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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르는 집] ③'간송미술관' 전형필 一家

굴어당 2013. 11. 6. 10:22

 

사람을 기르는 집] ③'간송미술관' 전형필 一家

공부하라, 문화재 사랑하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간송… 솔선하는 모습이 곧 가르침
자손들, 자연스레 '옛것' 공부

아버지는 야행성이었다. 밤이 깊도록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린 아들들이 빠끔히 방문을 열어보면 아버지는 도자기, 그림, 글씨 등을 어루만지고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들들은 자연스레 '아, 아버지가 사랑하는 저 물건들은 아주 소중한 것이구나' 느끼게 됐다.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은 그렇게 이 집안에 스며들었다.

문화재 수장가(收藏家)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자식들에게 결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집안에 가훈도 없다. 놓아두고 가만히 지켜보면서 단지 솔선수범했다. 언성을 높이는 법도, 야단을 치는 법도, 매를 드는 법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들은 더 어렵게 느꼈다. '무언(無言)의 가르침'. 이 집 두 아들이 아버지의 교육에 대해 내린 정의다.

간송은 2남3녀를 뒀다. 두 아들이 대를 이어 민족 문화의 보고(寶庫)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자식들은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감성과 감식안,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물려받았다. 아들 둘이 모두 미술을 전공했다. 장남 전성우(79) 간송문화재단 이사장은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다. 한때 서울대 미대에서 가르쳤다. 화가를 '환쟁이'라며 폄하하던 시절 간송은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고 노래 부르던 장남을 말리지 않았다. 전성우 이사장은 "아버지는 오히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게 값비싼 유화 물감을 구해 주셨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서투르나마 유화를 그려봤다. 집은 항상 아버지가 후원하는 화가, 문인, 서예가들로 북적였고 국전(國展) 때면 대작(大作) 하는 화가들이 작업 공간을 찾아 집으로 왔다"고 회고했다.


	1944년 서울 성북동 자택 북단장(北壇莊)에서 두 아들과 함께한 간송 전형필.
1944년 서울 성북동 자택 북단장(北壇莊)에서 두 아들과 함께한 간송 전형필. 왼쪽부터 간송 전형필, 차남 영우, 장남 성우. 사진 속 양(羊) 형태의 석물(石物)은 조선시대 것으로 아직도 성북동 자택에 남아 있다. /간송가 제공
상명대 미대 교수를 지낸 차남 전영우(73) 간송미술관장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1962년 간송이 타계하자 서울대 문리대 고고학과에 다시 들어갔다. 전영우 관장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형은 미국 유학 중이었다. 자연스레 문화재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다. 아버지가 생전에 고유섭 선생 책 같은 걸 권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마침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생겼길래 입학해 이론 공부를 하게 됐다"고 했다.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배운 대로 자식을 키웠다. 전성우 이사장은 "나도 아이들에게 '문화재 사랑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더라"고 했다. 전 이사장은 2남2녀를 뒀다. 그 중 셋이 미술·문화재 관계 일을 한다. 장녀 인지(45)씨는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실장, 차녀 인아(43)씨는 화가, 장남 인건(42)씨는 간송문화재단 사무국장, 차남 인석(39)씨는 경영컨설턴트다. 전영우 관장의 1남2녀는 모두 예술가다. 장녀 인강(42)씨는 금속공예·일러스트레이터, 차녀 인희(40)씨는 섬유·도예 작가, 장남 인성(34·간송C&D 이사)씨는 조각을 전공했다.

간송의 셋째 손녀 인강씨는 "아버지(전영우 관장)는 항상 미술 전시가 있으면 팸플릿이나 도록을 내 책상 위에 살짝 놓아두고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 머리맡에 참고서를 놓아두고 갔다"는 간송 아들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이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이 집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값비싼 '재산'이라 여기는 간송 소장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게 우리 거다. 내 거다'고 생각해 본 적이 감히 없어요. 아버님 거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것이죠. 그게 바로 '문화' 아닙니까."(전성우 이사장) "엄청난 짐이요, 고통이요, 숙제입니다."(전영우 관장)


[이 집안의 보물은] 간송家 여자라면 '수수부꾸미'


	수수부꾸미와 직접 만든 오미자차.
개성 출신인 간송의 맏며느리 김은영(71·서울시무형문화재 매듭장)씨가 1967년 간송가(家)에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김점순(1905~ 1987) 여사는 수수부꾸미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수수 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해 지져 만드는 수수부꾸미엔 보통 팥을 많이 넣지만, 간송가는 팥 대신 대추를 잼처럼 만들어 소를 넣는다. 쑥 철엔 쑥을, 대추 철엔 대추를 위에 올려 장식한다. 이 수수부꾸미와 직접 만든 오미자차<사진>가 간송가의 손님 대접 음식. 단출하면서 품위 있는 것이 꼿꼿한 가풍을 닮았다. 김은영씨는 “며느리에게도, 딸들에게도 수수부꾸미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했다.


[전통의 눈으로 본 이 집안 교육법] 從來多古意 可以賦新詩(종래다고의 가이부신시) 이제껏 옛 뜻이 많았던지라 새로운 시편을 지을 수 있네 ―집두보구(集杜甫句)

청대의 명필 이병수(伊秉綬·1754~1815)가 즐겨 쓴 대련이다. 두보의 시구에서 따왔다. 옛것에서 새것이 나온다. 하늘 아래 새로움은 없다. 호고(好古)의 온축 아래 창신(創新)이 빛난다. 제 생각이 그립거든 옛 뜻에 귀를 기울여라. 파천황(破天荒)을 꿈꾸지 마라. 푹 묵혀 옛 뜻 속에 잠긴 시간이 길어야 비로소 제 말이 술술 나온다. 사람들은 이 이치를 몰라 옛것을 거들떠 안 보고 낯선 것 곁에 배돈다. 그래서 새로운 것과 해괴한 것을 종종 혼동한다. 사람은 듣고 본 대로 자란다. 좋은 표양 훌륭한 옛 뜻이 간절한 까닭이다. 평지돌출은 없다. 선인의 자취가 후인에게로 감염되어 새것과 묵은 것이 나란히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로. 이런 길들이 쌓여 문화가 된다.