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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 300 수,정범진 , 이성호 옮김,문자향 | 2007.05.07 ,판형 A5 | 페이지 수 463

굴어당 2015. 1. 30. 21:49

 

 

두보 시 300 수,정범진 , 이성호 옮김,문자향 | 2007.05.07 ,판형 A5 | 페이지 수 463         

두보 시 300 수

저자
두보 지음
역자
정범진 , 이성호 옮김 역자평점 6.4
출판사
문자향 | 2007.05.07
형태
판형 A5 | 페이지 수 463 |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712-770)는 동시대의 시인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로 일컬어지는 최고의 시인이다. 두보의 시는 이전의 시풍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와 아울러 후대의 시인들에게는 한시의 전범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두보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향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시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두보시300수>는 평생을 중국문학 연구에 종사한 노학자와 소장학자가 함께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다. 두보의 시를 시기별로 나누었으며, 각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시들을 꼼꼼한 주석과 함께 번역하였다. 또한 부록에는 두보 연보, 역대 명가들의 두시총평, 두보의 시를 제재로 한 유명한 화가들의 두보시의도를 실었다. 원문에는 한글 음을 함께 붙여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편의를 돕는다. [양장본]

저자 두보

저서(총 6권)

정범진
경북 영주 출생. 성균관대학교 중국문학과, 국립대만사범대학 중국문학연구소(문학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문학박사)를 졸업했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한국중국학회 회장,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지냈으며, 중국 산동대학교 명예교수, 대만정치대학 명예문학박사, 한-우크라이나 친선협회 회장이다.
지은 책으로 『중국문학사』, 『唐代소설연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중국소설사략』, 『唐代전기소설선』, 『사기』(공역) 등이 있다.

이성호
경남 함안 출생. 건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 부설 한림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건국대․성균관대․대진대 강사와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연구논문으로 「목련변문연구」, 「진사도 산문연구」 등이 있으며, 옮긴책으로 『사기본기』(공역), 『사기열전』(공역), 『내 마음을 찾아가는 길』, 『대경전:위민지략』, 『역경:역경의 지혜로 미리 보는 세상살이』가 있다.

두보전(杜甫傳)
두보 관계 지도

용문산 봉선사를 유람하다(遊龍門奉先寺)
태산을 바라보다(望嶽)
연주의 성루에 올라(登兗州城樓)
원외랑 송지문의 옛 별장에 들르다(過宋員外之問舊莊)
용문산(龍門)
정씨의 동쪽 정자(重題鄭氏東亭)
이백에게(贈李白)
항상 술에 취한 여덟 명의 선인(飮中八仙歌)
병거행(兵車行)
가난할 때 사귄 친구(貧交行)
안서로 가는 위서기를 전송하다(送韋書記赴安西)
곡강(曲江)
여인행(麗人行)
구일 곡강에서(九日曲江)
영가 현위가 된 배이규를 전송하다(送裵二虯尉永嘉)
종손 제에게 보이다(示從孫濟)
뜰 앞 감국을 탄식하다(歎庭前甘菊花)
정광문에게 희롱 삼아 증여하고 아울러 소사업에게 올리다(戱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
백수 명부의 외삼촌댁에서 비를 기뻐하다가 '過' 자를 얻다(白水明府舅宅喜雨得過字)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가서 읊은 오백 자의 감회(自京赴奉先詠懷五百字)
피난하다(避地)
왕손을 슬퍼하다(哀王孫)
진도를 슬퍼하다(悲陳陶)
눈을 대하다(對雪)
설날에 누이동생에게 부치다(元日寄韋氏妹)
춘망(春望)
어린 아들을 생각하다(憶幼子)
백오 일째 되는 날 밤에 달을 바라보다(一百五日夜對月)
곡강 언저리에서 슬퍼하다(哀江頭)
우중에 소단을 방문하다(雨過蘇端)
영주 이판관을 전송하다(送靈州李判官)
달(月)
저물녘 길을 가다가 구호하다(晩行口號)
홀로 술을 마시다 시를 이루다(獨酌成詩)
팽아행(彭衙行)
강촌 3수(羌村三首)
북쪽으로 가다(北征)
여주로 전출된 가각로를 전송하다(送賈閣老出汝州)
곡강에서 술을 마시다(曲江對酒)
동생의 소식을 받다(得舍弟消息)
필사요에게 증정하다(贈畢四曜)
맹운경에게 답하다(酬孟雲卿)
정현 정자를 읊다(題鄭縣亭子)
서악을 바라보다(望嶽)
고삼십오첨사에게 부치다(寄高三十五詹事)
마음을 달래다(遣興)
홀로 서서(獨立)
동생을 그리다(憶弟)
불귀의 객(不歸)
위팔처사에게 주다(贈衛八處士)
신안의 관리(新安吏)
동관의 관리(潼關吏)
석호의 관리(石壕吏)
신혼의 이별(新婚別)
늙은이의 이별(垂老別)
가족 없는 이별(無家別)
여름 뙤약볕(夏日歎)
입추 뒤에 짓다(立秋後題)
은거하는 완방에게 주다(貽阮隱居)
가인(佳人)
이백을 꿈에 보다(夢李白二首)
마음을 달래다(遣興)
진주잡시(秦州雜詩)
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다(月夜憶舍弟)
적곡의 서쪽 산 인가에서(赤谷西큶人家)
비가 개다(雨晴)
마음을 달래다(遣懷)
다듬이질하다(擣衣)
갈대(蒹葭)
황량한 채마밭(廢畦)
들에서 바라보다(野望)
주머니가 비다(空囊)
가을에 완은거가 염교 서른 단을 보내오다(秋日阮隱居致薤三十束)
그리운 사람아(所思)
진주를 떠나며(發秦州)
철당협(鐵堂峽)
이공산(泥功山)
건원 연중에 동곡현에서 살고 있을 때 지은 노래 일곱 수(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七首)
동곡현을 떠나며(發同谷縣)
목피령(木皮嶺)
오반령(五盤)
검문(劍門)
성도부(成都府)
살 곳을 정하다(卜居)
초당이 이루어지다(堂成)
촉의 재상(蜀相)
매우(梅雨)
어느 손님(有客)
손님이 와서(賓至)
농가(田舍)
강촌(江村)
촌 노인(野老)
구름 자욱한 산(雲山)
북쪽 이웃(北隣)
남쪽 이웃(南隣)
고적에게 부치다(因崔五侍御寄高彭州適一絶)
왕시랑에게 부치다(和裵迪登新津寺寄王侍郞)
이별을 한탄하다(恨別)
마을의 밤 풍경(村夜)
서쪽 교외(西郊)
수각사에서 노닐며(遊修覺寺)
다시 수각사에서 노닐며(後遊)
강가를 홀로 걸으며 꽃을 찾다(江畔獨步尋花)
손님이 와서(客至)
마음을 달래다(遣意)
되는 대로 이루다(漫成)
봄밤의 반가운 비(春夜喜雨)
봄물이 불어나다(春水生)
봄물(春水)
강가의 정자(江亭)
일찍 일어나다(早起)
애석하다(可惜)
한식(寒食)
금대(琴臺)
수정의 난간에서 마음을 풀어본 두 수의 시(水檻遣心二首)
해로운 나무(惡樹)
큰 녹나무(高楠)
방 한 칸(一室)
들에서 먼 경치를 바라보다가 상소선을 방문하다(野望因過常少仙)
동천으로 가는 배오를 전송하다(送裵五赴東川)
가을바람에 띠 지붕 날린 노래(茅屋爲秋風所破歌)
당흥 주부 유제를 만나다(逢唐興劉主簿弟)
온갖 근심이 모여들다(百憂集行)
장난삼아 화경에 대하여 지은 노래(戱作花卿歌)
화경에게 주다(贈花卿)
젊은이들이여(少年行)
만나지 못하다(不見)
초당에서 즉흥적으로 지은 시(草堂卽事)
광주 판관 장숙경에게 부치다(得廣州張判官叔卿書使還以詩代意)
절구(絶句)
다시 정련에게 주다(重贈鄭鍊絶句)
치자나무(梔子)
들에서 바라보다(野望)
사람을 피하다(畏人)
은거하다(屛跡)
얼큰히 취해 엄중승을 찬미하는 한 농부를 만나다(遭田父泥飮美嚴中丞)
절구(絶句)
한 농부가 앵두를 선물로 가져오다(野人送朱櫻)
하옹과 이별하면서(贈別何邕)
종려나무(海棕行)
광록판(光祿坂行)
가을을 슬퍼하다(悲秋)
나그네의 밤(客夜)
여행하고 있는 곳의 숙소(客亭)
구일에 재주 성루에 오르다(九日登梓州城)
들에서 바라보다(野望)
진습유 고택에서(陳拾遺故宅)
왕시어를 모시고 통천현 동산 정자의 연회에 참석하다(陪王侍御宴通泉東山野亭)
꽃 아래에서(花底)
버드나무 곁에서(柳邊)
관군이 하남·하북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聞官軍收河南河北)
먼 곳에서 떠돌다(遠遊)
봄날 재주의 성루에 오르다(春日梓州登樓)
혜의사에서 성도로 가는 왕소윤을 전송하다(惠義寺送王少尹赴成都)
부강에 배를 띄워 서울로 돌아가는 위반을 전송하다가 '山' 자를 얻다(涪江泛舟送韋班歸京得山字)
성도로 돌아가는 위랑사직을 전송하다(送韋郎司直歸成都)
우두사에 오르다(上牛頭寺)
우두산 정자에 올라서(登牛頭山亭子)
도솔사에서 바라보다(望兜率寺)
감귤나무 과수원(柑園)
처현 곽명부의 모옥을 읊다(題郪縣郭三十二明府茅屋壁)
지팡이에 기대다(倚仗)
한 쌍의 제비(雙燕)
또 두사군에게 드리다(又呈竇使君)
연못의 봄 기러기(官池春雁)
어머니를 모시고 검중으로 돌아가는 왕판관을 전송하다(送王十五判官扶侍還黔中)
비를 기뻐하다(喜雨)
구일(九日)
땅거미(薄暮)
외삼촌과 석별의 정을 나누다(王閬州筵奉酬十一舅惜別之作)
배를 타다(放船)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薄遊)
출정하는 병졸(征夫)
일찍 핀 꽃(早花)
낭주를 떠나면서(發閬中)
세모(歲暮)
성 위에서(城上)
강에 배를 띄우다(泛江)
저물녘 쌀쌀함(暮寒)
나그네(遊子)
낭수가(閬水歌)
방태위 묘를 떠나며(別房太尉墓)
강을 건너다(渡江)
돌아와서(歸來)
봄에 돌아오다(春歸)
초당(草堂)
네 그루의 소나무(四松)
성루에 올라(登樓)
절구 두 수(絶句二首)
황하(黃河)
관청에서 숙직하면서(宿府)
강마을에 비가 내리다(村雨)
나른해서 잠 못 이루는 밤(倦夜)
친구를 그리며(懷舊)
초겨울(初冬)
동지가 이른 뒤(至後)
봄날 강촌(春日江村)
봄이 멀어져가다(春遠)
삼운 삼편(三韻三篇)
촉을 떠나면서(去蜀)
비를 기뻐하다(喜雨)
여행중 밤에 회포를 적다(旅夜書懷)
우왕의 사당(禹廟)
고상시의 사망 소식을 듣고(聞高常侍亡)
근심을 털어버리다(撥悶)
운안 땅 구일, 정십팔이 여러 손을 모신 연회에서(雲安九日鄭十八携酒陪諸公宴)
상징군과 이별하며(別常徵君)
장강(長江)
또 눈이 내리다(又雪)
남초 땅(南楚)
자규(子規)
기주로 옮겨서 짓다(移居夔州作)
비가 개다(晴)
물을 끌어당기다(引水)
백제성에 올라(上白帝城)
새벽에 백제성과 염산을 바라보며(曉望白帝城塩山)
무후 사당(武侯廟)
협곡 풍경을 보면서(峽中覽物)
정남을 그리며(憶鄭南)
기주 노래, 절구 열 수(夔州歌十絶句)
오래 묵은 측백나무(古柏行)
강가에서(江上)
비가 개다(雨晴)
비가 그치지 않다(雨不絶)
비(雨)
염여퇴(灩澦堆)
백제성(白帝)
한밤중에(中夜)
백발을 드리우다(垂白)
한밤중(中宵)
잠들지 못하다(不寐)
강 위에 뜬 달(江月)
둥근 달(月圓)
초각(草閣)
서각의 밤(西閣夜)
밤(夜)
닭을 잡다(縛鷄行)
서각에서 비를 바라보다(西閣雨望)
가을바람(秋風)
가을 흥치(秋興)
근심을 풀다(解悶)
싸움닭(鬪鷄)
물새(鷗)
고식안에게(贈高式顔)
협구(峽口)
서각의 밤(閣夜)
양서를 겨울에 바라보면서(瀼西寒望)
입춘(立春)
강가의 매화(江梅)
외로운 기러기(孤雁)
뱅어(白小)
늦봄에(暮春)
즉석의 일로 읊다(卽事)
입택(入宅)
달(月)
과수원(園)
반딧불이를 보다(見螢火)
가을이 맑네(秋淸)
가을 들녘(秋野)
새벽에 바라보다(曉望)
높은 곳에 오르다(登高)
해가 진 뒤(日暮)
벼를 벤 뒤 회포를 읊다(刈稻了詠懷)
늦가을 강마을(季秋江村)
홀로 앉아서(獨坐)
비(雨)
동지(冬至)
백제성 누대(白帝樓)
다시 흐려지다(復陰)
인일(人日)
비를 무릅쓰고 동생 집을 찾아가다(乘雨入行軍六弟宅)
강변의 별과 달(江邊星月)
저물녘에 돌아오다(暮歸)
공안산 산관으로 이거하면서(移居公安山館)
공안현에서 회고하다(公安縣懷古)
세안행(歲晏行)
악양성 아래에 정박하다(泊岳陽城下)
악양루에 올라서(登岳陽樓)
청초호에서 자다(宿靑草湖)
사당 남쪽에서 저녁에 바라보다(祠南夕望)
담주를 떠나며(發潭州)
한식 다음날 배 안에서 짓다(小寒食舟中作)
강남에서 이귀년을 만나다(江南逢李龜年)
난리를 피해 달아나다(逃難)

[부록]
시성(詩聖) 두보의 시와 인생
두보 연보
역대 명가들의 두시총평(杜詩總評)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
제목 찾기

 

 

두보시300수ࡕ(정범진․이성호 옮김)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평생을 중국문학 연구에 종사한 노학자와 소장학자가 함께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다.
두보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 출신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그의 먼 조상은 진(晉)나라 때의 학자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당나라 초기에 이름을 떨쳤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두보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각지를 유랑하며 이백(李白)․고적(高適)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도 두보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안녹산의 난을 비롯한 잦은 전란으로 인해 유랑의 삶을 계속해야 했다. 그는 오랜 유랑 생활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동정호(洞庭湖) 인근의 배 안에서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두보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향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바로 그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두보는 동시대의 시인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두보의 시는 이전의 시풍(詩風)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와 아울러 후대의 시인들에게는 한시(漢詩)의 전범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를 '시성(詩聖)'이라 한다. 또한 두보의 장편 고시(古詩)는 사회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시사(詩史 : 시로 표현된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보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당나라 때의 한유(韓愈)가 "이백․두보의 문장이 있는 곳에, 그 불꽃은 만 길이나 빛나리" 하며 찬양한 이래로, 송나라로 접어들어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두보는 슬픔과 기쁨(悲歡), 막힘과 통함(窮泰), 밖으로 발함과 안으로 거두어들임(發斂), 아래로 내리누름과 위로 올라감(抑揚), 빠름과 느림(疾徐), 종횡(縱橫) 등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평담(平淡)하고 간이(簡易)한 것이 있고, 화려하고 정확한 것이 있고, 삼군(三軍)의 장수 같은 엄함과 위엄이 있고, 천리마같이 치달림이 있고, 산골짜기 은사 같은 담백하고 정간(精簡)함이 있고, 고귀한 공자(公子) 같은 풍류가 있다. 두보의 시는 들어가는 실마리가 치밀하고 사상 감정이 깊기 때문에, 보는 자가 그 속내까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묘처를 알기가 쉽지 아니하니, 견문이 얕은 자가 어찌 쉬이 두보의 시를 엿볼 수 있으리오? 이것이 바로 두보가 전무후무한 위대한 시인이 되는 까닭이다."(왕안석)

"두보의 시, 한유의 문장, 노공(魯公, 顔眞卿)의 서예는 모두 각 분야의 집대성한 것들이다. 시를 배울 때는 마땅히 두보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데, 규칙과 법도가 있기 때문에 배울 만하다. 한유는 시에 대해서는 본래 이해함이 없었지만, 재주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빼어났을 따름이다. 도연명은 시를 지은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의 취향을 써내었을 뿐이다. 두보의 시를 배우면, 설령 완벽하게 배우지 못하더라도, 썩 괜찮은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한유의 재주와 도연명의 묘함이 없이 그들의 시를 배운다면, 결국에는 백거이(白居易)가 될 뿐이다."(소식)

두보의 시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도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두보의 시를 모르고서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 행세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두보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시는 마땅히 두보를 공자(孔子)로 삼아야 한다. 그의 시가 백가의 으뜸이 되는 것은 『시경』 3백 편을 이었기 때문이다. 『시경』 3백 편은 모두 충신, 효자, 열부, 양우(良友)들의 진실하고 충후한 마음의 발로이다. 두보의 시는 고사를 인용함에 있어 흔적이 없어서 언뜻 보면 자작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출처가 있다. 바로 두보가 시성(詩聖)이 되는 까닭이다."

또한 한글이 창제된 뒤에는 왕명으로 두보의 시 전체가 번역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두시언해(杜詩諺解)』(원제는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이다. 『두시언해』는 세종 25년(1443)에 착수하여 38년 만인 성종 12년(1481)에 간행하였는데, 이는 국가사업으로는 처음으로 번역한 개인의 시집이다. 유학(儒學)을 국시로 채택한 조선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보다 오히려 먼저 번역한 셈이니, 두보의 시가 그 당시 얼마나 높이 평가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ࡔ두보시300수ࡕ는 두보의 시를 시기별로 나누어 그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시들을 꼼꼼한 주석과 함께 번역한 책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두보 연보, 역대 명가들의 두시총평(杜詩總評), 두보의 시를 제재로 한 유명한 화가들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를 실어놓았다. 원문에는 한글 음을 함께 붙여서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편의를 도왔다.[교보문고 제공]

책속으로

높은 곳에 오르다(登高)

* 대력 2년(767) 56세 때 지은 시이다. 이해 봄에는 서각에서 적갑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양서 西로 옮겼다. 가을에는 다시 양서로부터 동둔東屯의 농장農莊으로 갔다가 거기서 곧 다시금 양서로 되돌아왔다. 이 시는 곧 이때 지은 것이다. 그러나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음력 9월 9일 즉 중구일重九日(중양절重陽節)에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행하여 왔던 일종의 전래 풍습이다.

바람 급하고 하늘 높고 원숭이는 슬피 울고
강물 맑고 모래 희고 새들은 공중을 비상한다
드넓은 수풀엔 우수수 낙엽 지고
무한한 장강長江은 유유히 흘러간다1)
만리 떠나온 슬픈 가을엔 언제나 나그네였고
백년 지녀온 많은 질병에 홀로 누대 오른다2)
가난으로 온통 세어버린 귀밑머리 한탄하고
노쇠해서 새삼 걸쭉한 탁주잔을 멈춰버린다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   倒新亭濁酒杯

1) 장강(長江) : 지금의 양자강을 가리킨다.
2) 여기서 백년이라고 한 것은 곧 평생을 말한다. 앞 구의 '만리'와 대對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썼다. 이때 두보는 56세였다. 만리라고 한 것도 실제의 거리가 아니다.
3) 원문의 '신정新亭'에서 '정亭'은 멈춘다는 뜻으로, '정停' 자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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