 더욱이 흥미로운 사실은 금문도가 대만의 행정구역상 샤먼과 똑같이 대륙의 푸젠성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외몽골에 이르기까지 대륙 전체를 자신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 조문에 따른 잠정적인 조치다.
이제 중국인도 관광차 방문 가능
현청을 나와 첫 번째 코스로 주광루(?光樓)에 들렀다. 동서 20km, 남북 5~10km 길이로 한눈에도 나비 모양으로 생긴 금문도의 지형으로 보자면 왼쪽 날개의 아래쪽 지점이다. 바다 앞쪽으로는 소금문도라 불리는 례위(烈嶼)섬이 보이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게 대륙 땅이다.
“지난 1월 금문도와 례위섬을 연결하는 5.4km 길이의 금문대교 기공식이 있었다”고 가이드를 맡은 린밍팅(林明玎)이 설명해 준다. 포화로 얼룩졌던 이곳에서 대규모 교량건설 사업이 시작됐다는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바로 그 소금문도에서 태어나 어른들로부터 금문도 포격 당시의 처참했던 목격담을 들으면서 자랐다는 그의 결론은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다”는 한마디다. 타이베이의 대만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금문도 병원에서 적십자사 관련 업무를 보고 있다는 그는 이날 외국 기자들을 위해 특별히 가이드를 자원한 것 같았다.
주광루 3층의 안보전시관에는 당시 금문도 방위군 사령관이었던 후롄(胡璉) 장군이 받은 훈장과 임명장, 그리고 당시의 긴박했던 사정을 말해주는 각종 메모가 다른 자료들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황포군관학교와 미국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한 후롄은 적장인 마오쩌둥으로부터 “여우의 지략과 호랑이의 용맹을 동시에 갖춘 장군”이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또 어느 땐가는 “아무리 군인들이 뛰어나다고 한들 정치가 뒤를 받쳐주지 못하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며 통수권자인 장제스에게 목소리를 높여 대들었을 만큼 직언을 서슴지 않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현지인들이 조상 대대로 수호신으로 여기는 ‘바람의 사자(Wind Lion)’가 바로 그렇게 용감하고 존경받는 군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곳도 이미 관광지 분위기다. 마침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 온 여행객들이 줄을 서서 안보전시관의 계단을 오르며 주고받는 말투의 억양부터가 다르다. 대륙에서 건너온 관광객들임은 물론이다. 아직까지는 대륙인들의 불법체류와 편법취업 등의 문제로 인해 단체 관광객만 받고 있지만 올해 안으로 개인 관광도 허용될 계획이라 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대륙 단체 관광객은 하루에 4000명씩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체류 기간은 15일. 대만 정부가 2008년 7월 대륙인의 관광 입국을 처음 허가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 대략 910억NT(약 3조6000억원)의 경제효과를 누렸다는 보도 내용이고 보면 앞으로 개방 추세는 더욱 확대될 것이 틀림없다. 이 기간 중 대만을 방문한 대륙인은 모두 182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된 바 있다.
대형 면세품 쇼핑센터 올해 초 착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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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그대로 섬 안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뚫은디산(翟山) 지하 수로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지난 연말에는 이 수로의 중앙계단에서 타이베이 오케스트라 초청 음악회가 열렸다고 한다. |
다음으로 들른 근처 수이터우(水頭) 항구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대륙의 샤먼항으로 연결되는 정기 배편이 드나드는 항구다. 금문도에서 어항을 포함한 5~6개의 항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샤먼 외에도 대륙의 더 훨씬 북쪽으로 취안저우(泉州)까지 운항하는 항로도 개설되어 있다. 샤먼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대만의 남부 도시인 가오슝과는 뱃길로 줄잡아 9시간이 걸린다.
항구에는 여러 대의 페리호가 정박해 있는데 대부분 대륙 여행객들을 태우고 온 것이다. 아까 주광루에서 마주쳤던 관광객들도 이 가운데 어느 페리호를 타고 왔음 직하다. 선박에 중국 깃발이 걸려 있지는 않더라도 척 보면 구분이 가능하다는 게 가이드의 얘기다. 이 밖에도 이곳 바다에서는 양안 횡단 수영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처럼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최근 금문도 중심가에는 면세점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말 면세점이 처음 개설된 것은 물론 뒤이어 올해 초에는 대형 면세품 쇼핑센터가 착공되기에 이른 것이다. 나비 모양의 중심부 아랫부분에 위치한 샹이 공항에 인접해 지어지는 7만5000㎡ 부지의 쇼핑센터는 앞으로 2년 뒤인 2013년을 완공 목표로 하고 있다. 금문도 내에서는 지금까지 사상 최대의 민간투자이면서 가장 넓은 면적의 개발 프로젝트로 꼽힌다. 최근 양안 간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이 발효되면서 금문도가 포탄이 날아다니던 최전방 군사기지의 긴장된 모습에서 벗어나 양안 협력과 교류의 상징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이다.
금문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관 코스가 바로 지하 갱도다. 그 가운데서도 먼저 디산(翟山) 수로를 찾았다. 국가공원으로 지정된 서남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에서 곧바로 섬 안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뚫은 수로로서 1961년 부터 5년간 화강암 암반을 굴착해 건설됐다.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의 폭은 6~7m, 높이는 3.5m 정도. 환기가 잘되는 덕분인지 습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쾌적한 편이다. 수로의 전체 길이는 101m로 지난 연말에는 이 수로의 중앙계단에서 타이베이 오케스트라를 초청하여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단다. 금문도 동남쪽에도 이와 비슷한 쓰웨이(四維) 수로가 건설되어 있다고 하는데 시간상 둘러보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담수로 만드는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공습 포격 시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지하 갱도는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학교와 은행, 우체국, 버스 터미널, 국민당 지부 등이 몰려 있는 중심지에 폭 1m, 높이 2m 규모의 진청(金城) 민간방어갱도가 가로, 세로로 2.6km나 이어져 있는 것이다. 통신시설은 물론 응급장비와 비상식량도 갖추어져 있다. 건물의 지하 2층에 맞추어 뚫은 것이라니 대략 지하 6~7m 정도의 깊이다.
12개의 지하 갱도가 대만 정부의 금문도 수호 의지 증언
인민해방군의 집중 포격이 시작된 이후 1968년부터 지하 통로를 파기 시작해서 1992년까지의 작업 끝에 뚫은 것이다. 금문도에는 이런 지하 갱도가 모두 12개가 있는데, 지금은 젊은 세대에 대한 역사 관광을 위해 이 진청 갱도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헬멧을 쓰고 통로를 지나는 도중 군데군데에서 전광이 섬멸하면서 총소리가 들리고 주민 대피령을 내리는 마이크 방송을 내보내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의 긴급했던 실제 상황을 재연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금문도 방위사령부가 주둔하며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7.8km 길이의 지하 갱도가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거의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 안에서 탱크가 서로 교차할 수 있는데다 해군 보급용 갱도는 소형 함정이 바다에서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상륙용 주정(LST)으로 따지면 47대가 동시에 갱도 내부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중국 측의 계속된 공세 속에서도 금문도를 지켜온 대만 정부의 끈질긴 의지가 읽힌다. 그렇다고 비단 금문도만은 아닐 것이다. 국토의 어느 손바닥만 한 부분이라도 이러한 굳은 의지가 없이 어떻게 지켜낼 수 있었을까.
요즘은 이 가운데서 진청 민간방어갱도를 금문도 고적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 담당 직원의 설명이다. 이를 위해 관련 예비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고도 한다. 이렇게 금문현 지방정부가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했던 시기의 지하 요새를 고적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에는 양안 간 해빙 무드에 힘입어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목적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지난 2000년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위한 사전 정비작업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문업체에 의뢰하여 금문도 해안에 설치됐던 지뢰를 모두 제거한 이래 군사적인 대치상황도 사실상 끝나가고 있는 셈이다. 대만 내국인들에 대해서조차 금문도 여행이 허가된 것이 1982년에 이르러서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해빙 무드는 가속도에 또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은 심지어 금문도 주변의 몇 개 무인도에서 아예 병력을 철수시키자는 얘기까지 제기될 정도다. 그것도 건국 100년을 맞는 올해의 첫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석상에서 공식적으로 제안됐다는 것이니 역시 세상이 급속히 변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대만을 겨냥한 중국의 미사일 철수 협상의 조건으로 제시된 내용이라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현지에서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법도 하다. 상점과 음식점이 늘어선 중심가의 어느 전자오락실에서는 외출 나온 병사들이 나란히 앉아 전자오락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실제 목격하기도 했다. 정복 차림의 병사들이 30석 남짓한 오락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여다보며 카메라를 들이대자 주인이 황급히 다가와 제지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설마 금문도에서조차 부딪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전몰자 묘역에 최병우 기자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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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인 최병우 기자의 위패가 모셔진 타이우산(太武山) 기슭의 충렬사(忠烈祠) 전경. 이 바로 뒤에 1958년 ‘8·23 포격전’ 당시의 전몰자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
그러나 전반적으로 양안관계가 이처럼 급속히 진전되는 가운데서도 타이우산(太武山) 기슭의 전몰장병 묘역은 엄숙하고도 장엄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앞서 소개했던 금문도 전투의 영웅 후롄 장군이 ‘8·23 포전’으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군인 묘역이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가던 1949년 당시의 전투 희생자들도 여기에 잠들어 있다.
그때의 전투 장면이 그려진 벽화 옆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영어로 새겨져 참배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구닝터우 전투에서 흘린 피로 우리는 조국을 지켰노라(With the blood of the Gunningtou Battle we protected our Nation)”, 묘역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순국 영웅들에 대해 묵념의 예절이 바쳐지는 것은 핏줄과 역사가 다른 나라에서라고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더욱이 이 전몰자 묘역 앞에 지어진 충렬사(忠烈祠)에 우리 언론계의 대선배인 최병우(崔秉宇) 기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감회를 느끼게 만든다. 《코리아 타임즈》 편집국장 겸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던 그는 그해 9월 26일 금문도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대만 및 일본 기자들과 함께 소형 상륙정으로 금문도에 접근하던 중 포격으로 인한 높은 파도에 휩쓸려 배가 전복되면서 영원히 실종되고 말았다.
그때 함께 실종된 기자들은 대만 《신생보》(新生報)의 시부주(徐撲九), 《중화일보》(中華日報) 우쉬(吳旭), 《징신신문》(徵信新聞) 위친푸(魏晉孚), 《촬영신문》(撮影新聞) 푸즈승(傅資生) 기자와 일본 《요미우리》(讀賣)의 야스다(安田廷之) 기자 등 5명. 대만 언론사에서 외국 종군기자가 희생된 첫 번째 사례였음은 물론이다.
최병우를 비롯한 이들 종군기자들은 다음으로 방문한 ‘8·23 전사관(戰史館)’에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취재수첩과 카메라만 달랑 챙겨들고 포탄이 퍼붓는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자체만으로 금문도 역사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을 만한 일인 것이다. 동행 중인 미국과 캐나다 기자들은 이런 내용을 전해듣고는 나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성지에 순례(pilgrim)하러 온 것이냐”며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들로서야 대만 전투과정에서 한국 언론인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차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탄 껍데기로 칼 만들어 파는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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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도에 떨어졌던 녹슨 포탄의 껍데기를 이용해 만든 기념 나이프들이 상점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금문도가 ‘평화의 섬’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
이제 이러한 기억과 앙금이 역사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면서 지난날의 흔적들이 오히려 관광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방공 대피시설인 지하 갱도가 그렇듯이, 이른바 ‘포탄 나이프’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무더기로 쏟아졌던 포탄의 껍데기를 이용해 방문객들을 위한 기념품 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금문도가 ‘평화의 섬’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중심가인 보이루(伯玉路) 거리의 어느 기념칼 공장에 들어섰을 때 녹슨 포탄 껍데기가 공장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포탄에서 용접기로 껍데기를 떼어내 칼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5분 남짓. 섭씨 1300도 온도의 풀무에 넣었다가 꺼내 찬물에 단련시키며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잡아나가는 단순한 반복작업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멋있는 기념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인정신으로 3대째를 이어온다는 이 공장의 우정동(吳增棟) 대표는 금문도의 새로운 면모를 알린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금문도 고량주도 세계의 주당들이 널리 인정하는 특산품이다. 당연히 고량주 공장도 관광코스의 하나로 대접받고 있다. 땅바닥이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벼농사가 어렵지만 다행히 수수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기 때문에 이곳에서 고량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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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내려오는 포탄 나이프의 장인 우정동(吳增棟) 씨가 나이프 제조의 전 과정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포탄 껍데기를 떼어내서 제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대략 15분 정도가 걸린다. |
공장에 도착해 전시관에 들어서자 여자 안내인이 대뜸 고량주 시음부터 권한다. 조그마한 잔에 따라놓은 것이지만, 권하는 대로 연달아 두 잔을 마시니 대번에 머리가 띵해진다. 알코올 함량 58도의 명성이 공연히 주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한때는 이 고량주가 지하 갱도의 저장고에서 숙성됐었다는 얘기도 주당들을 솔깃하게 만들고 있다.
금문도 지방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주택 양식과 주거문화, 민속 등을 포함하는 금문도의 총체적인 문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생활습관과 문화적 토양이 서로 비슷한 대륙 푸젠성의 여러 도시와 협력하는 방안도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모양이다. 이런 정도라면 금문도를 중심으로 하는 양안 간의 교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 느낌이다.
“금문도는 대만의 영토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일제 식민지를 겪지 않은 땅입니다. 대륙의 포화를 견뎌냈다는 점에서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큽니다. 올해 대만 건국 100년을 맞는다는 점에서 대륙의 포격이 시작됐던 8월 23일을 기해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선언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금문도 방문을 끝내고 타이베이로 귀환하는 저녁 비행기 속에서도 리워스 현장의 얘기가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서 비행기 창밖으로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섬의 잔영 위로 ‘대결의 최전방’에서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금문도의 현재와 미래의 청사진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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