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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푸른 투르크’ 돌궐
유라시아 대륙은 6세기 전반 또 한번 주도 세력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운 세력의 중심에는 아사나(阿史那)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다. 중가리아(Jungaria) 남부 초원과 알타이 산지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들은 552년, 그때까지 몽골 초원을 지배하던 유목국가 유연(柔然)을 무너뜨리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돌궐(突厥)이 이들이다. 중국식 해석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의 모습이 투구와 비슷했는데, 이들이 투구를 ‘돌궐’이라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로 인해 이름을 (돌궐로) 했다”고 나온다. 고대 투르크어로는 ‘쾩 투르크’라고 했다. ‘푸른 투르크’ 혹은 ‘성스러운 투르크’라고 해석할 수 있다.
- ▲ 돌궐 제국의 발전을 기록한 고대 투르크 문자로 된 빌게 카간 비석(왼쪽)과 퀼 테긴 비석 /정재훈 교수 제공
초원의 패자가 된 돌궐은 세력을 더 크게 확대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런 야심을 품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북중국의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돌궐에 대해 견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됐다.
더욱이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북중국의 정권들은 각기 세력을 확대하고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신흥 세력인 돌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덕분에 돌궐은 북중국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물적 지원까지 받으며 서방으로의 진출을 시도할 수 있었다.
돌궐의 서방 진출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먼저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과 북인도 등지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에프탈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이것은 마치 13세기 몽골 제국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호레즘 제국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발전시킬 때와 같은 양상을 띠었다. 돌궐 역시 유목 제국으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진출해 이 지역을 세력권에 두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돌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페르시아와 양동 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에프탈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패한 에프탈의 잔여 세력들은 서방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아바르(Avar)라고 불렸다. 아바르는 그 뒤로 비잔티움(동로마)은 물론 동유럽 지역까지 흘러들어간 집단과도 연결이 된다고 추정된다.
에프탈을 무너뜨린 돌궐은 이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 유목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하나로 통합된 중앙아시아는 과거와 달리 분절되지 않고 모두 연결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무대로 부상할 수 있었다.
돌궐은 이를 매개로 주변의 거대한 정주 문명 세계까지 연결시킴으로써 미증유의 활발한 교류를 주도하게 되었다. 돌궐은 그 후에도 교역 체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초원을 기초로 한 유목민 집단은 내부의 생산력이 자급자족을 하거나 외부에 물자를 공급할 수준은 못 된다. 하지만 국가를 건설하면 많은 잉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고도화하면 할수록 교역에 집중하게 된다.
◆오아시스의 상인들 소그디아나
돌궐은 중국이라는 안정적인 공급지에서 확보한 물자를 가지고 대륙에서 자신들이 확보한 교통로를 통해 새로운 시장으로 이동시켜 판매하는 방식으로 부를 꾀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부족한 경영 능력을 보완해줄 수 있는 오아시스 상인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소그디아나 출신의 상인들이 적임자였다.
- ▲ 삼채에 남아 있는 소그드인의 다양한 얼굴 모습
돌궐에 새로 편입된 소그디아나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지역이었다. 파미르 고원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아랄 해로 들어가는 강인 아무 다리야와 시르 다리야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파미르에서 발원해 사막으로 흘러들어가는 자라프샨(Zeravshan) 강과 카슈카(Khashuka) 강을 끼고 발달했다. 지금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고, 동쪽 끝 일부만 타지키스탄 국경 안에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동부 이란계 방언을 사용하는 인도유럽계통인이었다. 이들은 특히, 자급에 필요한 농경과 함께 주변 지역을 오가는 원격지 상업에 종사하는 대상(隊商)으로 유명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소그디아나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 수십 곳을 개별 도시명에 따라 각기 하나의 성을 붙여 구분한 데에서 나왔다. 이곳 상인들은 돌궐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 일대에 많은 식민 취락을 구축한 상태였다. 이미 중국에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돌궐이 새로운 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들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외부의 위협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교역 이익을 확대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돌궐의 권력층과 결탁해 행정, 외교 등 다양한 분야의 관료로 활동하면서 유목 제국의 발전을 도왔다. 그전까지 유목 세력이었던 돌궐은 이러한 소그드 상인들과의 정경유착(政經癒着)을 통해 새로운 교역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와의 ‘세계대전’
하지만 에프탈이 무너진 이후 주인을 잃은 영토 할양을 두고 돌궐과 페르시아의 대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방의 비단 무역을 장악했던 페르시아 상인들과 돌궐의 지원을 받는 소그드 상인들의 충돌로 불거졌다. 당시 동서 교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비단 유통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양자 간에 심각한 분쟁이 잇따랐다.
- ▲ 당대 소그드 상인 담삼채용
급기야 돌궐은 페르시아와 교섭을 벌이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돌궐을 대표한 소그드 상인이 바로 마니악(Maniak)이었다. 페르시아와의 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그는 먼저, 페르시아측에 비단 금수(禁輸)의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일축했다. 페르시아는 영토 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했다고 판단했다.
돌궐은 567년에 다시 다른 사신을 페르시아에 파견해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 중 일행이 오히려 독살당하고 일부만 귀환하는 등 사태는 더 나빠졌다. 당시 페르시아는 돌궐의 사절이 현지에 도착한 후 풍토병으로 죽었다고 변명했지만, 돌궐과의 교섭을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역시 몽골이 겪은 일을 연상시킨다. 1218년 호레즘으로 파견된 몽골의 사신들이 국경 도시 오트라르(Otrar)에서 살해되면서 양국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돌궐과 페르시아 역시 당시로서는 막대한 경제 이익이 걸린 비단 교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중앙아시아에서 비잔티움으로 연결되는 교역권의 확보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결국 양국 간 교섭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전면전으로 치닫고 말았다. 원군이 필요했던 돌궐은 567년 마니악을 비잔티움으로 파견했다. 바로 예전에 아바르 문제로 교섭을 했던 곳이었다. 마니악은 페르시아 협공과 함께 비단 교역을 의제로 비잔티움 황제를 적극 설득했다.
◆비잔티움과의 협상 타결과 뒤이은 파국
이 무렵 비잔티움 역시 사산조 페르시아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돌궐 상인들이 페르시아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비잔티움으로 물자를 반입하는 것을 허락하게 됐다.
양국 간 교섭이 타결된 후 마니악이 돌궐로 귀국하는 길에 비잔티움의 자마르쿠스(Zamarcus)가 동행했다. 이것은 세계사적 상황의 연출이라고 할 만했다. 마침내 동방의 유목 국가인 돌궐과 서방의 비잔티움이 새로 연결된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만날 수 있게 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멀리 중국에서 비잔티움까지 돌궐을 매개로 하나의 거대한 교역망이 구축될 수 있었다.
양국의 사신 일행은 귀환 도중에 당시 돌궐이 벌이고 있던 페르시아 공격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궐의 페르시아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들은 비잔티움에서 파견된 군대의 호송을 받아 돌궐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6세기 후반 북주를 대표해 돌궐을 방문한 부하라 출신 상인 안가(安伽)의 모습을 새긴 묘곽 부
그 후 571년에는 돌궐이 다시 사신을 비잔티움으로 보내 이전에 페르시아와 맺었던 화의의 파기를 요구했다. 비잔티움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였는데 20여년(571~590) 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돌궐과 비잔티움의 긴밀한 협조 관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돌궐에서 이탈한 부락을 비잔티움에서 받아들임에 따라 576년 양측은 파경을 맞았다. 여기에는 이미 비단을 생산하고 있던 비잔티움에서 자국산 보호를 위해 돌궐과의 교역에 미온적이었던 점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잔티움으로서는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돌궐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돌궐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시 돌궐이 적극적으로 비잔티움과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은 페르시아를 견제함으로써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동서 교역을 독점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은 돌궐이 앞서 북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이뤄 확보한 비단을 기반으로 거대한 유목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돌궐이 경제 이익을 극대화하는 중상주의적 교역 국가 체제를 지향했음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구상은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과 오아시스에 걸쳐 자유로운 왕래와 안전한 교역이 가능한 새로운 통합 체제가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거대 통상권은 오늘날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에 비견할 만했다.
이를 통해 과거에는 인위적 장벽에 막혀 활성화되지 못했던 ‘초원길’이 중국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이 오가는 이른바 ‘비단길’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 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동서 교류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초원의 안정이었던 것이다.
◆몽골제국의 모범이 되다
돌궐은 거대한 중앙아시아 초원을 통해 중국에서부터 서쪽 시장인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독점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소그드 상인들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질서의 구축에 필요한 이들의 외교적 협상력과 그 과정에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통망의 운용 경험, 그리고 이것을 관장할 수 있는 행정 능력 등을 담보하는 소프트웨어까지 갖출 수 있었다.
돌궐의 이러한 교역 체제 지향은 그 후에도 하나의 모범이 되어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유목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훗날 몽골도 바로 이 돌궐의 전례를 본받아 거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 교역을 주도했던 소그드 상인 마니악과 같이 유목 권력과 결탁한 정상(政商)에 대해서는 단편적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무렵 이들의 활동 기록을 통해 6세기 후반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던 돌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돌궐은 에프탈, 페르시아, 그리고 비잔티움 등을 상대로 세계대전이라 부를 만한 스케일의 격전을 치렀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경제 전쟁’을 벌이며 성장 혹은 몰락하는 기업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거에도 자유무역체제 구축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상인들의 처절한 노력이 제국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소그드 상인 마니악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정재훈 (丁載勳)
현재 경상대 사학과 교수이면서 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 및 중앙아시아사(고대 투르크 유목민족사)가 전공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연구소 방문학자를 지냈다.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있다. 공저로 ‘몽골의 역사와 문화’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과 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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