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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 내에 달의 분화구 모양을 본떠 만든 ‘둥근 집’. 조각가 김오성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
변산의 별들이
왜 아름다운지를 안다
쏟아지는 운석을 쪼아서
별밭을 만들어 놓은 금구원 조각공원
변산에 오면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 놓으려고
자기 몸을 깎아서 별을 만드는
김오성을 만난다.
-정군수의 ‘별’
전북 부안 변산반도 서쪽 끝, 호랑가시나무 숲을 배경으로 알몸의 여인들이 봄볕을 즐기고 있다. 나무 그늘에 누워 책을 읽는가 하면, 두 손을 모으고 요가를 하고 있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들은 자연의 일부처럼 자유스럽다. 누드의 여인들은 조각가 김오성(66)의 작품이다. 이 여인들이 있는 곳이 바로 위의 시에 나오는 금구원 조각공원이다.
김오성은 50년 가까운 세월, 단단한 화강암에 자신을 새겨왔다. 그의 50년 조각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곳은 한국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교육가였던 부친(김병렬)이 1966년에 터를 잡아 조각공원으로 조성한 것을, 김오성이 2003년 문화관광부에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고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으로 개칭했다.
조각공원 안에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을 한 김오성의 집이 있다. 집에는 돔 모양의 천문대가 함께 붙어 있다. 천문대에는 미국 아스트로 피식스(Astro-Physics)사(社)의 206 EDF 삼겹렌즈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과 178㎜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이 있다. 두 대의 천체망원경은 20여년 전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한 채와 맞먹는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이곳은 개인 천문대로는 국내 1호이다. 김오성은 이곳에서 돌에 생명을 불어넣듯 여체를 빚고, 별들이 쏟아지는 밤이면 우주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김오성은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 입구에 ‘금구원 조각공원천문대’라고 적힌 또 하나의 팻말을 나란히 걸어놓았다.
농사꾼에서 조각가로
김오성이 조각가로 걸어온 길은 간단치 않다. 그의 학력은 중졸이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 형편은 그를 농장에 주저앉혔다. 부친은 이리농림학교 출신으로 농민 교육에 뜻이 깊었다. 그 공로로 1964년 제5회 3·1문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중에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김경승(1915~1992)이 있었다. 그 인연이 이어졌다. 아들의 재능을 아까워 한 아버지는 김경승의 문하로 아들을 보냈다. 김오성은 그곳에서 20년을 있었다. 그중 10년은 난방도 안되는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수련을 했다. “한겨울 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때 끈기와 인내를 배웠습니다.”
돌의 성질을 배우기 위해 전통 석공을 찾아가기도 했다. 석공이 돌에 대해 웬만큼 공부하고 독립할 수 있기까지는 보통 3년이 걸린다. 석공들 틈에서 꼬박 3년을 씨름하다보니 돌을 다루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틈틈이 작업한 작품은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아버지가 농민학교 설립의 꿈을 안고 조성한 부지는 그의 작품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조각공원으로 입소문이 났다.
부족한 학력을 성실함으로 채운 김오성은 1972년 국전 입선, 1974년 국전 특선을 했다. 홍익대나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곳에서 중졸의 독학생은 결국 조각가가 됐다. 1986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스승으로 모시던 조각가 백문기(대한민국예술원회원·1927년생) 선생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만큼 한 것도 대단한 것이다. 전시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말아라.”
작품이 한 점도 안 팔렸을 경우 김오성이 실망할 것을 염려해 미리 마음단속을 시킨 것이었다. 웬걸,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작품의 80% 이상이 팔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측으로부터 작품 주문도 받았습니다. 작품 값으로 받은 돈이 4000여만원이었어요. 당시 4000만원이면 서울시내 어디든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었습니다.”
집 살 돈으로 천체망원경을
- ▲ 전북 부안의 관광명소가 된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금구원 조각공원). 조각공원 내에 천문대가 있는 김오성의 집이 있다.
별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오성은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시 서울 종로에 있던 화신백화점 진열장에 망원경이 있었다. 가난한 김오성은 지날 때마다 한참을 쳐다보면서 “돈이 생기면 꼭 망원경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시 성공으로 돈이 생기자마자 김오성은 당장 화신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수십만원하던 망원경은 그 새 값이 2배가 올라있었다. ‘이왕 사는 것 제대로 된 것을 사자’는 생각에 이곳 저곳 알아보다 천체망원경을 직접 제작하는 미국업체 아스트로 피식스를 알게 됐다.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한 덕분에 몇 마디 영어는 가능했다. 미국으로 무작정 ‘망원경을 제작해 줄 수 있겠냐’는 편지를 보냈다. 절차를 알아보기 위해 관세청을 쫓아다니고, 아스트로 피식스와 수십 차례 전화를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178㎜ 굴절망원경을 손에 넣게 됐다. “처음 편지를 보내고 22개월 만이었습니다. 망원경을 받고 얼마나 신나는지 1500만원을 들인 것이 아깝지 않았어요. 전화료만 100만원 이상이 나왔어요. 당시 이 정도의 망원경은 국내에서 구경하기 힘들었습니다. 육영재단이 운영하는 육영천문회에서도 망원경을 대여해 갈 정도였어요.”
망원경을 사느라 집을 사는 것은 포기했다. 그때 망원경 대신 집을 샀더라면 지금은 수십억원이 됐을 텐데 후회는 없을까. “남들은 보기 힘든 우주를 실컷 봤는데 후회 안 합니다.” 김오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화랑가에서 주목받는 조각가가 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일본 지바현의 한 사업가로부터 조각공원 조성 의뢰를 받는 등 대형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1억원이 넘는 계약금을 받았다. 장남 역할도 하고 작업에도 전념할 겸 고향 변산으로 내려갔다. 조각공원 내에 천문대가 있는 집을 지었다. 물론 설계도 직접 했다.
조각공원에 별을 초대하다
- ▲ 천문대 위에 있는 돔은 좌우로 열리고 180도로 회전할 수 있다.
돔 형태의 천문대는 연세대학교의 천문대를 보고 철공소에 특별 주문했다. 천체를 관측할 땐 돔 천장이 좌우로 열리게 돼 있다. 360도로 회전도 가능해 별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도 있다.
제대로 천문대를 만들어놓고 보니 좀 더 좋은 망원경을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 망원경을 사면서 사귀어 놓은 아스트로 피식스에서 마침 ‘새로운 망원경이 나왔다’며 연락이 왔던 터였다. 결국 ‘206 EDF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이 천문대에 놓이게 됐다. “국공립·사립 천문대를 불문하고 당시엔 최고 성능의 망원경이었습니다. 2000여만원이 들었지만 실제 유통 과정을 거쳐 구입했다면 1억원짜리급이었어요. 한참 뒤에서야 대전시민천문대에 성능이 비슷한 억대의 망원경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가 1991년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일반인이 천체망원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소문을 듣고 변산 구석까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날씨가 흐려 못 보는 경우에는 근처에 방을 잡아놓고 며칠을 기다리다 기어코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은 안 받았다.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이 끓었다. 단체로 몰려온 학생들에게 라면 끓여주고, 재워주고, 밥 먹여주며 ‘별’ 보여주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일종의 사명감이었어요. 우리나라 천체과학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요.”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엔 김용관 과학상을 수상했다.
무료 천체 관측을 중단한 것은 부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1997년까지 이곳에서 우주여행을 하고 간 사람은 6000여명에 이르렀다. 1997년 이곳에서 헤일밥 혜성(Hale-Bopp Comet)을 보고 간 소년이 청년이 돼서 며칠 전 인사를 오기도 했다.
많은 사람의 손을 타다보니 망원경도 이곳저곳 고장이 생겼다. 사람들 접대하느라 고생하는 부인에게도 미안했다. 최근에는 관람료 1만원을 내걸고는 있지만 안면 있는 사람들에겐 공짜로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단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올 때 추진되던 대형 프로젝트가 어긋나면서 한때 통장이 텅텅 비기도 했다. 포항 호미곶 등대 옆에 있는 호랑이 조각, 해남 땅끝마을 조각공원에 있는 작품 제작 등이 이어지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집은 곧 수리에 들어갈 계획이다. 처음 설계할 때 몇 가지 실수를 보완하고 지붕 쪽 피라미드를 높일 생각이다. “피라미드의 기울기를 높이면 다락방 공간이 훨씬 넓어지겠죠. 큰 창도 만들어 사람들이 놀러 와서 묵어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증축 계획을 설명하던 그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달력을 들고 나왔다. 달력 뒤 하얀 여백에 직접 그린 설계도를 보여줬다. 지붕 각도며 못 개수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신이 나서 어려운 건축 이야기를 계속 하는 바람에 중간에 말을 끊어야 했다.
“시간이 없다”
- ▲ 천문대 내에는 아스트로 피식스사의 206 EDF 굴절망원경이 있다.
“남들이 KTX를 타고 달릴 때 난 자전거로 달린 셈입니다.” 김오성은 자신의 조각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고대 건축물들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죽음이 없었으면 그런 작품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서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돌을 만집니다. 하고 또 하다보면 작품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예전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가 발전하기도 하고. 명작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는 마음이 바쁘다고 했다. 큰 작품을 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는데 체력이 버텨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번 몰입하면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하고, 수십 톤의 화강석과 씨름하니 웬만한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든 일이다.
“돌 값이 만만치 않아요. 8m 크기의 작품이면 원석 값만 2500만원입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니 대출이라도 받아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작업할 생각입니다. 하고 싶은 작품이 많은데 앞으로 몇 년이나 할 수 있을지….”
지난해 조각공원에서 전시회를 열고 새롭게 제작한 대형작품 4점을 선보였다. 올해도 가을께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의 예술적 피는 아들로 이어졌다. 아들 정우씨는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다니고 있다. 전시관에는 아들 작품 두 점이 아버지의 조각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에 아들에게 구상 조각가의 길을 강요하지는 못하지만 요즘 대세인 비구상 조각들은 못마땅하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땀냄새가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경 126도 29분, 북위 35도 37분. ‘별’ 천지인 그곳에 한 장인(匠人)이 묵묵히 자신을 깎고 있었다. 거칠디 거친 그의 손은 화강석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