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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 글쓴이 : 김태완

굴어당 2013. 7. 10. 11:46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는 물론 고대 헬라스의 극을 말하겠지만 조금 넓혀서 생각한다면 유형, 무형의 모든 문학텍스트를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터이다. 아무튼, 역사는 기록된 사실(fact)을 다루는 과학이고 시는 인간 삶의 진실한(real) 측면을 형상화한 문학이다. 역사는 반드시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평가와 판단[褒貶]을 가하여 그 전모를 기술한 것이고 시는 누구에겐가 ‘일어났음직한’, ‘일어날 수도 있는’ 삶의 한 조각을 도려내어 빚어낸 것이다. 정사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이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유비이다.

  중국의 학자 노신(魯迅)의 『중국소설사략』에는 장터에서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이야기꾼이 『삼국지연의』의 한 대목을 이야기하는데, 조조가 잘 되는 장면이 나오면 구경꾼들이 다 화를 내고 유비가 이기는 장면이 나오면 다 같이 손뼉을 치고 환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 영향력이나 업적, 역사의 흐름과 발전방향, 역사적 의의, 역사적 성취와 같은 측면에서 유비는 조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민중은 유비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고 기꺼이 유비의 편을 들고자 했을까!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유비는 인민의 생사를 자기의 생사로 여기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유비는 자기의 야심 때문에 인민을 배신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는 항상 거의 예외 없이 권력을 차지한 다음 권력을 전횡하고 농단하며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민은 역사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시에서 진실을 찾았던 것이다.

  박계현(朴啓賢)이 경연 석상에서 성삼문(成三問)의 충성을 논하였다. 박계현이 “『육신전(六臣傳)』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것인데 상께서 가져다 보시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십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이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는 놀라고 분하여 하교하였다. “말이 많이 그릇되고 망령되며 선조를 무함하여 욕하였으니 내가 다 찾아내어 모두 불에 태워야겠다. 또 그 『육신전』을 서로 이야기하는 자의 죄를 다스리겠다.” 다행히 영의정 홍섬(洪暹)이 입시하였다가 육신의 충성을 극력 말했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여 시종하는 신하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 상이 이에 감동하여 깨닫고 분을 그쳤다.
  삼가 생각건대, 육신은 본래 충절이 있는 선비이나 지금 당장은 말할 주제가 아니다. 『춘추』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긴다.” 하였는데 이 또한 고금의 공통된 의리[通義]이다.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에 맞지 않은 말을 하여서 거의 주상이 지나친 거조를 내게 할 뻔하였으니 어리석어서 일을 모른다 하겠다. 예전에 김종직(金宗直)이 성묘(成廟, 성종)에게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성묘가 놀라 낯빛이 변하였다. 김종직이 조심스럽게 “행여나 변고가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그제야 성묘의 안색이 평온해졌다. 애석하다! 시종하는 신하로서 이러한 말을 상의 앞에서 아뢰는 이가 없었다.


朴啓賢於經席, 因論成三問之忠. 啓賢曰, 六臣傳是南孝溫所著, 願上取覽則可知其詳. 上乃取六臣傳觀之, 驚憤下敎曰, 言多謬妄, 誣辱先祖. 予將搜探而悉焚之. 且治偶語其傳者之罪. 賴領議政洪暹因入侍, 極言六臣之忠, 辭甚懇切. 侍臣多有墮淚者, 上乃感悟而止. 謹按, 六臣固是忠節之士矣, 非當今之所宜言也. 春秋爲國諱惡, 此亦古今之通義也. 朴啓賢輕發非時之言, 幾致主上有過擧, 可謂不解事矣. 昔者, 金宗直啓于成廟曰, 成三問是忠臣. 成廟驚變色. 宗直徐曰, 幸有變故, 則臣當爲成三問矣. 成廟色乃定. 惜乎! 侍臣無以此言啓于上前者也.
 
- 이이(李珥, 1536~1584),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전서(栗谷全書)』

 
 ▶ 세조에 의해 폐위된 소년 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고 죽은 사육신의 묘.
   한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있다. 숙종 때 공식 인정을 받았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1576년(선조 9) 6월 기사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일화와 플롯이 거의 같은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溪記聞)』에 실린 내용이다. 명종 초년에 윤해평(尹海平)이 『육신전』을 인쇄하여 반포하기를 청하였다. 명종이 매우 성을 내며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 뒤 선조 때 이이가 또 이 일을 거론하였다. 선조가 “집에 『육신전』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반역으로 논죄하겠다.” 하였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류성룡이 “국가가 불행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들이 신숙주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삼문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하고 묻자 선조가 노여움을 풀었다.

  김시양은 광해군, 인조 때 활동한 문신으로 내ㆍ외직을 두루 겸하고 외교관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경전과 역사에 밝고 지방 수령으로 치적이 있었다. 천성이 청렴결백하고 언행이 엄정하며 강직하였다. 청백리로 뽑혔다. 『부계기문』은 광해군 때 종성(鐘城)에 귀양 가서 저술한 견문 수필의 책이다.

  성종 때 김종직이, 명종 초에 윤해평이, 선조 때는 이이가 성삼문을 들먹이고 『육신전』으로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조선의 학자 관료 사회에서 세조의 쿠데타로부터 야기된 유교적 세계의 가치관 혼동과 유교적 지식인의 정체성 혼란이 쿠데타 당초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도록 해소되지 않고 양심의 시금석이 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왕조사회에서는 왕에게 녹을 받고 왕의 신하가 된 이상, 왕의 계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왕에게 벼슬하지 않고 왕의 녹을 먹지 않고 왕의 땅에서 살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에 유교적 가치관이 체화한 지식인 관료들은 세조의 쿠데타를 용인할 수도, 성종ㆍ명종ㆍ선조까지 이어진 세조의 왕계(王系)를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행여나 국가에 변고가 있다면 성삼문이 되겠다고 하는 말은 실은 유교적 충의 가치관으로 세조의 원죄를 풍자한 것이다. 성종도 선조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기의 왕계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충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원죄를 안고 시작한 권력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김종직, 이이, 류성룡의 말은 이미 세조의 쿠데타를 비평하고 성삼문의 충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은 이미 역사적 언명이 되었다. 어떤 발언이나 사건을 ‘역사적’이라고 한정하면 그 발언이나 사건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 사건의 평가에 권력이 개입하려 하고, 권력이 평가와 판단을 주무르고자 하는 유혹을 아주 강하게 받으며, 거의 예외 없이 그 유혹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통성이 부족하고 권위가 없는 권력일수록 그런 유혹에 더 약하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역사를 주무르면 역사는 뒷설거지에나 쓰이는 행주나 걸레짝이 되고 역사를 기록한 책은 뒷간의 밑씻개만도 못하게 된다. ‘다시는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을 때 바로 그림자처럼 뒤를 이어서 그런 자가 또 나오리라는 것을 그 말을 하는 당시에는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역사의 흐름을 왜곡하는 자들의 면벌부가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그런 말을 했을까? 상(商)을 세운 탕왕(湯王)은 하(夏)의 걸왕(桀王)을 추방하고서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을 자가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다 한다. 이를 참덕(慙德)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로 이 탕왕의 일은 후세 모든 쿠데타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기에 역사적 발언,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이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함이다.

  역사적 발언, 역사적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역사가 언제 어떻게 왜곡되고 불법적 권력의 합리화에 도용되고 역사적 범죄를 정당화하는 데 욕되게 사용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역사를 당초에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말이 가당한 말인가? 누가, 무슨 권위로,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역사의 평가는 권력이 내려서는 안 된다. 왕조시대에 하늘 아래 ‘나 한 사람’인 왕의 권위로도 역사를 엿보지 못한 것은 권력이 역사에 개입하는 순간 바로 비극이 잉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역사를 평가해야 하는가? 역사는 인민의 보편의지가 평가해야 하며 보편의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보편의지란 무엇인가? 보편의지라는 것이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보편의지란 헤겔처럼 자유의 신장 이나 또는 흔히 말하는 인류애, 공동체 의식, 인민의 연대감, 우애의 신장과 같은 보통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의지라는 말이다. 이런 사회는 누구나 바라기 때문이다. 일부에게 유리하고 일부가 이익을 얻고 일부가 권력을 독차지한 역사는 인민의 역사가 아니다.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민의 권리를 분쇄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평가는 인민에게서 외면을 당한다. 권력이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꾼 역사적 평가는 인민이 조소한다. 인민은 역사가 다루지 않은 이면(裏面), 역사가 외면한 진실을 시로써 엮어 노래한다. 권력이 역사를 멋대로 조작하면 인민은 시로, 노래로, 구전으로 진실을 전해 내린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돌에 새긴 비문보다 입으로 전하는 비문이 더 값지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는, 조선 시대는 아예 논외로 하고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으로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의 무대였다.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는 자랑스럽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외면한 역사였다. 누가, 왜 역사를 왜곡하고 외면하는가? 치부는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치부는 있는 그대로 두고서 늘 의식해야 그런 부끄러운 일을 다시 하지 않게 된다. 유럽에서는 나치 전범을 지금까지도 찾고 있고 찾는 대로 법정에 세워 어떤 형식으로든 처벌을 한다. 그리고 나치에 희생되었거나 저항하여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행적이라도 기록하고 기념물로 남긴다. 부끄러운 일은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러운 일은 자랑스러운 대로, 나쁜 일은 나쁜 대로, 좋은 일은 좋은 대로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정리해야 한다. 권력의 성향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갈지자로 갈팡질팡한다면 그런 평가를 어떻게 믿고 어떻게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

  역사를 입맛대로 회 쳐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삶아 먹고, 찜 쪄 먹고, 볶아 먹는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